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방문객 정현종: 부서진 마음을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by 투명서재


방문객


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현종 시집 '광휘의 속삭임' 문학과지성사, 2008



저는 작년 말부터 매주 한번씩 온라인 소마 보이스(somatic voice) 발성 연습을 하고 있는데요.


호흡이 짧고 발성이 약해 조금만 무리해도 목소리가 쉬거든요. 깊은 호흡과 목근육 훈련을 위해 돕는 이와 일주일에 시 한 편을 함께 읽고 낭송합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말했던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입 밖으로 소리를 내는 데는 몸의 준비와 조율이 필요하더라고요. 발성 자체도 새롭지만 이미 알던 시를 새로 읽는 즐거움도 뒤따라왔어요.


분명 배웠던 시인데, 좋은 소리를 내기 위해 읽다 보면 시인이 독자에게 주려던 의미가 새록새록 다가오네요. 낭송하면서 이해한 깊이만큼 듣는 이에게 시를 더 와닿을 수 있도록 전달하게 되는 것 같고요.


이 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이 함께 방문한다니!

이 표현이 놀랍지 않은가요?


누군가와의 만남이, 그가 보낸 많은 시간과 경험, 결국 일생이 따라온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만나게 될까요?


각잡고 진지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존중하는 태도가 될 거예요.


그 사람의 인생에서 배운 것들,

그 사람만의 공간과 시간에서 알 수 있는 것들,

그 사람에게 대대로 내려온 마음의 짐과 유산,

그 사람이 견뎌냈을 고난과 생존전략을


우리는 함부로 말하거나 판단할 수 없을 거예요.

또한

'반드시' 부서지고 깨졌을 마음도 함께 따라옵니다.


부서진 마음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우리는 부서진 마음이 더 바스라질까봐 조심스러워 말을 아끼게 됩니다.

부서진 마음이 산산조각 깨져서 돌이킬 수 없을까봐 다가가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서진 그대로 더듬기만 해도,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시간만 내어도,

옆에 있기만 해도,

누군가에게는 환대가 되지 않을까요?



오래전 일인데 저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어요.

지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무슨 일 있었냐고 물었더니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집니다.

제가 뭔가 말을 하려 했더니, 가만히 입에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더니 가만히 제 어깨에 기댔습니다.

잠시 침묵 속에 어깨만 빌려줬어요.


부서진 그대로 더듬고 괜찮은지 헤아리는 마음,


그런 바람을 '흉내'라도 내고 싶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신은 일방통행인가요? 유턴이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