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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명서재 Aug 26. 2019

삶을 견디는 당신에게. - 자살의 의미

'죽고 싶다'는 말 속에 담긴 여러 뜻

권여선의 소설 <레몬> 서문에서 '당신의 삶이 평하기를' 읽고 새벽에 펑펑 울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두려움과 불안을 친구 삼아 걸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언젠가는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구절이었다.

그 당시 나의 평안하지 않음과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평온할 수 없는 상황이 뒤섞였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희노애락 생노병사가 있는 유한한 존재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림책 사노 요코의 <태어난 아이>처럼 모기에 물려 가렵고 강아지에게 물린 자리가 아픈, 

느낄 수밖에 없는 생의 감각이  다가왔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도 중학교 시절 죽고 싶다기 보다 대체 왜 살고 있는 거지 의문이 든 적 있었다. 

태어났으니 사는 거라고 과외 선생님이 답해주셨다. 

나는 뭐 때문에 이 생에 던져져 이렇게 괴로울까 싶었다. 

그 말로는 답이 되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태어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었다. 

'죽고 싶다'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첫번째, 더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이렇게'에 방점이 찍힌다.

'이렇게'가 '어떻게'인지는 개인마다 다르다. 

보통 '이렇게까지' 애쓰고 싶지 않다는 기분인 것이다. 

삶의 막다른 굽이굽이 골목길을 돌다 

'여기도 막혔어, 저기도 막혔네.' 좌절의 좌절을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더하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끝을 생각하게 한다. 

지쳐있으니 쉬고 싶다는 것이 당연하다.

영원한 평안, 안식처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레 든다. 

이런 분들에게 죽음은 쉼이다.

두번째는 '재생(再生)'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뜻.

내 내담자 중에는 BTS의 팬클럽 이름인 아미 중 한 사람이 있다. 

그는 BTS로 다시 태어나고 싶단다. 

자기가 보기에 BTS 멤버들이야말로 자존감이 제일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자존감이 낮아 키우고 싶은데 지금 생에서는 그게 어렵다고 느끼니 

삶을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은 것이다. 

reset 버튼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누르겠다.

이번 생은 망했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도 자살은 매혹적이다. 

다르게 살고 싶지만 어떻게 다르게 살지에 대해 잘 모르겠고 막막하기 때문이다. 

왠지 지금처럼 살면 안 되겠다.

여태까지 방법으로는 힘들었다는 것을 아니 처음부터 다시 다르게 살고 싶다.

세번째는 내가 분노한다는 뜻이다. 

저주나 한을 품고 죽고 싶은 것이다. 

내가 죽음으로도 내가 화난 게 다 표현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이런 사람들의 공통된 이야기다. 

울화가 치밀어 그 감정들이 맺혀 내 몸보다 더 커졌을 때 말이다. 

그것들이 해소되지 않았을 때는 내 몸 안에 혹, 종양, 담석 같은 걸 남긴다. 

그 불덩이들이 커져 매 몸을 다 집어삼킬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이다.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에 억울함, 여자친구의 배신을 겪었다고 가정하자.

직장 상사, 동료, 여자친구에게 내 몸을 희생함으로써 

복수하고 싶고 상처 주고 후회를 새기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 목적을 위해 나라는 소중한 제물을 바치는 것이다. 

네번째는 삶의 목적 상실이다.

고등학교 3학년 교실을 떠올려보자.

조용히 자신의 공부만 하고 있는 여러 학생들 사이에 혼자 폰을 보고 있는 학생 

다른 친구들은 다 앞만 보며 달려 가는데 나만 뒤를 향해 거꾸로 가는 느낌이다.

드라마 <미생>에서 남자 주인공이 모두 출근하느라 정장을 차려 입고 

역으로 향해 걸어가는 장면에서 그만 평상복에 축 쳐져 혼자 걸어가는 형국이다. 

나는 뭘 좋아하지? 나는 아무것도 잘하는 게 없는데.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구나. 

나라는 사람은 가치도, 쓸모도, 어떤 소용도 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든다. 

내 삶의 의미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나를 소중하게 느끼고 대하는 사람은 주위에 없다. 

부정적인 정서경험보다 긍정적 정서경험이 훨씬 커져버린다. 

긍정적인 자극도 왜곡해 내 몸으로 들어올 때는 부정적인 정보로 들어온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물질, 이득, 효용, 필요가 없는 것들은 금새 사라진다. 

이 분들에게는 사람도 물건처럼 쓸모가 없으면 버려져야지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른 사람이 날 볼 때 사회의 기준과 가치에 부합하는 인간만 살아남는 듯하다. 

20, 30대 청춘들의 이번 생은 망했어요 라는 자조섞인 말들이 그들의 무력감을 반영한다. 

독거노인의 자살, 20대 무직 청년들의 자살을 예로 들 수 있다. 

무언가 할 일, 성취감을 느낄만한 활동, 삶을 기쁘게 하는 봉사,

사람들과 함께하는 생동감,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그 자체로 재밌는 취미

이런 것들이 없어지면 자연히 나는 왜 살아야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섯번째는 관심이 필요해서다.

이런 경우 자해, 자살시도 자체가 누군가 나를 봐주면 좋겠어요. 

아기처럼 돌봐주길 바래요. 하는 뜻이다. 

이런 경우는 그러한 애정욕구가 충족되면 실제 죽지 않을 수 있다. 

여러번 신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실행하게 된다.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하거나 누구도 응답하지 않는다면.

가수 종현의 노래 <한숨>은 들을 때마다 아프다. 

(그가 관심이 필요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매우 안타까운 것은 아름다운 가사를 본인이 직접 썼고 

가사 속 한 사람을 바랐는데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를 아무 말 없이 안아주고 한숨을 들어주고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위로해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는 것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살 수 있다. 

그러니 죽고 싶은, 혹은 죽을 것 같은 사람 곁에 있다면

죽고 싶다는 말 속의 숨은 뜻을 헤아리길 바란다.

꼭 무언가를 할, 해줄 필요는 없다. 

그 심정을 알아주는 것

아, 네가 그럴만 하겠다.

네가 그런 느낌이 드는 건 자연스럽구나.

그런 생각까지 한다는 건 지쳤다는 거야.

라고 말 한마디해줄 수 있다면 

하루라도 더 살아갈 힘을 얻지 않을까.

반드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이런 사람들에게 침묵이 더 편안할 수 있다. 

울 수 있게 한 쪽 어깨를 빌려주는 것,

울음이 나올 수 있게 고요히 기다려주는 것

작은 배려가 우울에서 빠져나오는 동아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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