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머신 위에서

68. 오늘이라는 삶은 처음이라 그래. 방황이 내게 남긴 흔적들

by 회색달


한참 바디프로필 촬영 준비하던 시절, 매일 새벽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아직 세상은 어둠 속에 잠겨 있는데,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러닝머신 위에 올라섰다. 그때는 달리기가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나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지쳐 있었지만, 그 속에서 무언가를 바꾸고 싶었다.


러닝머신의 속도는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아무리 빠르게 뛰고 싶어도, 느리게 걷고 싶어도, 그 속도는 변하지 않았다. 고정된 속도계는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답답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묵묵히 거리가 늘어난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엔 0.5km, 1km, 2km... 숫자는 천천히 올라갔다. 그때마다 마음속에 실망과 좌절이 밀려왔다. ‘왜 이렇게 느리지? 남들은 벌써 훨씬 멀리 갔는데...’ 혼자 중얼거렸다. 숨은 가쁘고, 땀은 흐르는데 마음은 멈춰 있었다. 하지만 그 속도계는 변하지 않았다. 내가 아무리 빨리 뛰어도, 속도는 고정.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제자리 같던 걸음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3km, 4km, 그리고 어느새 5km. 스스로 놀랐다. 그동안은 너무 조급했고, 남들과 비교하며 자책만 했던 거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천천히, 꾸준히, 내 속도대로 달리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 거였다.


이 고정된 속도계는 삶과도 닮았다. 하루는 24시간으로 정해져 있고, 1년은 365번 반복된다. 내가 아무리 빨리 성공하고 싶어도, 그 시간이 앞당겨지진 않는다. 실패가 계속 반복된다고 해서 영원히 멈춰 있는 것도 아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된다. 그게 삶이다.


남들과 비교하며 ‘나는 왜 아직 이 모양이지?’ 자책하는 건 아무 의미 없다. 그저 내 페이스를 찾고, 그걸 꾸준히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러닝머신 위에서 속도를 조절하듯, 삶의 속도도 내가 조절할 수 있다. 너무 무리하면 멈추고, 괜찮으면 다시 달리면 된다.


나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으로 훔쳤다. 숨이 가빴지만 그만큼 안도감도 스며들었다. ‘괜찮아, 오늘도 잘 달리고 있어.’ 혼잣말이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됐다.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너도 괜찮아. 지금 이 순간, 네가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라고.


러닝머신 위에서 땀 흘리며 달리는 내 모습은, 어쩌면 삶의 방황과 좌절을 견디는 내 모습과 닮았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멈추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발을 내디뎠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5km를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그해 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하프 코스까지 완주했다.


사실, 나는 예전에도 이런 순간을 많이 겪었다. 고등학교 때 게임에 빠져 전교 꼴찌로 졸업했던 나, 힘든 직장 생활 속에서 우울과 번아웃을 견뎌냈던 나, 차 사고 후 사람들을 구했던 나,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나는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다. 그 반복 속에서 조금씩 성장했다.


삶은 마라톤과도 같다. 단거리처럼 빠르게 달려서 끝나는 게 아니라, 꾸준히 페이스를 유지하며 긴 거리를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페이스는 남들이 정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조절하는 것이다. 너무 빨리 달리면 금방 지치고, 너무 느리면 목표에 닿지 못한다. 그래서 적당한 속도를 찾는 게 중요하다.


러닝머신 위에서 나는 그 속도를 찾았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조금씩 몸이 적응했다. 숨이 차고, 다리가 무거워도 멈추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멈출 수도 있었지만, 나는 조금 더 달렸다. 그리고 그 ‘조금 더’가 쌓여 5km가 됐다.


삶도 그렇다. 하루하루가 쌓여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된다. 그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결국 나를 만든다. 실패해도 괜찮다. 넘어져도 괜찮다. 중요한 건 다시 일어나서 내 속도로 걷는 것이다.


나는 다시 속도를 올렸다. 러닝머신 위에서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고, 숨이 거칠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이게 내 속도구나.’ 그렇게 나는 오늘도 달린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걸으며. 방황이 남긴 흔적들을 안고, 그걸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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