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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mm Jun 22. 2019

<위플래쉬>의 결말을 읽는 3가지 방법

앤드류의 극복인가, 플랫처의 큰 그림인가

(<위플래쉬>의 스포일러가 가득 있습니다.)



   드러머의 꿈을 가지고 셰이퍼 음악학교에 입학한 앤드류는 우연히 만난 플랫처가 지휘하는 오케스트라에 들어간다. 메인 드러머의 악보나 넘겨주던 그는 경연 대회에서 메인 드러머가 악보를 잃어버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좋은 연주를 선보여 메인 드러머 자리를 꿰찬다. 여자친구인 니콜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할 정도로 위대한 드러머에 대한 열망을 품지만 여전히 메인 드러머 자리를 위협받는 상황에서 학대에 가까운(이라기에는 그냥 학대인) 일들을 당하고, 중요한 연주회에서 여러 불운이 겹쳐 연주를 망치는 바람에 플랫처의 오케스트라에서 쫓겨난다. 앤드류는 플랫처를 신고하라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를 받는다. (앤드류가 실제로 플랫처를 신고했는지의 여부는 영화에서 제시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드러머의 꿈을 포기한 채 살아가던 앤드류는 동네의 작은 재즈바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던 플랫처와 재회한다. 음악 페스티벌에서 공연할 자신의 팀에 합류해 달라는 플랫처의 부탁에 응한 앤드류는 애써 멀리하던 드럼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부분. 플랫처는 연주를 준비하는 앤드류에게 "네가 신고한 거 모를 줄 알았냐?"라고 말한 뒤 앤드류가 준비하지 않는 곡을 시작한다. 당연히 앤드류는 연주를 망친다. 모멸감을 느끼며 무대 백스테이지로 가는 앤드류 앞에는 그의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다. 아버지는 앤드류를 안아주며 괜찮다고 위로해준다. 앤드류는 아버지의 위로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갈까? 그 대신 그는 다시 무대 위의 드럼 앞에 앉고, 독자적인 연주를 시작한다. 연주할 곡을 자신이 선택하고, 신기에 가까운 솔로 연주도 성공적으로 해내고, 플랫처에게 지시를 내린다. 플랫처는 어쩔 수 없이 앤드류의 지시를 따르고, 나중에는 자신도 몰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Caravan'이 끝나고 서로를 바라보는 앤드류와 플랫처를 한 번씩 보여주며 영화는 끝난다.


   편집, 촬영, 조명, 음악, 연기 등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은 그 자체로 굉장한 재미를 주지만, 그러면서도 관객들에게 쉽게 답을 쥐여 주지 않는다. 깊은 몰입 뒤에 여러 생각들이 뒤따른다. 이것은 두 인물이 함께 비극을 맞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앤드류가 플랫처를 극복해 낸 이야기일까. 어쩌면 플랫처가 바라던 결말은 아닐까. 마지막에 두 인물이 주고받는 눈빛은 무슨 의미일까. 두 번째 볼 때 더욱 많은 질문을 던지던 이 영화의 결말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보았다. 





   1. 나의 템포


   아마 <위플래쉬>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Are you rushing or dragging?("빨랐어 느렸어?")일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템포에 집착하는 플랫처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 대사는 빨랐는지 느렸는지 연주자 스스로도 알 수 없어서 더 무섭고, 스스로도 알 수 없을 정도의 미세한 차이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무섭다. 앤드류가 플랫처의 인정을 받기 위해 하는 모든 노력은 플랫처가 요구하는 박자를 맞추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플랫처가 정해진 시각에 오차 없이 들어오거나 약속에 늦은 학생을 기다려주지 않는 것 또한 그가 정확한 템포를 얼마나 중요시하는 인간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의 제목인 '채찍(Whiplash)'이 플랫처가 앤드류를 가르치는 방식에 대한 은유임은 자명해 보인다. 채찍은 일단 맞으면 아프다는 속성이 있고, 더 중요하게는 때리는 존재와 맞는 존재를 필요로 한다는 속성을 가진다. 그래서 앤드류와 플랫처의 관계는 흡사 말과 마부의 관계처럼 보이기도 한다. 플랫처가 박자를 맞추게 하기 위해 치는 박수는 마부가 말을 달리게 하기 위해 때리는 채찍과 같다. 마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말처럼 앤드류는 플랫처가 이끄는 템포에 따라 끌려갈 수밖에 없다. 두 인물의 관계가 단순한 스승과 제자라기보다는 오히려 SM적 관계에 더 가까워 보이는 이유다.


   물론 플랫처의 강압적인 교수법에 이유가 없지는 않다. 그는 자신의 학생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붙여야만 그들이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가 학생들에게 말하는 찰리 파커의 일화는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스승상을 잘 보여준다. 조 존스는 찰리 파커의 연주를 듣던 도중 심벌즈를 던져 버린다. 극심한 창피함을 오기로 이겨낸 찰리 파커는 미친 듯이 연습에 몰두하고, 마침내 위대한 색소폰 연주자가 된다. 플랫처는 찰리 파커가 위대해진 것은 조 존스가 던진 심벌즈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제2의 찰리 파커를 만드는 제2의 조 존스가 되기를 바란다. 찰리 파커 같은 연주자가 되기를 바라는 앤드류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플랫처를 따르게 된다. 


   앤드류는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도 플랫처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네가 말한 거 모를 줄 알았냐?"라는 플랫처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플랫처의 달콤한 말들에 가려진 어두운 부분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플랫처가 강요하는 템포에서 벗어나 자신의 템포에 따라 연주를 시작한다. 앤드류가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플랫처가 그에게 심어놓은 성공 신화의 환상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이 영화는 플랫처의 교육 방식을 옹호하는 영화라기보다는 그에 담긴 폭력성과 기만성을 비판하는 영화라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


   이 영화가 여러 악기 중에서 굳이 드럼 연주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상징적이다. 드럼이야말로 지휘자 없이도 자신만의 템포에 따라 연주할 수 있는 악기이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각자의 템포를 존중하지 않고 하나의 템포를 강요하는 플랫처에 맞서 자신만의 템포로 연주한다. 각자의 개성을 무시하는 사회 안에서 상처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앤드류가 겪는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위플래쉬>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보편적인 쾌감은 여기에서 나온다.





   2. 두 명의 아버지, 두 개의 세계


   <위플래쉬>는 결국 두 인물의 이야기이다. 앤드류의 여자친구인 니콜도, 앤드류와 메인 드러머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라이언도 주변부의 인물에 불과하다. 그런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실패한 연주와 성공한 연주 사이, 앤드류가 중요한 결심을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 앤드류의 아버지를 등장시키고, 앤드류를 아버지와 플랫처 사이에 위치시킨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부분에서 중요하게 다루지 않던 인물을 갑자기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일까.


   영화에서 앤드류와 아버지가 함께 등장하는 장면들은 언뜻 보면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아버지는 앤드류와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거나 집에서 팝콘을 먹으며 드라마를 본다. 아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이해하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다만 그를 따뜻하게 보호해주고 위로해줄 수 있을 뿐이다. 앤드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이해하는 사람은 그의 또 다른 아버지라고도 볼 수 있는 플랫처다. 이해하는 걸 넘어서 열정에 불을 지핀다. 하지만 플랫처는 아버지와는 달리 그를 품어주지 않는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매몰차게 내친다. 앤드류가 울먹일 때 위로해주기는커녕 약점을 공격하고 조롱한다. 이렇듯 아버지와 플랫처는 철저하게 대비된다.


   그래서 앤드류가 아버지와 플랫처 사이에 놓이는 장면은 두 명의 아버지 혹은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앤드류의 상황을 시각적으로 구현해낸다. 한쪽에는 따뜻한 혈연적 아버지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냉정한 음악적 아버지가 있다. 한쪽에는 "그만하면 잘했어"가 미덕인 세계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그것밖에 못해?"가 미덕인 세계가 있다. 앤드류가 전자를 택한다면 스스로를 몰아붙일 필요 없이 안락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열정 없이 주말에 집에서 팝콘을 먹으며 드라마나 보는 삶을 살 것이다. 반면 후자를 택한다면 플랫처에게 계속 상처 받고 성격도 나빠지겠지만 위대한 드러머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앤드류는 어떤 세계를 선택하게 될까.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듯이 앤드류는 어떤 아버지도, 어떤 세계도 선택하지 않는다. 야망 없는 지지부진한 일상이 싫어서 아버지의 품을 떠나고, 강요하고 학대하는 가르침의 방식이 싫어서 플랫처를 극복한다. 자신의 꿈을 위해 망설임 없이 니콜을 떠난 것처럼 주저하지 않고 두 명의 아버지를 모두 인정하지 않는 제3의 길을 택한다. 따라서 <위플래쉬>는 두 세계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양쪽 모두를 부정하는 이중 부정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3. 플랫처 성공 신화의 완성


   1번에서는 <위플래쉬>를 자기 템포를 강요하는 플랫처에 맞서 자신의 템포로 이겨낸 앤드류의 이야기로 보았다. 2번에서는 이 영화를 앤드류가 서로 대비되는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그 둘 모두를 부정하는 이야기로 보았다. 1번이든 2번이든 앤드류가 플랫처를 극복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렇게 단정하기에는 <위플래쉬> 후반부의 플랫처의 표정들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앤드류의 돌발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나중에는 스스로도 즐기는 것처럼 보였고, 연주가 끝난 뒤 앤드류를 바라보는 표정에는 묘한 미소마저 있었다. 플랫처의 입장에서는 이 이야기를 전혀 다르게 바라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위에서도 얘기했듯이 플랫처는 조 존스가 던진 심벌즈 덕분에 찰리 파커가 위대한 연주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믿음은 인과 관계도 성립하지 않을뿐더러 다른 많은 요소들, 기존에 찰리 파커가 가지고 있던 재능이나 찰리 파커의 정신적 고통 (실제로 그는 30대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등을 생략한다. 플랫처의 신념이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가진 맹목성이 다른 구체적인 맥락들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영화의 마지막에서 앤드류가 해낸 굉장한 연주가 플랫처가 앤드류를 속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플랫처가 앤드류의 재능을 이끌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앤드류를 속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플랫처의 신념 체계의 맹목성과 결과론적인 해석 방식을 따른다면 플랫처가 제2의 찰리 파커를 양성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맨 마지막 플랫처의 의미심장한 미소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는 만족감의 표시로 읽을 수 있다. 아마 플랫처는 이후에 만나는 다른 학생들에게 앤드류가 자기 덕분에 훌륭한 연주를 하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다. 조 존스가 찰리 파커의 재능을 이끌어낸 것처럼 자신이 앤드류의 재능을 이끌어냈다고 말이다. 이러한 플랫처 성공 신화의 관점에 따르면 <위플래쉬>의 결말은 염세적이다. 결국 앤드류는 플랫처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플랫처가 바라던 목표를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이뤄준 꼴이 되기 때문이다. 데미안 차젤레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아마 앤드류도 10년 후에 자살해서 죽었겠죠?"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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