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책 ‘놀이의 언어(정혜자, 교양인 출판사, 2018)’를 참고하여 쓴 글입니다.
대학원 때 ‘놀이치료’ 수업을 들었는데요.
정혜자 선생님께서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쳐주셨는데 몇 년 뒤 제가 아이를 키울 때는 완전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출산시 저희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세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은 급속분만이었어요. 힘을 준지 세 번만에 아기가 나오려 했거든요. 분만실에는 간호 수련생만 있고 의사가 아직 도착하질 않은 급박한 상황이었어요. 간호사가 호출하고 의사는 가운을 입자마자 제 아기를 그야말로 정신없이 받았다고 합니다. 아기가 엄마와 만나려는데 간호사가 손으로 그 길을 막고 있으니 얼마나 무섭고 답답했겠어요. 저는 저대로 힘을 주지 않으려 애쓰고요. 길게 느껴졌던 그 시간이 나중에 남편에게 들으니 단 몇 분 정도였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아이가 26개월쯤이던가요.
장난감 중 러닝홈이라는 당시 국민문짝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아기 인형 머리를 문에 끼워 넣더니 가만히 있는 거예요. 처음에는 그냥 저기서 인형놀이하나보다 하고 지나쳤어요. 아이가 같은 행동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야 자기 출산 상황을 재현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정혜자 선생님의 놀이치료 수업이 떠올랐고 모든 아이들은 자신의 임신, 출산시 트라우마를 반복적인 놀이로 치유한다는 내용이 기억났어요. 다른 놀이치료 선생님께 여쭤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습니다. 엄마가 보여주는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도 눈빛이나 반응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들었고요. 아기가 느꼈을 놀라고 답답하고 충격적인 상황을 담담하게 느끼려 했고요. 어떤 때는 “아기가 어땠을까?”, “우리 아기한테 어떻게 해줄까?” 하고 물어봤어요.
아이는 출산 당시처럼 얼어있고 두려운 것처럼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아기 인형을 천천히 꺼내줘 안아 어르고 달래고요. 우리 아기 얼마나 무서웠을까 하고 말합니다. 아이는 그 장면을 여러 번 연출하더니 나중에는 다른 놀이로 전환하더라고요.
신생아 시기 실수로 분유 뜨겁게 타서 혀가 데였는지 그 이후 몇 년까지도 우유가 조금만 뜨거워도 짜증내거나 울음으로 표현했고요. 출산시 아이가 겪었던 어려움 때문에 옷이 머리에 걸리거나 샴푸캡도 끼우면 거부했어요. 트라우마는 몸이 기억하기에 자동적인 반응을 일으킵니다. 이런 건 어떤 아이들이든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나름대로 표현, 치유하려는 시도가 많거든요.
정혜자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이 발달하는 데는 다음의 12단계를 거친다고 하셨습니다. 놀이치료 과정도 이와 비슷한데요. 과연 우리 아이는 단계별 성장 과정에서 어느 단계에 있을까요? 거의 모든 아이들이 순차적으로 발달하고요. 발달에는 직진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진과 퇴행을 반복한다고 봅니다. 특히 신체, 심리적인 상처가 있었던 단계에 머물러서 성장 작업을 하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놀이 언어로 살펴보는 단계별 성장 과정
- 우주적 존재에서 성 정체감 형성까지
1. 우주적 존재일 때를 암시하는 놀이(놀이의 언어 46~54p.)
놀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이 동격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꿈 내용이나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일상의 합리적 논리를 벗어나 있어요. 우주 존재로 머무는 시기는 무질서한 혼돈의 세계입니다. 우주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만물은 모두 평등하고 이 시기의 사물들은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이 시기의 만들은 시기, 질투,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이 풍부합니다. 문화인류학에서 도덕, 관습은 무시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신화 속 인물, 동물 같은 존재를 떠올려보세요.
이 시기에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빈도가 높은 놀잇감은 고생대의 공룡, 파충류, 초능력이 있어 어떤 전투에서라도 목숨을 잃는 일 없이 승리로 결말을 이끄는 로봇, 배트맨, 스파이더맨 같은 가공의 인물 캐릭터가 많은 관심을 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잇감은 공룡, 로봇이 대표적입니다.
2. 개별적인 자기로 분화하는 것을 암시하는 놀이(놀이의 언어 54~58p.)
1단계에서 평등한 존재로 어지럽게 생존 경쟁을 벌이다가 군계일학처럼 천하를 평정하는 권위적이고 영웅적인 존재가 등장합니다. 우주 존재에서 개별적인 나로 분화된 존재로 변합니다. 어린이들의 놀이에 많이 등장하는 이상적 자기상에 관한 예는 석가나 예수 같은 성인, 헤라클레스나 주몽 같은 전설적 영웅, 애국적 인물, 상상의 동물이 주인공으로 활약합니다. 이처럼 자기를 비유하기에 적합한 구체적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꽃 중의 꽃이나 별 중의 별이라고 자기를 강조하게 됩니다. 실제로 아이들은 자기를 꽃이나 별로 강조하여 그림을 그립니다. 어떤 그림이나 놀이든 주인공이 나타나게 돼요.
3. 엄마의 자궁에 들어갈 것을 예고하는 놀이(놀이의 언어 58~60p.)
개별적으로 분화된 이상적 자기는 아직 정신만 갖춰진 상태이므로 정신과 신체를 결합한 온전한 존재로 나아가려는 놀이 분위기가 이어져야 합니다. 음양이 결합하여 잉태 공간으로 들어가는 조짐을 놀이로 표현하는 예는 아주 많은데요. 상징의 예로 산타할아버지에게 거룩한 선물을 받는 이야기, 영웅으로 태어나는 탄생 신화 등입니다. 이 때 저희 아이는 보석함을 갖고 싶어 했고요. 보석함 속 보석이 마치 자궁 안의 자기처럼 느껴졌던 걸로 보입니다. 잉태하는 것 자체가 마술 같은 신비한 느낌을 주어 마술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4. 음양의 결합을 암시하는 놀이(놀이의 언어 60~65p.)
음양의 결합은 상호 대립이나 갈등 구조의 합일이 아닌 태극무늬의 음양처럼 동등한 가치의 상반된 두 가지 속성의 합일이며 온전한 하나로 구성되기 위한 조화와 균형의 합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실제 태극의 빨강색, 파랑색을 넣어 칠해보는 것도 이 시기의 미술놀이가 됩니다.
대표적인 놀이로는 골프, 농구, 축구 같은 공놀이처럼 공이 좁은 구멍에 들어가거나 과녁을 겨냥하는 활이나 총 쏘기, 다트 놀이, 전통 투호나 고리 던지기가 있어요.
5. 잉태되었음을 알리는 놀이(놀이의 언어 65~72p.)
놀이치료에서 어린이들이 자기의 지난 시절 성장 과정을 반추하는 작업은 물론이고 자기를 새롭게 탄생시키기 위한 창조적 잉태 작업 모두가 거의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가치 있는 동식물이나 고귀한 보물을 상징으로 삼아 자신의 실존을 알리고 혼자만의 은밀한 공간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자랑삼아 알립니다.
색채를 이용하여 잉태를 알릴 때는 음양을 상징하는 빨강, 파랑의 조합인 보라색을 많이 선호합니다. 엄마 배 속의 태아인 자기를 비유하는 모양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바다에 떠 있는 배나 생물, 화분에 심겨진 꽃, 정원의 큰 나무, 연못의 연꽃 등입니다.
저희 아이는 항문기에 변기 안에 자신의 대변을 저에게 자꾸 보라고 했습니다. 이럴 때는 양수에 떠 있는 자신의 잉태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낚시, 전화 놀이도 낚시줄과 전화선이 탯줄로 이어져 자신과 엄마의 교감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저도 유아기에 수없이 전화기를 만들어 이야기했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6. 배아의 시기를 암시하는 놀이
놀이에서 유전자의 결합에 성공하여 배아의 과정을 거칠 때에는 마치 유전자의 결합을 연상시키듯 실이나 끈, 점토로 꽈배기처럼 꼬인 모양을 만드는 놀이들이 등장합니다.
이 시기에 가장 잘 연상되는 것은 비눗방울인데, 여러 거품이 관 끝에 함께 뭉쳐 매달려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듯 만들고 놀면 마치 이 시기의 세포 분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이 비눗방울을 불어 만드는 놀이를 즐겨하는 것도 이런 이유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7. 착상 과정을 표현하는 놀이
자궁벽의 안정된 장소에 뿌리를 내려 임신 기간 전반에 걸친 안전을 담보할 기반을 다져야할 시기입니다. 모래를 파거나 모래 안에 씨앗, 돌, 인형, 등 자기를 상징할만한 무언가를 자꾸 묻으려 한다면 이 시기의 상징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8. 태아의 성장을 암시하는 놀이
자궁에서의 경험을 재건하는 시기입니다. 놀이와 일상에서 치료자, 자신, 그리고 엄마와 자신이 일심동체라는 느낌을 자주 표현합니다. 제 아이는 “엄마는 무슨 색깔 좋아해? 나는 분홍 좋아해.” 물어봤었어요. 제가 눈치 없이 “노란색”이라고 하면 아이는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아차! 싶어 정정했어요. “엄마도 분홍색 좋아해.”라고요. 이 시기에는 마치 자기가 엄마 뱃속에 있어 한 몸이었던 것처럼 많은 걸 엄마와 공유하고 싶어 합니다. 엄마랑 똑같은 걸 먹고 비슷한 옷차림을 하는 거죠. “엄마 뭐 입을 거야?, 이거 입으면 좋겠어.” 표현합니다. 아이가 요구하는 것이 무리되지 않는다면 엄마도 함께 하면 좋겠지요. 이 시기의 대표적인 놀이는 텐트 놀이입니다. ‘자궁’을 연상할 만한 텐트나 인형 집, 택배상자 안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꾸며놓고 그 안에서 머무르거나 엄마를 그 안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9. 출산을 암시하는 시기의 놀이
자궁을 벗어나 세계에 첫걸음을 내딛는 중요한 경험입니다. 저희 아이도 출산 상황을 재현하는 놀이를 무수히 반복했는데요. 서두에 밝혔듯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 길이 막혔기 때문에 아기가 느끼는 공포감은 상당했던 것 같았습니다. 우연히 시작하게 된 놀이였는데 제가 마치 출산하듯 두 다리를 벽에 올려놓고 다리 위에 아이의 애착이불을 덮어 밖에서는 볼 수 없게 동굴처럼 만들어 놓아요. 그러면 아이가 그 안에 있다 낑낑거리며 기어 이불 밖으로 나옵니다. 저한테 바로 안길 때도 있고 나오면서 우는 척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 놀이가 아이가 겪은 출산 경험을 드러내는 거라고 여기고 아이가 나오는 장면에서 기쁘게 환영하거나 아기처럼 칭얼댈 때는 달래주었습니다. 한여름엔 솜이불에 땀이 나고 더워 그 놀이를 반복하느라 하기 싫기도 했지만 아이가 원 없이 재현해야 더 이상 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제 상황은 하나의 가벼운 예시지만요.
출산 상황이 위험했고 아기가 트라우마를 겪었다면 그것을 치유하기 위한 과정과 놀이가 아주 치열하게 여러 번 나옵니다. 출산을 암시하는 놀이 언어 중 가장 떠올리기 쉬운 것은 풍선을 빵빵하게 불어 터뜨리는 놀이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어미 닭이 밖에서 쪼고 병아리가 안에서 쪼며 서로 도와야 일이 순조롭게 완성됨을 의미. 즉, 생명이라는 가치는 내부적 역량과 외부적 환경이 적절히 조화돼 창조되는 것을 말함)라는 말을 음미해보면 이해가 쉬울 거예요. 양수가 터지는 것은 ‘아기야, 이제 밖으로 나오렴.’하는 신호입니다. 유아들이 어른에게 풍선을 가능한 크게 불어달라고 요구하고 애써 불어준 풍선이 갑자기 터지면 좋아하는 반응이 이와 관련됩니다.
10. 엄마와 심리적 애착을 이루는 시기의 놀이
신생아 시절 캥거루처럼 엄마 품에 밀착하여 애착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시기에 두드러진 놀이는 아기를 돌보는 놀이입니다. 유아들은 아기 인형을 정말 자기인양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아플 때 돌봐줍니다. 일상생활에서 애착관계를 더 단단하게 맺을 때 퇴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보입니다. 아기 때의 말투나 행동, 젖꼭지나 우유병, 동생이 있는 경우 동생의 놀잇감과 분유 등 아기용품에 관심이 있습니다. 엄마가 자기를 돌보았던 방식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아 제가 깜짝 놀랐어요. 분명 아기 때였는데도 몸으로 기억하며, 양육은 정말 대물림될 수밖에 없구나 싶었습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더 떼쓰거나 요구하는 게 많아지고 갑자기 식탐이 늘어나거나 동생에 대한 질투가 표현될 수 있어요. 저와 아이의 경우는 안정적으로 애착을 맺기 위해서 피부접촉(스킨십)을 늘리는 것이 좋았습니다. 함께 목욕, 아이 신체 마사지하거나 로션 발라주기, 같이 음식 만들기, 안거나 포대기로 엎어주기, 모래 놀이, 물놀이가 친밀감을 촉진시키는 듯합니다.
11. 이기심의 출현을 암시하는 시기의 놀이
애착 맺은 후 아기는 엄마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도 혼자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경험함으로써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진다. 이 시기의 자기 인식을 자기중심적 특징이 있습니다. 고집, 반항이 늘고 점토 놀이를 자주 합니다. 아이들은 유치원에서 자주 하는 손도장, 발도장 찍기나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처음 남기는 것처럼 자기 흔적을 남기는 걸 좋아합니다. 특히 자기애가 발달하는 때라 뭐든 다 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건강한 자기를 발달시키기 위해 두 가지를 이루면 좋을 텐데요. 하나는 아이의 과대한 자기감각과 과시하고 싶은 욕구에 공감하는 것이고요. 다른 하나는 부모를 이상화하는 아이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아이가 만들거나 성취한 것에 관심과 칭찬이 필요합니다. 엄마는 우주 최고의 요리사, 아빠는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힘센 남자라고 치켜세울 때 유연하게 그렇지? 하고 호응해주는 게 아이의 자기를 더 발달시키게 됩니다.
12. 성 정체감이 형성되는 시기의 놀이
어린이들은 엄마와의 애착이 잘 맺어지면 아빠에게도 관심을 기울입니다. 성별 차이와 자신의 성별에 대한 인식이 싹틉니다. 자주 등장하는 게 역할 놀이입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흔히 했던 엄마, 아빠 놀이예요. 여아는 아기를 돌보고 살림하는 역할, 남아는 직장에 나가서 일하거나 싸움이나 전쟁 놀이를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