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휘어지는 자리
며칠 동안 내린 비의 잔상 때문일까.
아직 마르지 않은 아스팔트 내음과
흙냄새가 섞여 코끝에 맴도는데,
건너편 건물의 유리창에 비친 하루가
빨간 페인트처럼 흘러내린다.
몇 초의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찰나,
앞선 아저씨의 휴대폰 액정은 환하고
저만치 멈춰 선 차 안 운전자는 멍하니 빌딩 사이 하늘만 본다.
빛바랜 신호등 초록불을 기다리는데,
떠나지 못하고
꾸역꾸역 눌러 담았던 감정들이
해 저물듯 저벅저벅 걸어 나와
내 그림자 뒤에 숨어 서성이는 것 같아.
삐빅- 거리는 신호음 사이로 낯선 웃음소리,
달리는 버스 소음,
그 모든 시끄러움 뚫고 문득,
‘아, 오늘 하루 잘 버텼다.’
멍하니 혼잣말이 터져 버리는 노을 짙은 오늘의 선물.
참, 이 모든 순간이 괜찮지 않은데
너무 괜찮은 것 같은 묘한 기분.
그렇게 붉게 물든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다시 나를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