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69세
감독 임선애
출연 예수정, 기주봉, 김준경
개봉 2020년 8월 20일
아! 내가 이 맛에 독립영화 보는 거지!!
한줄평 : 정교한 패스츄리 같은 영화
나를 고개 들게 하는 건, 아직 살아내라는 명(命)이 있기 때문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한 여성이 백발을 바람에 흩날리며 어딘가를 응시한다. 그녀의 눈빛은 형형하다.
영화 ‘69세’ 포스터 오른쪽 상단에는 영화의 카피가 한 줄 적혀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는 건 ’아직‘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뒤로 지는 해의 노을빛이 은은하다.
69세의 나이 효정은 물리치료를 받는 중에 온열기가 작동되는 몇 분 동안 남성 간호조무사 중호(배우 김준경)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그녀의 몸에는 오십견으로 인한 어깨 통증과 오른쪽 손목에는 멍 자국이 남아있다.
첫 장면부터 어둠 속에서 남성과 여성의 대화만으로 화면이 꽉 찬다. 상황을 알 수 없는 소리, 온열기 작동이 끝났다는 신호음만 거슬리게 들린다. 무언가 불길한 상상이 피어났다.
효정(배우 예수정, 69세)은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동거인인 동인(배우 기주봉)에게 아무래도 신고를 해야겠다고 말한다. 다음 날 동인과 함께 간 경찰서에서 효정이 신고 내용을 말하자, 남성 형사 둘은 어이없다는 듯 웃는다. “(그 간호사가) 친절이 과했네.”라고 하자 동인은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고 발끈한다.
그들은 효정을 무성적인 존재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노인도 성적으로 매력적인, 유혹할 수 있는 대상인가? 이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한 것이다. 영화 ‘오아시스’에서 종두(배우 설경구)가 여성 장애인 공주(배우 문소리)를 성폭행당하려 했다는 사실 확인을 하는 경찰서에서도 경찰관이 빈정거리며 말한다. ‘너는 저런 애랑 하고 싶냐고.’ 여성 장애인, 여성 노인의 성폭력 피해 건수는 늘어가는데 피해자들은 신고를 꺼린다. 이런 차별적인 시선과 그들의 피해에 대해 믿으려 하지 않는 2차 가해자들 때문에.
사회적 약자 중에서도 제일 취약한 여성 노인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가 여러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수영장에서 중년 여성 둘이 효정의 뒷모습을 보며 말한다.
“저 아주머니는 언제부터 수영을 하셨길래 몸매가 처녀같이 늘씬하시다.”
“그니까.”
그들의 대화에 효정은 아픈 신음을 내뱉으며 “늙은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요.”라고 말한다.
효정이 예전에 일하던 요양병원 수간호사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이런 외모에 대한 대사는 반복된다. 수간호사가 스카프를 두른 효정을 보더니 아는 체한다. “아줌마네?” 효정의 위아래 훑어보며, “근데 아줌마는 여전하시네. 아니, 이러고 다니면 누가 간병인 하는 여자로 보겠어.”라며 씩 웃는다. 당신의 사회경제적인 지위에 걸맞지 않은 복장이라는 말이다. 효정을 대하는 중년의 여성들은 반말을 섞어가며 ‘뭐 그렇게 젊어 보이게, 혹은 꾸미면서 다녀?’라는 속엣말을 하는데도 효정은 늘 어린 그들에게 존댓말을 쓴다.
그렇다면, 남성의 시각에서 효정을 볼 때는 어떨까?
“전부터 느낀 건데 옷을 되게 잘 입으세요. 여자들 옷이야 나야 잘 모르지만.” 고형사가 말한다.
“고소인이 젊은 여자였으면 그 사람이 구속됐을까요? 옷 잘 입는다고요? 형사님이 보시기에 제가 어때요? - 효정의 한숨 – 나이 들어서 옷 잘못 입고 다니면 무시하고 만만하게 봐서 치근대요. 이 정도 입고 다니면 제가 안전해 보입니까?”
내가 보기에 효정은 이 일로 인해 안전하게 자기를 지키기 위해 입었던 무기가 오히려 남성을 유혹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좌절한 것 같았다. 자신의 외양에 대한 사회의 이중적인 시선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지쳐보였다.
효정은 자신의 나이 때문에 검찰에서 가해자 중호의 구속이 여러 번 기각되자 형사에게 자신이 어떻게 해야 ‘안전’한지 묻는다. 나이가 많으면 성폭행 피해자 대상에도 속하지 않는데 일반인 남성이 보기에는 세련된 여성이라고 칭찬받는 상황이 묘하게 겹쳐진다. 어르신이 옷을 갖춰 입지 않으면 존중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신경 써서 입으면 ‘여성’으로 보이기 위해 애쓴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 사회는 이중적인 기준에서 뭘 어떻게 입으라는 걸까? 정녕 ‘꾸안꾸 룩’이 답인가?
효정은 노인이라, 치매라는 의심을 받고 ‘성폭행’을 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진술서에 ‘심효정(69세)’으로 적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아픈 몸을 회복하기 위해 수영을 얼마나 필사적으로 했는지, 딸이 자기를 찾지 않아도 어떻게든 혼자 삶을 꾸려나가려 했는지는 아무도 알려 하지 않는다. 검찰에서 ‘69’라고 적힌 숫자는 오직 성적인 존재로 보일 수도, 매력적일 수도 없는 사람을 나타낸다.
효정이 처음에는 기억하지 못했던 중호를 처음 본 순간은 사건의 실마리로 중요한 장면이다. 크리스마스 즈음, 효정이 동인과 함께 마트에서 와인을 고르려 하기 직전이었다. 효정이 실수로 떨어뜨린 스카프를 중호가 주워서 건네주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내는’ 와인을 고르는 효정과 동인, 그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성적인’ 존재였다. 그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그 장면을 지켜본 중호는 효정을 할머니로 보았을까? 여성으로 봤을까?
영화는 막바지로 접어들수록 마치 스릴러 같았다. 중호는 우연히 만난 효정에게 소리친다.
“치매 걸렸어? 정말 나 기억이 안 나? 내가 할머니 좋으라고 해줬잖아.”
“너 진짜 개구나.”라고 효정은 기막혀한다.
“진짜 내 인생 끝나는 거 보고 싶은 거야? 어?” 윽박지르는 중호에게
“끝? 인생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아. 네가 저지른 거 하나, 하나 다 갚고 그러고도 질~기게 안 끝나는 게 인생이다.” 일침을 날린다.
질기게 끝나지 않는 인생, 비록 유죄 판결은 받아내지 못했지만 네가 저지른 잘못과 업보는 청산하라는 효정,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고 단호했다. 이 장면이 압권이었다!!
늘 숨으려 하고, 숙이고만 살았을 효정은 중호 앞에서 고개를 떳떳이 든다.
영화 속 대사의 시처럼, 봄볕에 찬란한 눈물처럼.
배우 예수정님, 존경합니다!!
이 영화는 '예수정' 이름처럼 찬란하게 빛납니다.
아래는 영화 속 명대사
제 얘기가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보는 건
살아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후회하는 시간들도 많았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뒷걸음치며 살았습니다.
그저 그늘에 숨어 잊혀지기를
바라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 영화 '69세' 효정(배우 예수정)의 대사
봄볕에 눈물도 찬란하게 빛난다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이제 전 어려운 고백을 시작으로
한걸음 한걸음
햇빛으로 나아가보려 합니다.
- 영화 '69세' 효정(배우 예수정)의 대사
줄에 걸린 해진 양말 한짝
봄볕에 눈물도 찬란하여라
- 남동인 봄볕이라는 영화 '69세' 속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