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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Sep 20. 2018

부모의 방치와 학대에도 아이는 성장한다.

마음의 근육을 키우려면


제가 상담했던 내담자에게 썼던 편지글입니다.
상담하는 기간에 썼던 글은 아닙니다.
상담 종결 후 내담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끄적이다 보니 글이 되었습니다.​
아래 이름은 가명이며 개인을 알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넣지 않았습니다.
내담자에게 글 공개에 대한 동의를 구했고요.​
​공개해준 내담자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합니다.
사람마다 사정은 다르지만 부모에게 신체, 정서적으로 학대 받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이 글 보고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주은씨에게.


아기가 많이 컸겠지요?
계절의 변화만큼 싱그럽게 자라는 보송보송한 살들과 움직임이 점점 정교해지는 팔과 다리. 잠깐 얼굴 내밀고 사라지는 봄꽃처럼 아기들은 그렇게 자랍니다. 엄마는 아기 커가는 게 아쉬울 즈음에 아기는 어린이가 됩니다. 주은씨 아기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상담센터에 매주 데리고 다니느라 고생 많았어요. 상담센터에 한 번 다녀가면 진이 빠졌지요? 그 노고만으로도 박수 쳐주고 싶었어요. 다른 한 편으로는 얼마나 힘들면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올까 싶었고요.


저도 아기를 키우는 3년이 가장 고되었답니다. 아기를 키우면서 내 어린 시절이 자꾸 떠오르고 혼자서 다 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집에서 혼자 아무 말하지 않은 날에 입을 뗄 때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지?’ 라며 외국어 처음 배울 때처럼 막막합니다. 점점 사회와 멀어지고 내 집이 외딴 섬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죠. 남편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뉴스에 나온 이야기를 해줬는데 내가 모르고 있었더니 뉴스 좀 보라고 했지요. 그렇게 사람들과 사회와 점점 단절되어 갔습니다. 남편과 친정어머니께서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셨는데도 불구하고 그랬답니다.


그러면서 ‘나’라는 사람이 엄마만 남고 투명인간처럼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의 어린 시절만 해도 대가족이 살았고 여성에게 남성적 역할까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에는 여성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탐색하고 그 ‘나’라는 개념에 일과 직장 같은 진로의 개념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엄마들이 정체감 혼란을 겪습니다. 그 여러 개념 중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직업인으로서의 나’가 사라지니까 다시 ‘나는 누구지?’ 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마치 빈둥지 증후군처럼. 갱년기 여성이 역할에 대해 자녀가 독립해서 떠날 때, 은퇴하실 때 우울감과 상실감을 겪는 것처럼요.


내 사정이 이러했는데 주은씨는 친정어머니께서 살아계시지만 양육에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지요. 그러니 그 속상함을 어떻게 풀었을까요? 동네 엄마들이 친정어머니와 함께 식사하고, 아이를 맡기고 외출하는 걸 볼 때마다 무척 부러웠지요. 주은씨가 말했죠? “내가 아기를 키워 보니 엄마가 더 이해되지 않아요. 나는 아기가 이렇게 예쁜데 엄마는 저한테 왜 그랬을까요?” 주은씨가 당했던 방치와 예상치 못한 폭력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했습니다. 마치 내가 영화 속 장면을 보는 것처럼 그려져서 아이였을 주은씨의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제가 일본의 한 호텔 라운지에서 봤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자기 여동생과 놀고 있었죠. 아버지가 갑자기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가 아버지 앞으로 뛰어오자 갑자기 신발로 아이 뺨을 거칠고 세게 때립니다. 그 아이는 난데없이 맞았는데도 곧바로 서서 다시 긴장합니다. 숨이 멎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옆의 엄마와 여동생은 놀라지도 않습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어 온 거죠. 아버지가 가라고 하니까 그 아이는 다시 돌아가서 여느 아이들처럼 또 놉니다. 그러면서 가끔 아버지 눈치를 살핍니다. 자기의 목숨이 달려있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언제 어떻게 맞을지 모른다는 것처럼 두려운 공포가 있을까요? 모르는 그 남자의 행동에 무척 화가 났습니다. 일본말을 알았다면 가서 말이라도 걸고 싶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슬프게도 주은씨가 떠올랐어요. 그 아이처럼 잠시 얼었다가 다시 아이다운 모습으로 돌아오는.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는 아이 말이에요. 아기를 키우다 보면 내 어린 시절과 친정어머니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주은씨는 맑은 아기 얼굴을 보다가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맞았다는 억울함이 쌓여서, 방치당하고 버림받았다는 서러움이 떠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죠. 상처 받은 내면 아이가 울부짖습니다. “엄마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 때 나는 아이였잖아. 당신이 엄마 맞아?”하고 말입니다. 방임과 학대는 아이에게 치명적입니다.


주은씨 어머니는 책 ‘당신은 어떤 어머니입니까’에 나온 자기도취형 어머니에 가까웠습니다. 미리 준비된 자녀의 모습과 모든 수단의 동원이 특징입니다. 이런 어머니의 자녀들은 나만의 세계를 찾아서 떠납니다. 독서, 영화, 일에 잘 몰입하며 관계를 피하려 합니다. 불안한 탈출인 결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들이라면 어머니와 비슷한 여성과 결혼하거나 딸이라면 어머니와 다르게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습니다. 진로나 배우자 결정하는 중요한 선택에 어머니의 입김이 작용하기 때문에 자녀들은 행복한 척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직장생활을 유지하거나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몰라 방황할 수 있습니다.


자기도취형 어머니들은 자기의 욕구를 먼저 챙기는 편입니다. 자녀보다 먼저 먹고 자고 쉴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관심이 많고 타인에 대한 관심은 제한적입니다. 이 의미는 타인을 진심으로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할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물론 이 분들은 유년기에 자기애 발달과정에서 큰 상처를 받은 분들입니다. 자기가 소중하다는 느낌을 확실히 체험하지 못 해 내가 만든 부풀려진 허상, 외부의 대상에 의존해 자기가 소중하다는 느낌을 확인 받으려 합니다. 그러니 외모, 외적인 조건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명품, 명문대처럼 자기 수준에 맞는 것을 취해야 한다고 느낍니다. 자기도취와 타인의 찬사에 익숙합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은 일일이 신경 쓰거나 인정받기 위한 행동을 종종 합니다. 속은 공허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자녀에게도 비슷한 반응입니다. 자신의 대리물로 자녀에게 예쁜 옷을 입히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자신의 과시 욕구를 충족시켜줬으면 하고 바랍니다.


나는 어머니의 감정적인 학대와 방치에도 주은씨가 어떻게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답은 독서였어요. 고등학생 때인가 어머니가 사주신 책 한 권 있었어요. 자기계발서였는데 그걸 여러 번 읽고 내가 이 책에 나온 대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어머니께서 그 책을 사준 의도를 떠올려 보자 했죠. 어머니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주셨겠지만 책 내용과 의미에서 좋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세월, 책을 지침 삼아 실천했어요. 어머니가 줄 수 없었던 가르침을 책으로 대신 한 게 아닐까요?


두 번째 답은 제가 찾았어요. 주은씨가 이렇게 잘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운동의 힘도 있었어요. 오소희 작가의 블로그에서 ‘나만의 행복 레시피’ 중 운동을 첫 번째로 꼽았고 ‘엄마의 주례사’ 김재용 작가도 삶을 운동하기 전의 삶과 운동한 후의 삶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신체와 정신은 연결되어 있어 어느 한 쪽을 먼저 움직이고 변화를 주면 자연스레 다른 것도 함께 가려 하거든요.


마지막 세 번째 답은 자기표현이었습니다. 주은씨는 자기 뜻을 확실하게 말하는 편이었죠. 자기를 성추행하려는 직장 상사에게도 은근한 협박과 분명한 거부로 도망가게 만들었고요. 자기는 아기한테 TV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웃집 엄마의 말에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육아를 도와줄 사람이 없고 남편도 늦게 들어오기 때문에 잠깐 이유식을 만든다든가 씻어야 할 때는 보여줄 때가 있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르고 혼자 육아하려면 어려움이 많다는 걸 차분히 말해주었지요. 독서, 운동, 자기주장이 잘 되었기 때문에 주은씨는 다른 내담자들보다 심리적인 근육이 강하다고 느껴졌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마주하면 참 힘들었죠?
상담 초반에 상담시간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유모차를 끌고 걸어가다 이유 모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고 했죠? 또 상담이 몇 회기 지나서 상담시간이 끝날 즈음에 말했어요. “나 참 잘 컸어!” 라고 길에서 외치고 싶다고 했죠? 스스로에 대한 기특함과 대견함이 차올랐어요. 모르는 사람들이 있어도 상관없다고요. 지금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아요. 상담실에서 대한독립만세 삼창하듯, 우리 둘이 함께 주은씨 “참 잘 컸어!”라고 외치면 좋았겠어요.


상담자인 저도 주은씨를 칭찬했지만, 스스로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살아있는 것 자체가 대단한 사람들이 있거든요.

내가 친정어머니에게 속상해질 때 묵묵히 안아주는 남편, 소중한 아기가 있어 행복한 걸 잊지 않으면 해요.

지금까지의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다가 아니라, 살면서 조금씩 더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아기 세 살까지가 엄마는 제일 예민하고 지쳐있는 시기이니까요. 엄마는 딱 아이가 커가는 시절만큼만 이해하는 듯해요.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야 엄마를 알게 되는 거죠. 노경실 작가의 에세이 ‘사는데 꼭 필요한 만큼의 힘’에 이런 내용이 있어요. ‘십육 년 전 엄마는 저 두 아주머니와 비슷한 연세였다. 아, 그때 나는 왜 단 한 번도 엄마에게 묻지 않았을까? 얼마나 아픈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병원에 같이 가자는 말도, 혼자 아파하지 말라는 위로도 왜 하지 못했을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우리는 어머니 나이가 되어봐야 몸으로 비슷한 걸 겪으며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머니 나이가 되기 이전에는 상담을 통해 부모님에 대한 원망감을 이야기로 자주 풀어놓으면 어느 순간 딱 멈춰질 때가 있어요. 부모님의 단점, 부족했던 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나에게 사랑과 좋은 것을 주었던 추억이 떠오르거든요. 주은씨가 아기를 키우는 게 힘들다 보니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잠시 더 커졌을 거예요. 그래도 다행인 건 남편과의 관계가 좋은 편이라는 거예요. 둘이 알콩달콩 사랑하며 싸우는 모습이 역시 신혼이구나 싶었답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하고 싶어요.


“주은씨는 충분히 좋은 엄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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