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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케혀 Aug 12. 2019

남의 밭 차를 대하는 자세

'뒷담화', 그것 만큼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고 정신 건강에 이로운 것이 과연 이 세상에 또 있을까. 뒷담화가 없는 세상은 라면에 김치가 없는 것과 같고 앙꼬 없는 찐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특히나 사회생활에서 뒷담화는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이다. 이것 없이 회사 생활은 불가능할 정도로. 


세상에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도 보기만 해도 싫은 사람 (사실 찾아보면 사소한 이유라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여기저기 남의 험담을 하고 다니는 사람, 아부하는 사람, 가식적인 사람, 싸가지 없는 사람 그리고 일 못하는 사람 등 험담의 타깃은 널리고 널려 사열종대 앉아번호 연병장 두 바퀴로 턱도 없으니 나의 뒷담화는 마를 일 없다. 물론 나 자신도 도마 위에서 여차 저차 한 이유로 중국요리에 사용되는 넓적한 칼로 생선 살 다져지듯이 다져질 것이다. 내가 상대를 향해 쏜 화살은 종국에는 그 수를 늘려 나를 향해 날아올 것이 뻔하지만 누군가를 말로 때로는 글로 (네이트온과 같은 메신저나 카톡을 통해) 까는 행위 (흉보는 행위)는 그만 두기 어렵다. 왜냐하면 험담 그 자체로 중독성이 있어 남에게 들은 내용을 친한 사람에게 그 이야기를 퍼 나르지 않으면 입이 간질간질해서 미칠 지경에 놓이게 되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듯 서로 제삼자를 통해 들은 내용을 서로 교환하는 은밀한 거래는 그 자체로 스릴 넘칠뿐더러 '내 그럴 줄 알았지' 연신 자신의 무릎을 치며 맞장구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 많은 일이 그렇듯 모든 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때에 따라 (이해득실에 따라) 친한 (또는 친했던) 동료를 흉보는 진퇴양난의 상황은 반드시 생기고 그것이 반복되다 보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어제의 동지가 하룻밤 사이에 서로의 심장에 창을 겨누는 적이 되어 있는 경우도 허다하게 발생한다. 그러나 그렇게 욕하던 상대방에게 도움을 받고 진심으로 고마워 할 때가 있고, 사소한 일 하나로 좋았던 사이에 금이 갈수도 있는 것이 세상일이다. 말은 하면 할수록 자신을 옥죄여 오고 남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 할 수 없게 된다. 유일한 해결책은 눈과 귀를 닫고 입을 막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없이 행복할 텐데. 나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은 계속 밖으로 향하니 나는 계속 욕을 먹나 보다. 




언젠가 한 소설가의 산문집에서 이런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차밭 주인은 남의 밭 차에 대해 품평하지 않는다." 나는 비록 유치한 글을 잔뜩 쓰는 사람이지만, 나 역시 한 명의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글을 읽으면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차밭 주인이 남이 밭 차에 대해 품평하지 않듯이, 나 역시 조용히 독서를 한다. 비단 차밭 주인이나, 소설가뿐 아니라, 요리사도, 재단사도 남의 음식이나, 양복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보태지 않는 게 예의다. 그것은 비평가의 몫이고, 소비자의 몫이고, 어떤 측면에서 호사가의 몫이다. 확장해보면 비단 소설가나 요리사뿐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평가하기 시작하면 그 인생 역시 난처해진다. 그러다 보면 주변 사람들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고, 그 주변 사람들도 어느 순간 '이때껏 참아왔는데, 저 인간이야말로...' 하면서 말을 보태기 시작한다. 골치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 일을 겪게 한 사람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말하는가 하는 문제도 골치 아프다. 세상사는 생각보다 심플해서 내가 베푼 대로 돌아온다. 내가 험담하는 만큼 나를 향한 험담이 돌아오고, 내가 불평하는 만큼 세상은 불평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마찬가지로, 내가 용서하는 만큼, 나 역시 용서받게 된다. 물론, 내가 용서해준 사람이 나를 한 번 용서해주는 거래 같은 개념은 아니다. 나의 양보를 모르기도 하고, 더욱 오해를 하기도 하고, 더욱 억울한 일을 겪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고 경험한 세상사의 이치는 꽤나 단순해서, 내게 돌아올 것을 비록 시차가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돌아온다는 것이다. 즉 내가 지은 죄를 용서받을 기회가 내가 용서한 그 상대방이 아닌 제삼자에게서, 혹은 다른 조건이나 상황 아래서, 그것도 아니라면, 나만 알고 있던 부끄러운 잘못을 신에게서 용서받을 기회라도 생긴다는 것이다. 굳이 이런 걸 바라고 사는 건 아니지만, 이런 원칙이 삶이라는 바쁜 여정에 오른 행인에게 건네는 차 한잔 정도는 된다. 여하튼, 차밭 주인은 남의 차에 대해 품평하지 않는다. 같은 의미로, 작가 역시 다른 작가이 작품에 대해 품평하지 않는다. 인간 역시 다른 인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소설을 쓰건, 차 농사를 짓건, 그 밭 옆길을 지나가건, 삶은 누구에게나 정직하게 다가온다.


_꽈배기의 멋, 최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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