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는 물론,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을 담은 키즈 컨텐츠를 찾고 있다면
통신사에서 운영하는 IPTV를 해지하던 날이 생각난다. "해지할까 말까"를 고민하던 건 꽤 됐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해지까지 하기엔' 귀찮기도 해서 유지하기를 택하곤 했었다. 하지만 2년 전인 2018년 가을, 나는 결국 해지를 택했다. 넷플릭스를 구독한지 2년 반만의 일이었다.
글쎄 그러니까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TV를 보는 일이 점점 피곤해지기 시작했었다.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지목되어 수사를 받았던 이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새로운 드라마의 주인공을 맡고(하우스 오브 카드의 케빈 스페이시에 대한 아동 성추행 혐의가 제기되자 다음 시즌이 케빈 스페이시 없이 제작된 것을 떠올려보자.), 여전히 TV에 나오는 여성들의 수는 턱없이 모자랐고 (<라디오 스타>는 2020년이 되어서야 안영미가 합류했다.) 여성들은 여전히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곤 했다.(<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 캐릭터는 뭔가 굉장히 다른 여성 캐릭터인 듯 보였지만 극의 결말에 가서는 결국 애기씨로만 남았다.)
TV를 틀면 여전히 그런 화면이 반복되고 있을 때, 넷플릭스에선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제시카 존스>, <그레이스 앤 프랭키>, <언브레이커블 키미슈미트>, <원데이 앳 어 타임>, <굿 플레이스>, <러시아 인형처럼>, <섹스 에듀케이션>, 그리고 마침내 <래치드>와 <퀸스 갬빗>까지. 아주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이야기가 거기에 있었다. 단순히 극의 여자 주인공인 것을 넘어서 그들은 그 이야기를 지배하는 내레이터들이었다. 여성 범죄자, 여성 히어로, 여성 노년의 이야기 속에서는 여성들간의 연대 그리고 대립이 진지하게 극을 이끌어나갔다. 싱글맘이자 간호사로 일하고 있는 이민자 여성이 중심이 되는 가족극, 남자들의 것으로 여겨져온 체스라는 세계를 제패한 여성의 성공스토리는 케케묵은 장르들이 얼마나 새로워질 수 있는지 보여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재미있었다! 이게 가장 중요한 포인트 아닐까. 그간 재미를 위해, 장르적 컨벤션이라는 이유로 지속되었던 낡은 표현이나 묘사,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캐릭터들 없이도 이 시리즈들은 충분히 재미있었고 매력적이었다. 헤나 개즈비의 스탠딩 쇼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다큐멘터리는 또 어땠나. 그것은 정말이지 내가 몇 년 새 TV라는 매체를 통해 본 모든 영상 컨텐츠를 통틀어 가장 감격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냈었고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와 <하프 오브 잇>은 새로운 시대의 로맨틱 코미디 원전으로 삼을만한 작품들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위한 컨텐츠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에게 보여줄만한 영상 컨텐츠를 찾는 일은 오히려 더 쉽지 않았다.
아이들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뽀로로>에서는 모두 재밌게 놀기 바쁜 와중에도 '루피'는 분홍색 앞치마를 차려입고 식사를 챙기기 바빴고 <로보카 폴리>, <고고 다이노> 등에서는 구색 맞추기 식으로 한 명씩 끼어있는 여자 캐릭터가 꼭 분홍색을 입고 리본을 단채로 등장했다. 여전히 돌봄에 해당하는 구급차나 힐러와 같은 역할을 맡는 등 성별에 따라 역할이나 능력이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실제로 최근 '정치하는 엄마들'이 EBS 유아동 애니메이션들을 분석한 결과를 보면 여전히 성비 불균형, 성별 고정관념 강화와 같은 문제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정치하는 엄마들 인스타그램(https://www.instagram.com/p/CInFvrMpoSB/?utm_source=ig_web_copy_lin)
물론 시대착오적인 관습에서 벗어난 좋은 컨텐츠들도 있었다. 하지만 접근성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 매번 괜찮은 컨텐츠가 방영하는 시간을 맞춰서 디즈니 쥬니어 채널을 보여주긴 어려웠고 그렇다고 모든 컨텐츠를 일단 DVD부터 살 수는 없었다. 유튜브에는 대체로 모든 영상이 다 올라와있는 경우는 잘 없고 있다해도 정리된 플레이리스트를 찾는 건 꽤 품이 드는 일이다. 그러던 차에 올해 넷플릭스 키즈에 아주 다양한 컨텐츠들이 업로드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의 프로필을 별도로 만들고 키즈 컨텐츠들을 하나씩 살펴보다보니, 넷플릭스 키즈는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컨텐츠와 같은 궤를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재밌으면서도 유익하고, 접근성마저 훌륭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키즈 컨텐츠를 소개해보고자 한다.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운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며 새로운 시대의 건강한 감수성을 담은 작품들이다.
언제부턴가 잘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을 향한 가장 큰 칭찬이 '어른들도 재밌게 볼 수 있는', '(다른 애니메이션처럼) 유치하지 않은'이 된 것 같다. 물론 <힐다> 역시 SNS나 커뮤니티티에서 성인이 보기에도 충분히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평을 받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실제로 성인인 나도 아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시즌2를 얼마나 기다렸던지!)
하지만 힐다가 가진 미덕은 정반대다. 힐다는 기본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모험담이다. 이 프로그램의 분명한 '내포시청자'일 어린이들을 포기하거나 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판타지 장르인 특성상 낯선 존재들이 등장하고 그들은 처음에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 종족이 다른 힐다와 갈등을 빚기도 한다. 하지만 힐다는 그들을 그저 낯설고 이상하고 생소한 것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낯선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어린이들에게 미루지 않는다. 힐다는 이해가 안가는 구석들을 면밀히 살피고 또 대화를 시도하고 화합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용기있는 어린이다.
시즌1 1,2화는 특히 그런 점에서 아주 멋진 도입부다. 자기 인생의 거의 모든 시간에서, 대체로 작은 존재로 여겨져왔을 어린이인 힐다가 자기보다 더 작은 존재인 '숨겨진 이웃들'인 엘프들을 이해하게 되는 건 숲에서 가장 큰 존재인 예르겐 거인들을 만나면서다. 수천년의 기다림 끝에 서로 만나게 된 거인 둘이 애틋하게 손을 잡고 가면서 그들 스스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미처 모르고 힐다네 집을 밟아서 부서버렸듯이, 자기 자신과 엄마가 바로 엘프들에겐 그런 존재였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은 힐다는 이사를 가지 않겠다던 고집을 꺾고는 트롤버그로를 떠나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 전까지 엘프들이 힐다에게 했던 "너네집 불빛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눈이 부신 줄 알아!", "너희들 목소리는 너무 커서 소음공해야!!", "네가 우릴 막 밟고 다니잖아!!"같은 이야기들의 의미를 정말로 깨닫게 된 힐다의 표정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도 이 세상에 어떤 책임이 있고 이제 그걸 안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듯한 결연한 마음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힐다의 주변 캐릭터를 다루는 태도 역시 <힐다>의 장점이다. 늘 힐다와 함께하는 사슴여우 트위그를 그저 힐다의 '애완' 동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원가족을 찾아 떠나는 모험의 주인공으로 그리고 그 끝에 힐다를 떠날지 말지와 같은 중대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이 이야기는 어떤 존재 하나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또한, 힐다의 학교에는 참새 스카우트 친구들을 비롯해 다양한 인종과 배경을 가진 친구들이 등장한다.
그래픽 노블 <힐다의 모험>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이 애니메이션은 정말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작품이다.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때론 말이 통하지 않고 내가 억울한 누명을 쓰더라도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어떻게 해볼 수 있을지, 다양한 존재와 함께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마음은 무엇인지 말이다. 아마 <힐다>를 향해 '어른이 보기에도 괜찮은' 작품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클 것이다. 다 커버린 지금도 어려운 마음들을 일러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다. (시즌 1, 시즌 2 각각 13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에피소드당 25분 내외)
이 컨텐츠는 올해 최고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의 작가이자 독서교실을 통해 어린이들을 만나고 계신 김소영 선생님의 추천으로 알게된 것이다. 작년 9월에 첫 책을 낸 후, 팟캐스트 혼밥생활자의 책장에 초청을 받아 감사하게도 김소영 선생님과 내 책 이야기를 나누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는데 그 때 소개해주셨던 프로그램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렸을 적에도 만화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이 직접 등장하는 프로그램들이 꽤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에 와서는 국내 방송사에서 제작하는 이런 포맷의 프로그램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된 것 같다. 반면, 넷플릭스 오리지널 프로그램 중에는 <베스트 탐정단> 말고도 <후 워즈 쇼>, <오드 스쿼드> 등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어린이 프로그램이 꽤 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 네 명이 동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 드라마의 장르는 그러니까, 어린이 탐정물이다. 어른들이나 어린이들보다 나이가 조금 많은 어린이들 또 청소년들이 증인으로 또 조력자로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이끄는 이들은 분명히 이 네 명의 어린이 탐정이다. 내가 어린이라면 무척 기쁘고 흥미진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드라마는 어린이를 대접한다. 에즈라, 카일, 에바가 탐정단의 우당탕탕 매력을 책임지며 간간히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한 채로 모디의 추리 과정에 힌트를 제공하는 멤버라면 '모디'는 그야말로 내츄럴 본 탐정 캐릭터다. 처음 학교에 전학온 날부터 엄청난 관찰력과 추론력으로 에즈라를 사로잡은 모디는 이 탐정단에 접수된 문제부터 탐정단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까지 해결해나가는 새로운 시대의 여자 어린이 주인공이다.
극을 이끌어나가는 구성도 재미있다. 탐정단 멤버들이 나란히 앉아 사건이 일어난 혹은 사건이 접수된 순간으로 되돌아가 회고하는 플래쉬백 형식에 멤버들 각자의 코멘트가 붙는, 코멘터리 영상 같은 느낌인데 어린이들이 사건의 흐름과 의미를 최대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 요약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 다섯살인 바당이와 보기에는 조금 이른감이 있지만 차차 만화보다 '실사' 프로그램을 원하는 나이가 되면 가장 먼저 함께 보고싶은 작품이다. (시즌 1, 시즌 2 각각 1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에피소드 당 30분 내외)
성역할 고정관념이나 편견에서 자유로운 캐릭터가 등장하는 키즈 컨텐츠를 찾다보면 용감하고 진취적인 여자 어린이의 모험담이 가장 많은 편이다. 또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키즈 시리즈인 <스피릿>이나 <꼴찌마녀 밀드레드> 처럼 말이다. 이에 비해 다정하고 상냥하며 자기 마음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남자아이는 좀처럼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때로 더욱 귀하게 느껴지곤 하는데 <내 친구 청소차>의 주인공인 행크가 바로 그렇다. 그런데다 청소차라니! 이 시리즈의 썸네일을 처음 보고 든 생각은 "세상에, 왜 여태까지 아무도 청소차를 주인공으로 애니메이션을 안 만들었던거지?"였다. 아이들의 청소차 사랑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Blippi의 garbage trucks for children 영상 조횟수는 무려 1억회다!)
거기에 세상의 지혜를 모두 알고 있을 것만 같은 해결사 모나 아줌마(생쥐)와 친구들이 내가 자는동안 자기들끼리 재밌게 놀까봐 겨울잠을 안자고 싶은 월터(곰), 그리고 자신의 엉뚱함을 '너구리 다운건데 뭐!'라며 매력으로 어필하는 도니까지. 어떻게 청소차랑 친구가 되지? 어떻게 곰이랑 너구리랑 생쥐가 함께 놀지? 라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정도로 이 다섯이 함께하는 그림은 너무 자연스럽고 또 따뜻하다. <내 친구 청소차>는 행크의 하루하루를 담은 만화다. 모험이나 문제해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아이는 이 시리즈에 푹 빠졌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별 다른 큰 이벤트 없이 그저 매일매일 가장 좋아하는 친구들과 좋아하는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 아마 코로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의 어린이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집 다섯살이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불편한 옷도 입어야 하고 맛없는 것도 먹어야 해서" 이제 어린애는 그만두고 싶어진 행크가 '청소동물'이 되는 회차다. 아이는 이 시리즈를 보면서 혼자 조용히 그리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린다. 대체 뭐가 그렇게 재밌어? 같은 생각이 들지만 화면 속에 청소차와 행크도 같은 표정이라 그러려니 하게 된다. 조용한 마을의 풍경을 살린 그림체와 따뜻한 색감도 인상적이다.
크리스마스 특별 에피소드로 공개된 <내 친구 청소차의 크리스마스> 역시 귀여운 상상력으로 가득하다. 썰매가 망가진 산타를 돕기 위해 청소차를 타고 다함께 선물을 배달하는 크리스마스 이브라니! 지금 우리집 다섯살은 어쩌면 자기도 내년 크리스마스엔 산타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중이다. 시즌 2가 무척 기다려지는 작품이다. (시즌1, 총 1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에피소드 당 15분 내외. 크리스마스 에피소드는 별도 편성되어 있다. 28분)
이 글을 쓰면서 회사 채널을 통해 카드뉴스를 발행하기도 했다. https://www.instagram.com/p/CHzaqLJJDaX/?igshid=3vwijzzjmdax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또 반가워 해주셔서 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됐다. 다음 브런치에서는 역시나 넷플릭스 키즈 오리지널 컨텐츠인 <에밀리의 유쾌한 실험실>, <신기한 스쿨버스> 그리고 <스피릿>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