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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초보, 인생초보, 그래도 나아간다

by 회색달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나는 공부보다 교실 밖에 관심이 많았다. 아버지는 그런 나를 잘 알고 계셨다. 덕분에 생일이 지나자마자 아버지를 졸라 운전 학원에 등록할 수 있었고, 결국 반에서 가장 먼저 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교실에서의 나는 여전히 작아졌다. 특히 숫자 앞에 서기만 하면 어김없이 위축됐다. 야간 자율학습 시간이었다. 평소 같으면 이미 학교 후문 앞 분식집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어림없었다. 교실 문 앞에서 팔짱까지 끼고 앉아 있는 담임선생님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마지못해 자리에 앉아 수학 문제집을 폈다.


문제의 정답을 찾기보다는 숫자 사이를 헤매는 기분이었다. 나는 결국 짝꿍에게 시험에 나올 내용을 부탁했다.

“이거 몇 문제 풀이만 보고 외워봐. 이번 시험에 나온다고 했어.”

파란색과 검정색 펜으로 번갈아 가며 정리된 공식과 해설을 따라 읽었다. 오늘은 이렇게라도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남들을 따라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으며 고2 겨울을 견뎠다.

시험날 당일에는 거짓말처럼 짝꿍이 정리해놓은 내용에서 몇 문제가 그대로 출제됐다. 덕분에 나는 당황하지 않고 OMR카드에 답을 자신있게 마킹할 수 있었다. 이 순간만큼은 뿌듯했다. 한 칸 한 칸 채워진 답안지를 보며 안도와 쾌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 보니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점수가 조금 올랐을 뿐 시험이 끝나자마자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졌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숫자는 외계 언어 같았고, 기호로 이루어진 공식은 보기만 해도 숨이 턱하고 막혔다. 무엇보다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피했다’라는 사실이 지금은 부끄럽기까지 했다.

시간이 흘러 이공계 계열의 대학에 진학했을 때, 중학교 수준의 미적분조차 해결하지 못해 시험을 망친 적이 있었다.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어찌 보면 이공계를 선택한 것 자체가 실수였을지도.


하지만 다음 학기에 전공과목 중 하나인 ‘공학 이론 2’의 시험 문제를 거의 다 맞혔다. 주변에서는 한 학기 만에 오른 내 성적의 비결을 궁금해했다. 비결은 중고서점에서 중학교 교과서를 구해서 처음부터 다시 공부한 덕분이다. ‘대학생이 중학교 문제를 다시 푼다고?’

맞다. 문제 해결의 공식을 이해하지 못하니, 해결 방법은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뿐이었다. 20년이 훨씬 지난 지금, 그때의 성적표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나는 안다. 초보를 탈출하는 방법은 무조건 다시 배우고 연습을 반복하는 것뿐이라는 걸을. 단순하지만 완벽한 진리였다.


그 생각을 하면, 처음 운전면허에 합격했을 때가 떠오른다. 면허를 따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간만큼의 기능 연수를 받고,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운전대에 앉아 브레이크, 가속페달, 룸미러를 조절하고, 키를 돌려 시동을 거는 모든 과정을 반복해 몸에 익혔다. 2종 면허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내가 선택한 건 1종이었다. 하나를 더 배워야 했다. 바로 클러치다.

이 클러치가 문제였다. 발을 빨리 떼는 바람에 시동을 자주 꺼뜨렸고, 그때마다 옆에 앉은 강사에게 “죄송합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처음엔 다그래요. 적응하면 괜찮아집니다.”


강사는 웃고 있었지만, 나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먼저 출발한 사람보다 자꾸만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뒤따라오는 차량이 신경 쓰여 미안했고, 창피하기까지 했다. 초보를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반복’뿐이다. 결국, 몸이 익숙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연습하는 수밖에 없었다. 클러치에서 발을 떼는 타이밍, 핸들을 돌리는 각도까지 하나 되짚으며 연습을 반복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덜컥거림이 사라졌고 손과 발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시동을 한번 꺼뜨리지 않고 시험에 무사히 합격할 수 있었다.


어떤 일에 서툰 사람을 두고 우리는 ‘초보’라고 부른다. 수학 초보, 운전 초보처럼 우리는 매일 새로운 하루를 보내고 있으니 어쩌면 모두가 ‘인생 초보’다. 시간 관리, 인간관계,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앞서나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성공한 사람’이라 부른다. 그들의 실수담은 오히려 성공을 향해가는 하나의 계단으로 인정받는다.

반면 초보의 실수는 당연한 과정이다. 연습만이 살길이다. 필요하다면 중학교 수학 문제집을 들여다봐야 하고, 남들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연습을 해야한다.


사람들은 성공을 원하면서 실수와 실패는 인정하지 않는다. 흔히 그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은가. 교차로 신호에서 대기 중인 고가의 외제 차가 출발할 때와 작은 승용차가 출발할 때, 신호가 바뀐 후 뒷사람들의 반응을.

처음으로 책을 제대로 읽어보자고 마음먹은 건, 2017년도의 여름이었다. 무언가에 빠져 있지 않으면 삶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었고, 가족도, 직장에서도, 내 삶까지 전부 흔들리던 때였다. 차라리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가고 싶었다. 중독이 그만큼 위험하다. 극단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내가 나를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때 중독 치료센터에서 권한 방법이 독서였다. 처음엔 문장 하나를 이해하는 데도 한참 걸렸다. 두 번 세 번 읽었고, 조금 읽다 보면 소주 한 잔이 떠올랐다.

‘이걸 내가 왜 하고 있는 거지?’ 자괴감이 밀려온 날도 많았다. 책 몇 권 읽는다고 인생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책 사라고 돈을 보태준 적도 없었다. 월급 대부분을 서점에서 책을 사는 데 썼다. 한가지는 분명했다. 책을 읽는 동안 술을 마시는 시간과 돈은 확실히 줄었다는 것.


몇 달쯤 지나고 나서야, 나는 ‘독서 초보’ 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걸 깨달았다.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생 초보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서 해결해야 할 일은 읽는 연습이었다. 퇴근 후에는 곧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자격증 공부에 열을 올리던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쉬지 않고 책장을 넘겼다. 그런 내게 전환점을 마련해 준 책이『어린 왕자』다. 어린아이나 읽는 동화라고 생각했던 몇 페이지에서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삶의 방향을 찾게 됐다. 특히 이야기 속 여우와 어린 왕자의 ‘길들이기’라는 대화는 지금까지의 낡은, 내 관계를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됐다.


“무언가를 길들이지 않고서는 그것을 잘 알 수가 없지. 사람들은 새로운 것을 배울 시간조차 없어. 그들은 상점에서 이미 만들어져 있는 것들을 사거든. 그런데 친구를 사는 상점은 없어서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거야. 친구를 가지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줘.” 『어린 왕자』
길들인다는 의미는 ‘서로가 익숙해지는 과정’이다. 한쪽이 다른 한쪽에게 강요하고 일방적으로 따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그동안 겪었던 갈등과 이혼, 직장에서의 고단함까지. 내가 중독에 빠지게 된 원인은 ‘내가 제대로 길들이지 못한 관계’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또한, 내가 길드는 과정은 ‘진정한 나’를 잃고 있었다는 것도. 이후로 나는 스마트폰의 SNS 모든 계정을 삭제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일상에 ‘좋아요’를 누르며 정작 ‘나’라는 존재를 잃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네이버 블로그 하나를 만들어 비공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댓글 하나 없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 고민을 정리하며 오늘을 연습하는 공간이었다. 경험이 쌓이면 더는 왕초보를 탈출할 수 있다. 쓰기 위해서는 생각해야 했고, 생각은 결국 삶을 바꾸는 동력이 됐다.


과거의 나는 클러치에서 발을 떼는 데 익숙하지 않아 시동을 반복해 꺼뜨렸고, 중학교 수학 교과서를 외우는 심정으로 다시 배워야했다. 책 한 권을 끝까지 읽지 못해 한 달 동안 꾸역꾸역 읽은 때도 있었고, 일기에 쓸 내용을 찾아 종일 고민하며 머릿속을 헤맨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매번 결론은 하나였다.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 또 반복할 것.


중독을 이겨내는 방법도, 인생 초보 탈출 비법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제의 결론보다 내일을 위한 결심을 세우고, 지난 후회보다 앞으로 다짐하는 데에 노력 중이다. 그 과정은 몇 년의 일기에 고스란히 남았고, 점점 늘어가는 글의 양만큼 내 삶 또한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아침 나는 누구이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함으로써, 매일의 작은 실수가 더 실패가 아닌 연습처럼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더 깊은 익숙함을 위해선 무한한 반복이 필요할 것이다. 반복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그 시간을 견디는 동안 나는 잃어버렸던 ‘나’를 조금 더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내 중독관리 비법이었고, 인생 초보 탈출 비법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도 매일 쓴다. 아무 의미 없는 문장이라도 괜찮다. 어제보다 한 단계 나아진 나라면 충분하니까.

초보 딱지는 하루아침에 떨어뜨릴 수 없다. 그러나 매일의 반복은 조금씩 나를 성장시킬 수 있다. 내일은 한층 더 단단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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