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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케혀 Aug 07. 2019

태풍이 와도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맞은편에는 초등학교가 하나 있다. 베란다에서 내다보면 운동장이 훤히 보이는데 아침 일찍부터 운동장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연령대가 조금 있어 보이긴 하지만  분들은 여간하여서는 운동장을 걷는 일을 그만두는 법이 없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운동장을 걷고, 날씨가 추울 때는 장갑을 끼고 두꺼운 파카를 입은 채로 운동장을 부지런히 돈다. 비바람이  때는 그만  법도 하지만 비가 들지 않는 스탠드 주변을 분주히 걷는다.


오늘 태풍 '프란시스코'의 북상으로 온 나라가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퇴근 무렵 밖에서는 비바람이 창문을 세차게 때렸고 우산을 들고 길을 걷던 사람들은 세찬 비바람에 우산이 날아가거나 뒤집혀 애를 먹고 있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우산 펴는 것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는 듯이 비를 맞으면 길을 걸어가기도 했다.

 

다행히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바람이 잦아들어 비만 조금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익숙한 얼굴의 아저씨 한 분이 배달원이 입을법한 녹색 우비와 장화를 신고 한 손에 악력기를 쥔 채로 아파트 단지를 열심히 돌고 있는 게 아닌가. 지나가면서 몇 번 뵌 적이 있기에 저녁시간에 운동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풍이 오는 날에도 쉬지 않고 우비를 입고 나와 걷고 있는 모습에 적잖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처한 상황이 못 마땅할 경우 곧바로 포기하고 마는 사람이 있지만, 어떻게든 그날의 할당량을 끝내 채우는 사람도 있지.' 처음에는 차이가 미미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 이 두 사람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큰 격차가 생겨있을 것은 뻔하다.




하와이로 온 이후에도 매일 거르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리는 생활을 다시 시작한 지 이제 곧 두 달 반이 된다. 오늘 아침을 러빙 스푼풀 The lovin' Spoonful의 《데이드림 Daydream》과 《험스 오브 더 러빙 스푼풀 Hums of Lovin' Spoonful》, 이 두 장의 앨범을 합쳐 녹음한 MD를 워크맨에 넣고 그 음악을 들으면서 1시간 10분 동안 달렸다.


강한 인내심으로 거리를 쌓아가고 있는 시기인 까닭에, 지금 당장은 시간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거리를 뛰어간다. 빨리 달리고 싶다고 느껴지면 나름대로 스피드도 올리지만, 설령 속도를 올린다 해도 그 달리는 시간은 짧게 해서 몸이 기분 좋은 상태 그대로 내일까지 유지되도록 힘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을 때와 똑같은 요령이다. 더 쓸만하다고 생각될 때 과감하게 펜을 놓는다. 그렇게 하면 다음 날 집필을 시작할 때 편해진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아마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계속하는 것- 리듬을 단절하지 않는 것. 장기적인 작업을 하는 데에는 그것이 중요하다. 일단 리듬이 설정되어지기만 하면, 그 뒤는 어떻게든 풀려나간다. 그러나 탄력을 받은 바퀴가 일정한 속도로 확실하게 돌아가기 시작할 때까지는 계속 가속하는 힘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누가 믹 재거를 비웃을 수 있겠는가?' 중에서

무라카미 하루키

 



비가 온다고 쉬고, 오늘은 금요일이라 쉬고, 회식이라 쉬고 그리고 약속이 있어서 쉰다면 흐름을 이어가지 못한다. '전날 많이 했으니 오늘은 좀 쉬어야지'하는 마음가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주말에만 공부를 바짝 몰아서 한다고 해서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많은 유혹을 이기고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주어진 할당량을 끊김 없이 이어가겠다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처음에는 힘들 수밖에 없다. 조각칼로 나무에 한 글자 한 글자 새겨나가듯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 리듬이 생기면 적은 수고로도 더 멀리 갈 수 있게 된다. 분야를 막론하고 어느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이런 지난한 시간들을 혼자서 이겨낸 사람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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