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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 Dec 31. 2020

읽는 사람의 2020년

2020년의 책 결산


 2020년은 모든 것이 다 힘든 해였지만 특히나 '읽기' 정말 힘든 해였다. 나는 주로 아이를 등원시키고 나서 오전에 혹은 점심 먹고 나서 하원 전까지, 오후에 하원한 아이가 혼자 노는 시간이 됐을 때, 밤에 잠들기 전에 읽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틈날 때마다 읽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코로나로 가정보육이 수개월 동안 이어지면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고 나는 그게, 그러니까 책 몇 페이지 읽을 시간조차 없다는 것에 무척 울적해졌다. 아이에게 "지금부터 엄마는 책을 읽을거야."라며 선언하듯 말하곤 시위하듯 읽어제끼곤 했다. 마치 읽는 것마저 그만둘 수는 없다는 듯이 말이다. 

 어쨌든 정말 필사적으로 읽은 한 해였고 덕분에 다른 때와 비슷하게 읽었던 것 같다. 85권. 책을 몇 권이나 읽었는지 평생 살면서 세 본 적이 없었는데 올해만은 예외였다. 어느 정도 읽고 있는지, 얼마나 읽었는지 신경쓰면서 읽었다. (조바심을 내면서 읽었다고 해도 큰 과장은 아니다.) 사실 여러가지 여건 상 온라인으로 책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도 바람직한 방식도 아닌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북클럽을 꾸린 것도 그래서였다.(북클럽을 시작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역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었다.) 여러가지 한계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이어온 북클럽 덕분에 역시 같이 읽는다는 것의 즐거움과 묘미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고. 여튼 이렇게 저렇게 올 한 해도 '읽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다사다난했던 2020년의 책들.   



올해의 제목

어린이라는 세계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실시간으로 읽을 수 있었던 게 2020년의 큰 행복이었다.



올해의 표지 

스타인웨이 만들기


피아노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특히 이 표지를 말이다.



올해의 작가

은모든


은모든 작가를 발견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실 올해를 맞으며 세웠던 중요한 계획 중 하나가 "캄캄한 밤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전자책 읽지 않기"였고 두어달 정도 굉장히 잘 지키면서 착실한 수면 습관을 들이고 있던 중 코로나가 심각해지면서 읽을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는 다시 전자책에 손을 댔다(?). 여튼 별로 좋은 수면습관이 아닌 것 같아서 고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보던 중 조선미 선생님꼐서 오디오북이 꽤 효과가 있다고 말씀해주신 것이 떠올라, 어느 불면의 밤 오디오북을 찾아 헤매다가 발견했던 책이 바로 은모든 작가의 <안락>이었다. 이 책을 택했던것은 순전히 한예리 배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예리 배우 목소리가 좋은 것이야 물론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고른 것이었지만 정말 너무나 책 읽기 천재였다. 내가 이 오디오북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지. 조근조근 읽으면서도 인물마다 약간씩 톤과 말투에 변화를 주는 방식이 정말 편안했고 마음에 들었다. 오디오북을 아주 많이 들어본 건 아니지만 너무 드라마틱하고 비장하게 힘을 준 클립들은 나에게는 별로 맞지 않았는데 이 클립은 정말 잘 맞았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읽고, 아니 듣고 아주 많이 울었다. 언젠가는 혼자 점심을 먹으며 틀어놓고는 한 시간 가까이 눈물을 줄줄 흘렸던 날도 있다.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나서. 할머니가 내가 성인이 된 후까지 살아있었다면 우린 어떤 이야기들을 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서. 여튼 그렇게 은모든 작가를 알게 됐고 그 후로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를 찾아 읽었는데 이 책은 또 전혀 달라서 더 궁금해졌다. 다른 작품들도 찾아볼 생각이다. 



올해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유원

이상하게 파란 여름


 작년에 친구들과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같은 이야기들을 종종 했다. 그건 당시 몇 가지 이유로 굉장한 갈채를 받던 작품들을 읽고 우리는 좀 그러니까, 그저 그랬기 때문이었다. 하나같이 뜨뜨미지근 하거나 글쎄 내가 이걸 왜 소설로 읽어야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의문과 혼란 속에 정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읽게 됐고 이 책은 정말이지 그런 질문들에 대한 정세랑의 대답 같았다. 동세대 작가 중 그런 면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내게 이건 최은영, 김혜진, 황정은 작가다.) 이 작품은 확실히 가장 탁월했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이슈를 있는 그대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에 대해 나는 좀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편이고 과연 그렇게 정말로 일어난 일들 토대 위에서 쌓여진 인물이나 플롯을 완벽히 가공된 하나의 독자적 이야기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 그리고 그게 아니라면 내가 그 이야기를 굳이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읽어야 할 이유가 있나 싶고. 내가 보수적인걸까, 라는 생각도 많이 해봤지만 여튼. 내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실에 발을 디디고 있으면서도 새롭게 만들어진 이야기를 읽고 싶은 것인데 [시선으로부터]가 정확히 그런 소설이었다.

 [유원]에 대해서는 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금 힘들다. 음. 다만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영화 [래빗 홀]을 많이 떠올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비극을 공유하는 이들만이 때로는 서로에게 가장 안전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는 것. 서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는 것. [유원]은 그 설정을 조금 비틀면서 그 이야기보다 조금 더 멀리 나간다. 미워하면 안 되는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면 안 된다고들 하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 그 괴로운 마음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의 그 마음 또한 알아보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럴 수 있었다고 서로를 향해 말해줄 수 있는 마음들. 아마 그 마음이 바로 둘을 붙여준 동시에 한 발짝쯤은 서로에게서 떨어지게 만들겠지만. 한동안 그 이름을 조용히 발음해보곤 했다. 유원.    

 [이상하게 파란 여름]은 내가 읽은 두 번째 케이트 디카밀로의 책이다. [에드워드 툴레인의 신기한 여행] 원서를 우연히 중고서점에서 발견해 읽었는데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이었어서 케이트 디카밀로의 책들을 더 읽고 싶어졌다. 그 전에 케이트 디카밀로가 썼던 Why Children's book should be a little sad 라는 칼럼 덕분에 케이트 디카밀로를 알게 됐었고. 여튼 나는 이 책을 정말 좋아하게 됐는데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이 책을 다 읽은 다음에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상하게 파란 여름]에 대해서는 북클럽 모임 후기를 남겼던 이 포스팅으로 대신한다. https://www.instagram.com/p/CFa_zXkjQds/?utm_source=ig_web_copy_link 

 참, 황정은 작가의 [연년세세]를 아직 읽는 중이다. 그런데 아마 다 읽고나면 나는 이 책을 분명 올해의 소설에 올리게 될 것이다.



올해의 논픽션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

아이들의 계급투쟁

원본 없는 판타지

배움의 발견

하틀랜드  


 올해는 정말 훌륭한 논픽션들을 많이 읽었다. 생각해보니 작년에도 그랬었다. 김원영 변호사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현경 선생님의 [사람, 장소, 환대],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까지. 차이가 있다면 올해는 미국 작가들의 논픽션을 많이 읽었다는 것이다. [나는 불안과 함께 살아간다]는 이미 브런치에 긴 글을 쓴 바 있으니 생략하고. [배움의 발견], [하틀랜드]는 내겐 조금 비슷한 이야기로 다가왔다. 두 저자가 자신이 성장한 지역을 회고하는 방식이랄까 감정이 조금 다른 부분인데 그런 면에서 나는 [하틀랜드]를 조금 더 궁금해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배움의 발견]에서는 어떤 대목들을 읽는 게 정말 힘들었다. 그 이야기를 그렇게 써낸 작가에게 나는 어느 정도 경외심을 가졌던 것 같다. 어쩄든 두 책을 관통한 질문들은 그런 것들이었다. 지성이란 무엇인가.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이 가능한 환경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타라 웨스트오버의 대답은 그랬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브래디 미카코의 [아이들의 계급투쟁]은 정말정말정말 훌륭한 책이었다. 책 자체도 훌륭하지만 이런 태도로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라니. 존경심이 샘솟을 수밖에 없었고. 올해 나온 [나는 옐로에 화이트에 약간 블루]는 또 다른 의미로 좋았는데 언젠가 이 두 권의 책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원본 없는 판타지]는 친구의 추천으로 읽었던 책. 여러 작가가 공저한 책을 올해의 책으로 꼽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인데 이 책은 기획자의 기획의도에 어긋나는 챕터가 하나도 없이 모든 글들이 '원본 없는 판타지'라는 제목에 충실하고 있었다.



올해의 인터뷰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진은영 선생님과 정혜신 박사의 인터뷰집. 이 책을 사둔 것은 사실 꽤 오래전 일이다. 아마도 책이 나오자마자 샀던 것 같은데 책을 펼치지조차 못했었다. 조금 용기를 내서(라는 말을 내가 감히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읽기 시작했고 이 책은 물론 세월호에 관한 책이지만 트라우마에 대한 책이기도 했다. 사회적 트라우마의 치유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원전 같은 책. 정혜신 박사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좀 여러가지 단상을 갖고 있는데 나는 그가 이 책에서 한 이야기만큼은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



올해의 에세이 

명랑한 은둔자  


[드링킹]을 재작년에 읽었는데 그 때는 냅이 세상을 떠났다는 걸 몰랐었다. 그리고 그 책을 그렇게 좋아하게 될 지도 몰랐었고. 여튼 두 번째로 읽은 냅의 책. 내 기억으로 내가 어떤 책을 읽고 이런 행동을 하게 됐던 건 스물몇살 때 중앙도서관에서 카버의 단편소설집을 읽었던 때가 처음인데. 그 후로 종종 그런 책들이 있고 이 책이 그랬다. 팟캐스트 녹음가는 길 내낸 이 책을 읽었는데. 정말 책을 덮을 수 없어서 지하철 역을 세 정거장이나 지나고 한 번은 아예 반대 방향으로 잘못 타고 내려서 걸으면서도 읽다가 지하철 출구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그리고 기차 안에서도 계속 읽었는데 정말 게걸스럽게 읽다가 페이지가 줄어드는 걸 느끼고 아, 안 돼. 하는 마음이 되어서 접어둔 페이지들로 돌아가서 다시 읽고 천천히 읽고 그 문장들이 적혀있는 페이지에 가만히 손바닥을 얹곤 했다. 이 책에 대해 긴 글을 쓸 수 있을까? 임시저장 해 둔 페이지가 있지만 어쩐지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김명남 번역가와 마찬가지로 냅이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올해의 그림책 

괜찮을 거야


이 그림책을 펼칠 때마다 여전히 크게 위로 받는다. 나는 너를 알아. 너는 괜찮을 거야.  



올해의 양육서

엄마가 늘 여기 있을게


제목이 조금 아쉽지만 사실 이해가 가는 제목이기도 하고. 음 여튼 정말 마음 깊이 새기고 싶은 구절들이 많았고 양육자로서의 나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했던 책이다. 대상관계이론 전문가이신 권경인 박사님이 쓰신 책인데 대상항상성, 관계의 통합/분화와 같은 조금은 전문적인 대상관계이론의 개념들까지 비교적 쉽게 다루고 있다. 지금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들의 불안을 유난이라는 식으로 매도하지 않되 바꿔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



올해의 로맨스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코로나 초기에 정말 힘들었을 때 이 명랑한 소설을 만나게 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이 책을 한창 재밌게 읽던 시절, 바당이가 글씨를 막 읽게 되어 내가 읽고 있던 페이지들을 더듬더듬 읽어냈던 것도 이 책에 대한 좋은 기억 중 하나다. 이 책은 사실은 뭐랄까 고양이에 관한 책인데. 물론 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세계가 우리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모르는 것이 어쩌면 훨씬 많을 것이라는 것, 내가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세계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것들이 이상하리만치 위안이 되는 그런 이야기였다.



올해의 주인공

도미니크


솔직히 말하지만 나는 정말 도미니크가 개가 아니었다면 나는 도미니크를 고까워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개이기 때문에...웃으면서 책을 볼 수 있었다...윌리엄 스테이그가 그린 도미니크의 그림들이 너무 웃겨서 사실 몇 장은 사진을 찍어서 저장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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