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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Sep 20. 2018

불안감을 자주 느끼시는 분들께.

불안감 조절

​​제가 심리상담했던 내담자에게 썼던 편지글입니다.

상담하는 기간에 썼던 글은 아닙니다.

상담 종결 후 내담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끄적이다 보니 글이 되었습니다.​

아래 이름은 가명이며 개인을 알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넣지 않았습니다.

내담자에게 글 공개에 대한 동의를 구했구요.​

​공개해준 내담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해림씨에게.

 

해림씨와 상담이 끝난 지도 어느덧 몇 개월이 지났네요.

해림씨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기억납니다. 어찌나 가녀린 인상인지 내가 다 조심스러워졌지요. 가슴 속에 이야기를 얼마나 쌓아놓고 왔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혼잣말하듯 쏟아놓았어요. 상담실까지 오게 만든 제일 큰 계기는 직장에서의 실수였어요. 사장님이 실수를 지적하자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 때는 벚꽃이 만발하던 시기였는데 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지요? 꽃다운 나이 꽃 같이 예쁜 해림씨가 떨듯이 말하는 모습이 처음에 안쓰러웠답니다.

 

해림씨 말을 종합해보자면 안전에 대한 불안이었어요. 집에서 멀리 떨어지면 위험할까봐, 실제로 집에서 먼 곳, 여행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요. 무슨 일이 벌어지면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유도 있었어요. 한 마디로 ‘집’이 가장 안전하며, 집에서 멀어질수록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다고 느껴졌어요.

 

불안이라는 것은 안개와 같아서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습니다. 비온이 ‘주의와 해석’에서 표현한 것처럼 불안은 형태나 색, 냄새, 소리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다뤄야 하니 막막합니다. 불안이라는 감정은 그 밑에 보이지 않지만 깔고 있는 욕구와 감정이 많습니다. 그 안에는 사랑받고 싶은 욕구, 버림받을 것 같은 공포감, 공격성이나 화가 표현될 것 같은 두려움, 우울이 날 삼켜버릴 듯한 위기감 등 여러 가지가 들어있거든요.

뭐 때문에 불안한지 물었을 때 내담자들은 보통 모른다고 답합니다. 불안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실체를 정확하게 알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제가 상담했던 40대 주부는 저녁 남편의 퇴근 시간만 되면 특히 공허하고 불안했습니다. 이 분의 마음 한켠도 푸르고 어스름해졌지요. 다른 주부들은 밥을 안치고 찌개를 끓일 시간에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렸지요. 예상과 다르게 남편은 거의 매일 집에 늦게 들어왔습니다. 그런 남편에게 자꾸 화가 났습니다. 그 불안을 따라가다 보니 저녁밥을 해놓고 하염없이 엄마를 기다리던 어린 자신이 떠올랐습니다. 그 감정과 접촉하고 나서 신기하게도 그 분은 더 이상 남편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내면 아이가 엄마를 기다리듯,남편을 매일같이 기다렸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과한 분노감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 불안을 함께 따라가 봅니다. 사장님이 어떻게 하던가요? 그래서 해림씨는 어땠어요? 앞으로 사장님은 어떻게 할 것 같아요? 해림씨는 어떤 걸 예상하나요? 하나씩 천천히 질문하다 보니 종국에는 나는 직장에서 잘릴 것이라는 생각까지 갔습니다. 해림씨 머리 속에는 실수부터 퇴사라는 결말까지 한달음에 그려진 것입니다. 그 다음 시나리오도 있습니다. 직장을 그만 두면 내가 매월 내는 카드 값과 적금은 어떻게 되지? 다른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이 나이에 어떻게 신입으로 이력서를 내지? 여러 질문들이 꼬리를 뭅니다.

 

불안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은 실제 상황입니다.

어떤 일이 실제로 벌어졌고, 벌어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확인입니다.

과거의 것들을 끌어안아 후회하고, 미래의 것들을 가져와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내 머리 속에 있는 것과 실제 상황을 대조 확인하면 내 걱정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설사 일어났다 해도 내가 또 대처하기 마련입니다. 여기까지는 표면적인 불안이었어요.

 

우리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봅니다. 나는 해림씨의 불안이 어린 시절부터 뿌리가 있었을 거라고 짐작했어요. 건강한 불안이라고 보기에는 오래되고 심했기 때문이에요. 그 불안이라는 동아줄을 타고 점점 해림씨의 역사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랬더니 학령기 이전과 초등학생 시절, 집이나 학원에서 엄마를 기다렸던 해림씨를 떠올립니다. 끝이 있는 시간이지만 어린이들에게는 그 느낌이 영원처럼 긴 시간일 수 있거든요. 어른이 보기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에게는 길고,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공포로 다가오는 상황도 있거든요.

 

청소년기 이전의 아이들은 부모와의 분리, 낯선 사람, 큰 소음, 어두움, 초자연적인 것(귀신이나 마녀 이미지), 천둥, 번개,혼자 자거나 지내는 것, 신체 상해, 동물이나 벌레를 무서워하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것들이 실제 공포대상이 됩니다. 해림씨의 경우 이른 부모와의 분리와 어머니 퇴근 전까지 혼자 지내는 것이 오래 되었기 때문에 공포감이 누적되었습니다. 저희 아이는 친구 집에서 TV로 일본 만화 <신비 아파트> 엘리베이터 귀신을 우연히 본 뒤로 혼자 엘리베이터 타기를 두려워했어요.

 

실제 위험도 존재합니다. 혼자 있을 경우 심하게는 다치거나 성추행의 위협이 있으니까요. 어떤 엄마는 일을 그만 둔 계기가 딸 둘을 집에 놓고 일 나갔다가 집에 불이 날 뻔한 일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해림씨는 안전에 대한 불안을 느낄만했습니다. 실제로 갑자기 다쳤는데 돌봐줄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세상에 혼자 있는 듯 고립된 느낌은 언제 어디서든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집에서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것은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된 시간이 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있다면 괜찮을까요? 그것 또한 아닙니다. 제가 상담했던 사람들은 집안에 가족이 있었어도 그러한 존재 불안을 느낀 적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존재한다는 감각적인 경험이 필수적입니다. 눈을 맞춰주고 손을 잡고 어깨를 쓰다듬고 안아주는 돌봄에 대한 느낌과 기억 말입니다. 상담 초반에는 잘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담을 진행하다 보면 상처 받았던 경험 뒤에 숨어 있는 돌봄 받았던 경험이 나중에 떠오르게 됩니다.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되어야 자신이 사랑 받았던 걸 기억하거든요.

 

해림씨와의 상담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지요. 상담자가 강요하거나 시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한 주는 새로운 행동을 시도하고 와서 해림씨 기분이 좋았고요. 그 다음 한 주는 좋았던 기분만큼 우울해져서 왔지요. 다행인 것은 상담이 진행될수록 점차 이 롤로코스터의 경사가 완만해지는 겁니다.

 

그러면 이 불안을 어떻게 조절해야 할까요?

감정은 몸과 상호작용합니다.

얼굴 표정과 자세, 동작을 바꾸면 나도 모르게 감정의 미묘한 차이가 느껴집니다. 불안을 조절하는 데는 신체적인 자각과 심호흡이 중요합니다. 불안하면 심장 박동이 더 빨리 뛰는 것처럼 동동거리고 움직임도 위태로워집니다. 그럴 때 명상,심호흡, 요가 자세 같은 것으로 몸을 느껴보는 게 좋습니다.

해림씨는 불안할 때 숨을 천천히 쉬어보거나 지금의 감정 상태를 메모해보았죠?특히 직장에서 일이 몰아칠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내 선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일을 구분해서 써보고, 시급성과 중요도에 따라 일의 순서를 적어놓았습니다. 쓴 글을 보니 더 객관적으로 자신의 상태와 상황이 보였습니다.

 

상상으로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도 방법입니다.

‘감정조절’ 책에서 권혜경 박사님께서 제안하신 기법은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 포근하게 보살펴 주는 대상, 위험에서 지켜 줄 수 있는 대상,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지혜로운 대상,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특성을 최대한 생생하게 떠올리는 것입니다.


‘꿈PD 채인영입니다’ 라는 책에서 정신과 의사 채인영 선생님은 유방암 진단을 받으시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3년 동안 산에 오르면서 영상화 훈련을 하셨습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장소인 선생님만의 아지트에 가면서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가 암세포를 깔끔히 청소하는 모습을 상상하셨다고 합니다. 상상기법은 많은 운동선수들에게도 적용되지만, 일반인들의 심신의 건강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해림씨가 생활에서 심한 불안이 느껴질 때마다 호흡, 메모, 다르게 생각해보려고 연습했지요.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것을 경험하면 상담 받지 않고 조절할 수 있어요.

 

상담을 시작함과 동시에 해림씨가 지금까지 삶에서 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하나씩 용감하게 해봤어요. 첫 상담 날 자신은 공연에 혼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데 가보고 싶다 얘기하고 실제 다녀왔죠? 그 이후로 혼자 해외여행, 친구들과의 여행까지. 장장 7개월간의 감정기복을 모두 견디어 내고 “이제 혼자 해볼래요.” 하고 웃던 얼굴이 생생합니다. 해림씨의 여행 이야기를 듣고 다짐해 봅니다. 나도 해림씨처럼 용기 있기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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