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 무조건 안돼보다는 어떻게 하면 될까?
보헤미안 랩소디
한 줄 평 : 부모가 좋음을 강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키 워 드 : 부모가 자신의 내면에서 억압하는 게 많을수록, 자녀도 그 모습을 보일 때 억압하고 제한한다.
자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충동을 실천하고 싶다.
소개와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공항에서 수하물 노동자로 일하며 음악의 꿈을 키우던 이민자 출신의 아웃사이더 ‘파록버사라’ 보컬을 구하던 로컬 밴드에 들어가게 되면서 ‘프레디 머큐리’라는 이름으로 밴드 ‘퀸’을 이끌게 된다. 시대를 앞서가는 독창적인 음악과 화려한 퍼포먼스로 관중들을 사로잡으며 성장하던 ‘퀸’은 라디오와 방송에서 외면을 받을 것이라는 음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려 6분 동안 이어지는 실험적인 곡 ‘보헤미안 랩소디’로 대성공을 거두며 월드스타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던 ‘프레디 머큐리’는 솔로 데뷔라는 유혹에 흔들리게 되고 결국 오랜 시간 함께 해왔던 멤버들과 결별을 선언하게 되는데… 세상에서 소외된 아웃사이더에서 전설의 록밴드 ‘퀸’이 되기까지, 우리가 몰랐던 그들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대사 중 좋은 말, 좋은 생각, 좋은 행동이 기억에 남았다. 여기서 좋음은 선(善), 착함, 잘한다는 의미다.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는 이민가정으로 살아남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혹은 그도 가정에서 그렇게 세뇌당했는지 잘 모른다. 하지만 좋음에 대한 강조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예부터 예의, 착함을 중요하게 여겼다. 언제부터인가 착하다는 말은 칭찬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이야기에 요즘 엄마들은 착하다라는 말을 자주 쓰진 않는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었던 프레디 머큐리, 하지만 아버지와 사회에 받아지려면 자기가 원하는 모습과는 달라져야 한다는 걸 일찍부터 안다. 아이처럼 칭찬받기 위해선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 프레디 머큐리는 그의 이름을 바꾸고 아버지의 뜻과 다른 선택을 한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곳에는 아버지에게 있는 그대로 수용되는 무조건적 사랑을 받고 싶었다. 프레디 머큐리에게 상처받은 내면 아이의 욕구가 느껴졌다. 프레디 머큐리는 좋음이 공동선을 위한 편의에서 나온 기준이며, 좋음이라는 덫에 창의적인 개인은 종종 희생되기도 한다는 것을 간파했다. 만약 그의 아버지가 좋고 나쁨의 기준조차 모호하거나 없었다면 그가 이렇게 개성 있는 가수로 역사에 남았을까? 좋고 나쁨의 구분 기준이 명확할수록 좋음을 허용하는 테두리가 좁을수록 아이들은 선을 넘고 싶다.
유아기 훈육 중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뭐든 과유불급! 선악과 되고 안 되고의 기준을 과하고 경직되게 적용할수록 아이는 나쁜 게 무엇인지에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그것을 시도해보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부모가 좋음만 강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영화에서 잘 보여준다. 부모가 가장 취약하고 제일 싫어하는 면은 어떻게 억압되는지 말이다. 부모가 과하게 억압하는 부분은 자녀(특히 심리적으로 가장 취약하거나 제일 어린 자녀)에게 드러난다. 가족치료에서도 부모가 참았던 욕구나 행동이 마치 풍선 한쪽을 누르면 한쪽이 볼록하게 튀어나오는 것처럼 자녀에게 표현된다.
프레디 머큐리의 성적 취향(개인의 취향이기에 그걸 나쁘다고 표현하는 건 아닙니다.), 적나라한 가사, 6분 이상 되는 곡, 악기 다루는 방법, 파격적인 의상, 기존의 방송국이나 음반 제작사의 룰에 따르지 않는 행동들이 기존의 좋음(기준)을 깨고 부수고 갖고 노는 것처럼 보였다. 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것이자 아버지가 나쁘다고 하실법한 것들이니까.
지인도 부모가 어릴 때 심하게 제한을 두자 청개구리처럼 행동했다. 세수하라고 하면, 얼굴에 모래를 묻혔다. 가장 큰 사건은 자기도 모르게 불을 낸 것이었다. 아이들의 충동은 그것을 안된다고 억압할수록 더 세진다. 그렇다고 마냥 다 허용하라는 게 아니라, 충동을 실행하고픈 그 욕구와 마음을 알아주는 게 필요하다.
“우리 **가 ‘불’이라는 게 궁금했어~ 직접 만지고 싶었어?”
아이가 직접 불에 손을 대는 걸 허락하라는 게 아니다. 불에 달궈진 음식이나 식기를 살짝 피부에 닿게 하면 충분히 그 뜨거움을 알 수 있다. 어떤 충동이든 아이가 심신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 감당할 수 있을만큼만 체험하게 한다. 무조건 안 돼 보다는 어떻게 하면 충동을 안전하게 경험할지 격려한다. 만약 정말 실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좌절감을 공감한다.
이승욱 저자의 '대한민국 부모'에는 자녀가 다른 욕구는 절대 없는 것처럼 공부에만 몰두하게끔 통제했던 어머니의 사례가 나온다. 헬리콥터 맘처럼 딸을 학원과 집으로만 데려다주었는데 딸은 갑작스러운 임신을 했다. 빈틈없이 숨 막히게 압박할수록 어떻게서든 숨구멍을 만들어내는 게 생명력이다.
이렇게 일부 부모는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고 그것을 지킬 때만 자신의 자녀라 인정한다. 기준을 지키지 않을 때 무시하거나 타박하면 아이들은 화가 난다. 그 기준 밖의 자기는 내치니까. 둘 다 자기인데 한쪽만 인정받으니 다른 한쪽은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한다. 내면에 두 명의 사람이 있듯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거나 연기한다. 아이들은 자신의 모습을 잘 모르거나 잊기도 한다. 망각이나 해리가 일어난다. 자기가 보기에 좋은 모습은 타인에게 보이지만, 부모가 싫어할 만한 모습은 점점 감춘다.
영화를 보고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저자 수 클리볼드가 떠올랐다. 그녀의 아들 딜런 클리볼드는 1999년 4월 콜럼바인 고등학교의 졸업반 학생 친구와 함께 학교에서 총기를 난사했다. 그 둘은 같은 학교 학생과 교사 13명을 사살한 후 자살했다. 수 클리볼드는 아들이 학교에 그럭저럭 적응하고 몇몇 친구들과 잘 지내는 괜찮은 모습만 눈에 들어왔고 왠지 어둡고 우울한 모습은 간과했다. 믿고 싶었을 것이다. 내 아이는 괜찮다는 걸.
우리는 자녀의 좋은 모습만 잘하는 것만 필터에 걸러져 보길 바라는 건 아닐까?
그녀도 우리처럼 충분히 좋은 보통 엄마였다. 천생 교육자로 평범하고 상식적인 장애인 학교 선생님이었다. 취미로 그림을 그렸고 다정한 이웃이었다. 사회생활, 봉사활동을 통해 주위 관계도 잘 맺어왔기에 아들이 다른 사람을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딜런이 부모로부터 배웠던 감사, 예의, 배려, 사랑이 딜런이 자살 충동을 느낄 때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자녀가 부모에게 자신의 내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얘기할 수 있을 만큼의 공간, 시간 여유가 없었다. 아이가 어떤 모습이든 허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혀야 한다. 아들에게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만 강조했기에 아들도 어머니에게 자기 안에 있는 자살과 살해 충동을 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좋음만 강조하는 아버지 밑에서 '나쁨'이라고 생각되는 걸 시도해보았던 프레디 머큐리, 어린 시절 나쁨을 어느 정도의 한계선에서 허용했다면 어땠을까? 선한 거짓말, 친구나 동생이 미워 몰래 꼬집거나 쥐어박는 행동을 한 번쯤 모르는 척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
우선 부모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상처, 열등감, 무의식을 알고 자녀에게 줄 영향을 최소화한다. 나는 뭐 때문에 좋음을 내세울 수밖에 없고 아이에게 좋음이 없을 때 나는 어떤 게 느껴질지 부모를 먼저 돌아본다. 부모인 내가 어릴 때 어떤 언행에 야단맞았나, 내가 어떤 기준(선)을 넘을 때 부모님이 불안해하셨는지.
물론, 실천하기 어렵다. 나도 어렵다.
부모 자신의 이해가 먼저다. 내 열등감(콤플렉스)으로 인해 자녀에게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멍에를 지울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그림자 크기부터 줄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