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기억은 항상 사소한 데서 시작된다]

by 회색달

신호는 아직 바뀌지 않았다.


노래는 끝났는데

귀에 끈적하게 붙어 있었다.


한참을 걸었고,

이젠 좀 괜찮겠지 싶었다.


아니,

그런 척하고 있었던 거다.


횡단보도 앞이었다.

파란불을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

그 얼굴이

박혀 있었다.


분명히,

너였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기억에서 지웠다고 생각했는데

그 표정 하나, 하나가

내 속을 쑤셨다.


변한 것도 있었고,

하필 그대로인 것도 있었다.


잠깐사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반가운 건지,

놀란 건지,

아니면 그냥

이 순간이 싫었던 건지.


너는 그의 옆에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그의 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는 널 한눈에 알아봤다.


그런데 너는

이쪽 인파 속 나를 보지 못한 얼굴이었다.

아니,

모른 척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상하게 익숙했다.

슬프다기보다

그냥,

예상했던 장면 같았다.


서로 다른 쪽에서

같은 신호를 기다리다


꼼짝도 하지 않는 신호 때문에

몇 초, 아니 몇 년쯤 들어와 앉은 느낌이었다.


신호가 바뀌었지만

아무 일 없던 척하면서

그냥

조금 오래서 있었다.


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를 따라 걸었다.


너는 지나갔고,

나는 조금 늦게

뒤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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