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_이진선>
작년 초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에 경력직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기존보다 인원수도 많고 규모가 큰 회사라 연봉도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인상시켜서 들어갈 수 있었어요. 이제 꽃길만 걷겠구나 싶었는데 출근 첫날부터 만만치 않더군요. 기존 업무 담당자는 인수인계도 하지 않고 이미 떠나 버렸고 남은 팀원들이 퇴사자의 업무 공백을 임시방편으로 메우고 있을 뿐이었죠. 뭐 하나 물어보면 제대로 된 답변이 오는 경우가 없었어요. "그건 저도 담당자가 아니라서 잘..."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있나요. 경력직이지만 모르는 것을 묻고 또 묻고 어떻게든 일이 되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모두들 지켜만 볼뿐 어는 누구도 나서서 내 일을 대신 해주지 않습니다.
제 아무리 경력직이라고 하지만 장소를 옮겨 일을 하게 되면 신입 못지않게 모든 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을 해야 합니다. 비슷한 종류의 일을 하더라도 처음 보는 사람들과 새로운 시스템으로 낯선 일을 맡아서 진행해야 하죠. 운이 좋아서 좋은 동료나 선배를 만난다면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지만 설명도 제대로 해주지 않고 '알아서 하세요' 자세로 나오는 경우도 적지 않죠. 보통 회사에서는 인력을 타이트하게 돌리기 때문에 각자 맡은 일을 쳐내기 바쁘고 주변을 돌봐줄 여력이 없습니다. 새로운 사람이 별 이유 없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요. 그것도 아니면 경쟁자로 여길 수도 있죠. 게다가 일을 제대로 가르쳐 줄 사수도 없는데 업무에 대한 매뉴얼이 존재할 가능성은 더 희박하죠. 이렇게 눈앞이 캄캄해서 한 발짝도 못 내디딜 때 힘을 얻고자 찾아 읽은 책이 있어요.
맞아요. 이 글은 제 자신에게도 하는 말입니다. 없는 길이라도 만들어서 가자는 마음가짐이에요.
노하우를 나누는 일에 인색한 사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 본인이 직접 겪으며 어렵게 배운 것을 남이 쉽게 가져가는게 아까워서일까? 아니면 자신의 밥그릇을 뺏길까 불안한 것일까?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입버릇처럼 '보고 배울 사수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이 힘든 진짜 이유는 사수의 부재가 아니라 사수에 지나치게 의존하려는 마음에 있다. 스스로 가르치고 배우는 법을 아는 사람은 이끌어 줄 사수가 없어도 괜찮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서 알아서 성장한다. 자기를 돌보고 길러낼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훌륭한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성장할 수 없다. 멘토는 배울 준비가 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법이다."
읽고, 생각하고, 일에 적용하는 사이클을 반복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단순히 오래 일한다고 전문성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며, 무작정 열심히 한다고 실력이 만들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하다 보면 늘겠지'라는 생각은 마치 시간만 지나면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을 보자. 10년 차, 20년 차 초보자는 얼마든지 있다.
20년의 연차가, 멋진 포트폴리오가 그 사람의 전문성을 입증하는 지표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는 어딘가가 과도하게 결핍된 경력자들이 너무나 많다. 자기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뭘 모르고 있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무능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며 자신감이 넘친다는 더닝 크루거 효과(Dunning-Kruger effect)를 아는가? 단지 연차가 많다는 이유로 인지 편향(비논리적인 추론에 따라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패턴)이 심한 사람이 사수가 되고, 팀장이 되고, 대표가 되어 불러일으키는 재앙을, 나는 이후로도 여럿 목격했다.
실력은 결코 연차에 비례하지 않는다.
<사수가 없어도 괜찮습니다> 중에서
모르는 것을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는 사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존재한다는 사실 (내 일은 내가 처리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default로 두는 것은 분명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면 업무 중 고객사와 예상치 못한 이슈가 발생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식은땀이 나고 패닉 상태가 된다고 해서 선배나 상사에게 곧바로 달려가 "도와주세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며 도움을 구해야 할까요? 상사가 옆에 있어서 도움을 바로 줄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출장이나 다른 이유로 자리를 비웠을 때 이런 돌발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게다가 이미 본인이 높은 직급에 있어서 더 이상 물어볼 상사가 없을 수도 있고요.
상사에게 도움을 구하기 전에 설령 틀릴지라도 스스로 자문해보는 것이 중요해요. 현재 처한 상황과 맞닥뜨린 문제는 무엇인지, 고객사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제안할 수 있는 해결책과 거기에 따르는 리스크는 어떻게 관리하고 대비해 나갈 것인지를 미리 따져 보는 것이죠. 필요하다면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스스로 정리가 된 후 사수에게 '이러한 일이 발생했고 해결 방향은 이렇게 잡아 보았습니다. 혹시나 추가되어야 하거나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있을까요'라고 묻는 거예요. 사수 입장에서도 시도도 해보지 않고 문제를 가지고 와서는 도와달라는 후배보다는 나름 치열하게 고민하고 틀렸더라도 스스로의 답을 찾아온 후배를 도와주고 싶지 않을까요.
제가 좋아하는 글이 있어요.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마음으로 만나고 아양 떨고 참아야 했던 사람들과의 약속을 없애고 좀처럼 일어나지 않지만 어쩌면 일어날지도 모를 것 같은 남의 도움에 대한 희망을 과감히 접고, 기본적으로 '남'은 나를 구원해 주지 못한다라는 철학을 마음속에 품고 살면 고독과 불안과 절망을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미래보다 선명한 '지금'을 제대로 만나게 되더라.
_여준영 (Prain Global 대표이사)
"남은 나를 구원해주지 못한다" 저한테 있어서는 모든 것을 관통하는 울림이 있는 문장입니다. 남으로부터 받은 것은 어떤 형태로든 되돌려 줘야 합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그렇다고 도움을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남들로부터 섣부른 기대를 하지 말고 스스로 없는 길은 만들어 가야 합니다. 내가 스스로 치열하게 해낸 것을 내 것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남들로부터 쉽게 얻을 것보다 오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