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의무

by 회색달

어쩌면 삶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 알 수 없는 미래와 마주하며 때로는 불안에 떨고 때로는 희망에 부풀어 오른다. 정해진 답이 없는 문제들 속에서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해답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나 역시 그랬다. 지난날의 나는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평범한 직장인이었고,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1년에 한두 권 읽을까 말까 한 얄팍한 독서력을 가졌을 뿐이었다.

그런 내가 변하기 시작한 계기는 우연히 손에 잡은 책 한 권 때문이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 이 책은 내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지는 않았을지언정,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강렬하게 흔들어 깨웠다.


수용소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 스러져갔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소수의 사람들에게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은 극한의 고통과 비참함 속에서도 '살아야 할 이유'를 잃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희망, 오랜 꿈을 실현하겠다는 의지, 혹은 그저 수용소 뜰에 피어난 작은 꽃을 가꾸는 일에서조차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 그들은 주어진 상황을 원망하고 절망하는 대신, 그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붙들고 버텨냈다. 최악의 현실조차 '이것쯤은' 하고 넘길 수 있게 만드는, 자신을 지탱하는 힘을 찾아낸 것이다. 탄광에서 노역을 할 때조차 자신은 포로가 아닌 '탄광 개발자' 혹은 '광부'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며 자존감을 지켰다는 대목에서는 깊은 전율을 느꼈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내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찼다. 작가의 생생한 수용 경험담에 공감하며 밑줄을 긋고, 어떤 대목에서는 작가의 말 뒤에 내 생각을 몇 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그것은 마치 시공을 초월한 작가와 나, 둘만의 소리 없는 대화 같았다. 그 기록들은 나만의 독후감상이자, 삶의 의미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지는 나 자신과의 대화 기록이 되었다.


그때부터였다. 머릿속을 맴도는 고민과 불안이 나를 잠식하려 할 때, 나는 자연스럽게 노트북 앞에 앉았다.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손끝에 옮겨 글자로 풀어냈다. 놀랍게도, 글쓰기는 마법과도 같은 힘을 발휘했다. 고민의 꼬리에 꼬리를 물며 나를 괴롭히던 생각들이 글로 정리되면서 점차 명확해졌고, 막연했던 불안은 구체적인 문제의 형태로 드러났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문제의 형태가 드러나자 해결책을 찾으려는 나 자신으로 바뀌어 있었다. 글쓰기는 나를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건져 올려,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는 단단한 도구였다.


나는 그때 깨달았다. 작가란 무엇인가. 작가는 단순히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겪은 시행착오와 고난, 그 속에서 얻은 깨달음과 성찰을 독자들과 나누는 사람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한 편의 글로 옮겨 마침표를 찍고 세상에 내놓는 존재. 독자들에게 미리 '삶의 오답노트'를 작성해주는 존재와 같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시험을 치르기 전 선배들의 오답노트를 참고하여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하듯, 독자들은 작가의 글을 통해 삶이라는 거대한 시험에서 불필요한 오답을 줄이고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는다.


신은 인간에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고난을 준다고들 한다. 하지만 작가는 다르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 독자들이 짊어진 고난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 존재한다. 작가의 글쓰기는 깃털처럼 가벼운 몇 장의 종이 위에 새겨질 뿐이지만, 그 안에 담긴 목소리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아야 한다. 독자의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고, 절망 속에 희망을 심어주며, 삶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묵직한 울림이 있어야 한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내가 느꼈던 강렬한 영감과,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을 마주하고 성장해온 경험은 나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주었다. 나 또한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 깃털처럼 가벼운 종이 위에 글을 쓰겠지만, 그 글에 담긴 목소리는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찾아낸 삶의 이유처럼, 독자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그들의 고난을 덜어주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묵직한 울림을 갖게 하고 싶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삶의 오답노트가 되고, 절망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는 작은 불씨가 되기를 소망하며,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작가의 임무이자, 내가 앞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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