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ramm Jun 25. 2019

좋은 공동체의 조건

드라마 <청춘시대>를 보고



0. JTBC는 지난 몇 년간 자유로운 창작 환경과 뛰어난 인력을 바탕으로 좋은 프로그램들을 연이어 제작해왔다. 보도 분야와 예능 분야에서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드라마 분야에서의 성과들도 놀라웠다. 개인적으로는 국내외 드라마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유나의 거리>와 드라마로서는 드물게 연출자의 장악력이 돋보였던 <밀회>가 있었고, 올해만 해도 (<밀회>와 상류층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공유하는) 엄청나게 재밌는 드라마 <품위있는 그녀>와 시즌 1의 재미를 이어간 <청춘시대 2>가 있었다. 주제도 톤도 전혀 다르지만 모두 상당한 완성도를 지닌 작품들이다. 특히 이 드라마들은 인상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서사의 중심에 세웠다는 점에서도 기억할 가치가 있다. <유나의 거리>의 주인공은 김옥빈이고 <밀회>의 주인공은 김희애, <품위있는 그녀>의 품위있는 두 주연은 김선아와 김희선이다. 그리고 지난 10월 시즌 2를 마친 <청춘시대>는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 '벨 에포크'에서 함께 살아가는 다섯 하메(하우스메이트)들의 이야기이다.


1. <청춘시대>는 1명 혹은 2명을 중심으로 하는 일반적인 구성 대신 다섯 인물이 동등하게 다루어지는 구성을 택한다. 시즌 1에서 정예은(한승연)의 데이트 폭력 피해나 시즌 2에서 송지원(박은빈)의 어린 시절 기억처럼 극 전체를 이끄는 사건들이 있긴 하지만, 이조차 개인의 일이 아니라 다섯 인물 공동의 일로 그려진다. 조연 캐릭터들도 마찬가지다. 조은(최아라)의 절친인 안예지(신세휘)는 조은과 사귀게 되는 서장훈(김민석)과 비슷한 비중을 가지고, 주변 인물에 불과할 수 있는 정예은의 친구 캐릭터가 반전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특정 캐릭터에 집중하거나 편을 들지 않고 다양한 인물을 균형 있게 다루는 것은 박연선 작가가 쓴 드라마들의 일관적인 특징인데, 이를 통해 특정 인물보다는 인물들 간의 관계에 주목하고 나아가 인물들의 연대 의식을 중시하는 작가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2. 박연선 작가에 따르면 <청춘시대>의 원제는 <벨 에포크>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도 청춘시대보다는 벨 에포크가 더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청춘'이라는 특정 세대가 아니라 '벨 에포크'가 상징하는 공동체 자체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물론 <청춘시대>가 청춘을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건들부터 디테일한 묘사에 이르기까지 청춘들, 특히 현재의 20대 여성들이 공감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 하지만 이를 통해 청춘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종의 세대론 같은 것을 제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20~30대 여성들을 타겟층으로 설정하고 그들의 공감을 얻는 데에 주력하는 작품은 아니라는 뜻이다.


3. <청춘시대>는 청춘들의 특수한 문제를 탐구하는 것을 넘어 공동체가 그들의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그 과정 속에서 공동체가 어떻게 변화해 나가는지를 관찰하는데 중점을 둔다는 측면에서 여타의 자품들과 궤를 달리한다. 이를테면 시즌 2에서 조은이 처음 벨 에포크에 들어와서 적응해나갈 때, (이는 시즌 1 초반 유은재(박혜수/지우)가 처한 상황과 같은데, 이런 식으로 이 드라마에는 한 사람이 겪은 일을 다른 사람이 다시 겪으며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는 경우가 아주 많다.) 새로운 곳에서 어려워하는 조은의 입장뿐 아니라 새로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는 다른 하메들의 입장도 공정하게 들어준다. 정예은이 자신에게 협박 문자를 보낸 이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도 그녀를 제대로 위로해주기 위해 다른 하메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일화들을 통해 "공동체에 새로 들어온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큰 상처를 받은 사람을 공동체가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와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4. <청춘시대>가 드라마라는 매체와 좋은 합을 가지는 것도 드라마의 주제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매체에 따라 더 잘 다룰 수 있는 이야기가 존재할 텐데, 드라마와 영화라는 두 영상 매체를 비교해봤을 때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물리적 시간이다. 영화관이 영화를 독점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는 한 호흡으로 볼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진다. 반면 드라마는 에피소드 단위로 구성되기 때문에 보통 두 시간 내외의 러닝타임을 갖는 영화에 비해 시간적 제약이 훨씬 적다. 시간적 제약이 적다는 것은 드라마에서 다루는 세계를 훨씬 자세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였다면 <뉴스룸>이 뉴스 데스크의 세계를,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이 여성 교도소의 세계를 그렇게 생생하게 전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청춘시대>도 드라마 형식의 힘을 빌려 다양한 디테일을 통해 벨 에포크의 세계를 더욱 잘 그려낼 수 있었다. 벨 에포크의 세계가 구체화될수록 시청자들은 스스로가 또 한 명의 하메가 된 느낌을 갖게 된다. 감상자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좋은 공동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드라마의 주제를 함께 숙고하게 만든다는 측면에서 <청춘시대>의 이야기에 드라마라는 매체는 좋은 토양이 된다.


5. <청춘시대>가 다루는 공동체는 작은 공동체인 동시에 큰 공동체다. 일단 벨 에포크 자체는 5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다. 가장 보편적인 작은 공동체는 가족일 텐데, 아닌 게 아니라 벨 에포크는 유사 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벨 에포크와 정예은 가족의 대비다. 벨 에포크의 하메들은 정에은의 고통에 공감해주고 그녀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반면 그녀의 부모는 그녀를 제대로 위로해주기는커녕 자신의 딸이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라는 것을 창피하게 여기고 숨기기 바쁘다. 정예은의 부모가 정예은을 집으로 데려가려고 하고 다른 하메들은 가지 말라고 하는 부분에 이르면 좋은 공동체(가족)과 나쁜 공동체(가족)이 정면으로 대치한다. 정예은은 벨 에포크에 남기를 선택하는데, 실제 가족이 아니라 벨 에포크라는 유사 가족을 지지하는 드라마의 용감함을 보여주는 이 장면을 통해 <청춘시대>는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연대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말하는 일련의 영화/드라마 목록에 당당히 한 줄을 추가한다.


6. 또한 <청춘시대>는 한국 사회라는 커다란 공동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윤진명(한예리)와 헤임달(안우연)의 에피소드가 특히 인상적이다. 회사에서는 돈이 되지 않는 아이돌 아스가르드의 멤버들을 해고시키는 일을 신입사원인 윤진명에게 떠넘기고, 해고를 통보받은 멤버들 중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헤임달은 1인 시위에 돌입한다. 이 에피소드는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어려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더 넓게 보면 한국 사회에 대한 코멘트로도 읽을 수 있다. 헤임달의 1인 시위를 윤진명이 무시하며 지나치는 장면을 윤진명이 출근할 때 1인 시위자를 못 본 채 지나가는 장면과 연결하면, 약자들이 서로를 벼랑 끝으로 내몰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생존자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강이나(류화영) 캐릭터가 무의미의 늪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꾸려가기 시작하는 것을 통해 한국 사회의 집단적 상흔을 위로하기도 한다. 


7. 그렇다면 <청춘시대>가 말하는 좋은 공동체의 조건은 무엇일까? 벨 에포크에 처음 온 유은재가 얻은 교훈처럼 다른 사람들도 나만큼 조심하고 배려한다는 것을 아는 것? 송지원이 유은재에게 했던 인상적인 대사처럼 누구나 다른 사람들을 납득시킬 만한 각자의 사정이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하는 것? 별장 에피소드에서 그랬듯 서운한 부분은 쌓아두지만 말고 솔직하게 말하는 것? 다양한 대답이 존재할 수 있겠지만 시즌 2 마지막 화의 마지막 대사, 벨 에포크에 놀러 온 강이나의 대사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편해. 세상에서 여기가 제일 편해."



작가의 이전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