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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시 한 편이 주는 치유의 힘

오늘 밤, 시 한 잔 어떠세요?

by 투명서재

대학교 집단상담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였어요.

상담 선생님께서 무인도에 혼자 간다면, 뭘 가져갈 거냐는 질문을 하셨어요.

다른 집단원들은 생존에 필요한 라이터, 맥가이버 칼 등을 이야기하는데 저만 생뚱맞게 책을 말했어요. 다들 뜨악한 표정이었죠. 그만큼 저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그 이유 때문에 학부 전공을 문헌정보학으로 선택했고 4학년 때 ‘독서치료’라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잠깐 배웠던 독서치료 이론은 머리에 남아 있지 않고요. 다만 요즘 책을 읽으면서 치유가 되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설이나 에세이는 독자인 ‘나’를 대입해서 감정이입이 되어 정화(카타르시스) 경험이 되고요. 다양한 측면, 여러 입장에서 바라보는 주인공과 주변 인물에 대한 시각이 사회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책을 읽으면서 해결하고 싶은 고민에 대한 팁을 얻고 실제로 행동하지 않아도 어떤 갈래의 길로 가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상하게 해 줍니다. 만병통치약은 아니어도 각 사례, 상황에 맞는 민간 처방전 같습니다.


독서가 주는 치유의 힘에 대해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 ‘담백하게 산다는 것’을 쓴 정신과 의사 양창순 선생님은 독서나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만이 겪는 문제가 아니라는 공감의 메시지라고 합니다. 상담은 언어로 자기를 표현하고, 독서는 언어로 정리된 글을 보면서 자기를 돌아보는 과정이라는 면에서 닮아 있다고요. ‘관계를 읽는 시간’을 쓴 정신과 의사 문요한 선생님은 독서도 치료가 된다는 측면에서 상담과 독서의 비슷한 점을 세 가지로 정리했어요. 첫째, 공감 - 상담을 받는 사람에게 안전함을 제공하기 때문에 필요한 요소, 둘째, 상처나 문제를 재경험하는 것 - 공감을 받고 안전감을 느끼면 해결되지 못한 채 마음속에 쑤셔놓은 마음의 상처나 문제를 다시 꺼내서 펼쳐낼 수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새로운 관점과 통합 - 안전한 환경에서 상처나 문제를 다시 경험하고 나면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고 삶의 한 부분으로 통합할 수 있게 된다는 거예요(채널예스 20019. 1월호).


제가 정말 ‘치유’된다고 느꼈던 것은 ‘시’를 통해서입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와 책이 많습니다. 학생들에 대한 집단 무의식적인 죄책감, 우리 안에 원래 있었던 상처에 대한 자극, 국가와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뒤섞여 감정이 참 복잡했는데요.

아래의 세월호 희생 학생 예은이에 대한 시를 읽었을 때 미안함에서 좀 더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빠 미안

2킬로그램 조금 넘게, 너무 조그맣게 태어나서 미안

스무살도 못 되게, 너무 조금 곁에 머물러서 미안


엄마 미안

밤에 학원 갈 때 핸드폰 충전 안 해놓고 걱정시켜 미안

이번에 배에서 돌아올 때도 일주일이나 연락 못해서 미안


할머니, 지나간 세월의 눈물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해서 미안

할머니랑 함께 부침개를 부치며

나의 삶이 노릇노릇 따듯하고 부드럽게 익어가는 걸 보여주지 못해서 미안


아빠 엄마 미안

아빠의 지친 머리 위로 비가 눈물처럼 내리게 해서 미안

아빠, 자꾸만 바람이 서글픈 속삭임으로 불게 해서 미안

엄마, 가을의 모든 빛깔이 다 어울리는 엄마에게 검은 셔츠를 계속 입게 해서 미안


엄마, 여기에도 아빠의 넓은 등처럼 나를 업어주는 포근한 구름이 있어

여기에도 친구들이 달아준 리본처럼 구름 사이에서 햇빛이 따듯하게 펄럭이고

여기에도 똑같이 주홍 해가 저물어

엄마 아빠 기억의 두 기둥 사이에 매달아놓은 해먹이 있어

그 해먹에 누워 또 한숨을 자고 나면

여전히 나는 볼이 통통하고 얌전한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아이

제일 큰 슬픔의 대가족들 사이에서도 힘을 내는 씩씩한 엄마 아빠의 아이


(중략)


엄마 아빠, 그날 이후에도 더 많이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아프게 사랑해줘 고마워

엄마 아빠, 나를 위해 걷고, 나를 위해 굶고, 나를 위해 외치고 싸우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한 엄마 아빠로 살려는 두 사람의 아이 예은이야

나는 그날 이후에도 영원히 사랑받는 아이, 우리 모두의 예은이

오늘은 나의 생일이야


예은이가 불러주고 진은영 시인이 받아 적다.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203~209p.




세월호 희생자 학생들 생일에 시를 지어 읊어주셨던 시인들이 있었습니다. 책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에서 진은영 시인은 마치 세월호 학생이 실제로 가족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를 썼습니다. 저는 그 시를 읽으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 한 편으로 부모님의 상실감을 모두 채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큐 영화 ‘영매’에서처럼 산 자와 죽은 자를 잠깐 만나게 해주는 것 같은 인상이었어요. 아, ‘시’가 주는 힘이 이렇게 크구나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건 시 치료 시간이었을 거예요. 여러분은 시 치료를 들어보셨나요?

시 치료는 독서치료의 한 분야로 치료자와 내담자의 치료적 관계에서 시를 매개로 상호작용하여 치료적 효과를 내는 방법입니다(상담학 사전).

정신과 의사 정혜신 선생님은 심리치유 기업 ‘마인드프리즘’에서 내마음보고서를 유료로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보고서 마지막에 나를 위한 선물, 심리 처방전이 나옵니다. 심리특성을 바탕으로 선택된 ‘나의 처방詩’가 제시되어요. 그 시가 스스로에 대해 좀 더 깊게 사색하는 기회를 줄 거예요.


어떤 시의 단어 하나하나가 물수제비처럼 내 마음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어느 시는 내 역사의 우물 안에 길어 올린 추억과 상념이 바가지 안에 담기게 합니다.

이처럼 시는 단박에 나의 가슴을 후벼 파서는 일상에서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철학하게 만들어요. 묻지 않았던 질문을 하게 되고, 그냥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낯설게 보게 만듭니다. 박웅현 작가의 ‘여덟 단어’ <견>이라는 챕터에 나온 것처럼 안도현의 시 ‘스며드는 것’은 일상에서 보는 꽃게를 특별히 다르게 보기를 권유합니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 한 편이 주는 치유의 힘, 느껴보시면 어떨까요?

자, 오늘 밤엔 시 한 잔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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