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년도 여름. 진짜, 이만하면 끝인가 싶었다. 모든 게 무너졌다는 말도 지겨울 만큼 다 무너졌다.
결혼은 끝났고, 가족이란 단어는 더 이상 위로가 아니었다.회사에선 그저 그런 사람. 딱히 잘하지도, 눈에 띄지도 않는 투명인간에 가까웠다.
근데도 어딘가에선 계속 살아야 했다.
먹고, 자고, 일하고.사람들은 말했다. “잘 견디고 있네.”속으로는 웃겼다. 살아있는 건 맞는데, 견디고 있는 건지는... 그냥 어제처럼 오늘을 넘기고 있었을 뿐.
그래서 떠났다.계획도 없이, 편도로 제주도행.
그때는 조금이라도 멀어지고 싶었다.다 망가졌다는 말도 지겨워서, 아예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데 가고 싶었다. 법환포는 그런 데였다.
소문난 관광지도 아니고, 늦은 밤에는 고요해서 오히려 숨이 트이던 곳.
내가 머물렀던 숙소는 묵을 이유도, 딱히 떠날 이유도 없었다. 나무 냄새 나는 방, 틈새로 새는 바람,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낮에는 바다를 멍하니 봤다. 사람들이 물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저기까지 가볼까' 싶었던 어느 날, 스쿠버 다이빙을 하게 됐다.
처음엔 숨을 제대로 못 쉬었다. 숨이 막히고, 공포가 밀려왔다.강사가 말했다.
그 말이 웃기게도, 내 삶 전체에 꽂혔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천천히 숨 쉰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늘 어딘가에 쫓기듯 살았고,
그게 익숙하니까 그게 사는 건 줄 알았다.
그때부터 좀 바뀌었다. 제주에서 보낸 보름 동안
나는 별거 안 했다. 밥 먹고, 바다 보고, 그냥 시간 흘려보냈다. 이상하게도 그게 좋았다.
뭔가 회복된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너지진 않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술을 끊었다. 버릇처럼 마시던 걸 끊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밤이 되면 아직도 뭔가 허전하긴 했다. 그래도 새벽엔 일찍 일어났고, 운동을 조금씩 했고, 돈도 아껴가며 모았다.
누구 보여주려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내가 나한테 부끄럽기 싫었다.
다시 제주에 갔을 땐, 그 숙소가 그대로 있어서 좋았다. 골목도, 바람도, 파도 소리도.
그 사이에서 나만 좀 달라진 느낌.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같은 바다 앞에 서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노을.법환포의 석양은 말이 없다.
천천히 붉어지고, 그 위로 바람이 스친다.
그걸 보고 있으면, 나도 조용히 물들고 싶어진다.
요란하게 살아온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걸 견디며 살았을까 싶고. 노을 앞에선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을을 보면서 다짐 같은 걸 했다.크게 외치진 않고, 그냥 속으로.“조금 천천히 살아보자.
무너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 만큼만 버텨보자.”
요즘은 그게 내 다짐이다.
누구한테 잘 보이려는 것도 아니고,
거창한 꿈도 아니고. 그냥 오늘 하루를 잘 넘기자는 마음.
누군가에겐 이 모든 게 사치일 수 있다. 하지만 나한텐,이 조용한 곳에서 내가 나로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다시 느끼는 게 가장 큰 사치다.
이젠 제주를 떠올리면 노을이 먼저 생각난다.
그 석양 아래서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앉아 있었는지.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든 것 같아서,
괜찮다고, 여기까지 잘 왔다고 조용히 토닥인다.
오늘도 그렇게, 내 하루를 노을처럼 조용히
물들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