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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속도로 시작하는 하루

by 회색달


여섯시 십분. 스마트폰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찬물 한 컵을 마신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몸과 정신이 스르륵 예열되는 기분이 든다. 그 기분 그대로 식탁으로 가서, 어제 읽다 덮은 책을 다시 펼친다. 딱 10분. 짧은 시간이지만, 한 꼭지의 글을 읽는 동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낯선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책을 덮고 나면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아침 일기를 쓴다. 별다른 내용은 없다. 서론, 본론, 결론을 나누고 마지막에 메시지 한 줄을 남기는 정도. 그런데도 운이 좋아서 글이 술술 써지는 날엔 20분 만에 1000자 가까이 쓰기도 한다. 그런 날은, 아침부터 작지만 확실한 성취감이 마음에 차오른다. 눈 뜨자마자 작은 성공을 맛보는 기분.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하루의 시작이 있을까 싶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며 말한다. “그 바쁜 아침 시간에 무슨 여유야?” “시간 낭비 아니야?”

그 말도 이해는 간다. 나도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몇 분이 없으면 하루가 휘청인다. 마음이 흔들릴 때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도 이 루틴이다. 루틴이 무너지면, 하루 전체가 어딘가 어긋난 채 흘러가곤 했다.


행복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성과가 중요하고, 또 누군가는 관계나 소속이 중심일 수 있다. 나는 내 삶의 기준을 ‘나만의 속도’에 두기로 했다. 세상이 정해놓은 시간표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기보다는, 나에게 맞는 호흡으로 살아가고 싶었다. 그래야 덜 흔들리고, 덜 지치고, 덜 후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에 한센병 환자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몸은 많이 불편했지만, 그들은 하루를 정말 정성스럽게 살아내고 있었다. 세상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가진 것에 감사하며 조용히 웃는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분들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행복은 남들과의 비교가 아니라, 내가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빠르게 뭔가를 이루기보단, 매일 조금씩 나를 살피고 다듬으며 사는 삶. 때로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내가 나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같은 방식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찬물 한 잔, 책 한 장, 글 한 문단. 별것 없어 보이지만, 이 작은 흐름이 나를 지켜주는 울타리다. 이 시간을 지키지 못한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쫓기는 느낌이 든다. 반대로, 이 시간을 지키면 어떤 일이 생겨도 중심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마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런 나만의 기준이 있다는 게,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사람마다 기준은 다를 수 있다. 어떤 이는 바쁘게 움직여야 살아 있다고 느끼고, 멈추면 불안하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다르다. 조금은 느리게, 조금은 조용하게, 나 스스로의 호흡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방식이 나에게는 더 잘 맞는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생각하고, 회복하고, 다시 다짐한다. 그게 바로 나에게 주어진 행복의 형태다.


행복은 거창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20분이, 나에게는 하루 전체를 바꿔놓는 소중한 시간이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건 언제나 거대한 사건보다는, 이런 작고 조용한 습관 하나일 때가 많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나만의 속도로 하루를 연다.

그 몇 분의 시간이, 나를 다시 나로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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