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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고양이

익숙함 속에서 낯설게 바라보기: 글감과 친해지는 길

by 회색달

아침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간. 눈 뜨자마자 숙소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서귀포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고, 그 위로 햇살이 쏟아졌다. 이전 제주 방문들은 달랐다. 늘 많은 것을 보려 욕심냈다. 하루 이틀 머물다 다른 지역, 다른 숙소로 옮겨 다녔다. 스마트폰으로 유명 관광지를 찾았고, 맛집 인증 사진 찍는 데 시간을 썼다.


이번만큼은 달랐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규칙은 하나. ‘일주일 동안 한 숙소에만 머무르자.’ 주변에서는 의아해할 만한 선택이었다. 지루할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나조차 이곳에서 무얼 얻을지는 확신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한번 쯤은 해보고 싶었다. 체크인을 도와주던 스태프가 물었다. “일주일이요? 보통 손님들은 바쁘게 다니시는데, 심심하진 않으시겠어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심심함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그 안에서 무언가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만 좇던 내게, 잠시 멈춤이 필요했다. 강제로라도 쉼표를 찍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첫날, 예상대로 심심했다. 스마트폰만 들여다봤다. 이러다간 안 될 것 같아 숙소 앞 바다로 나섰지만, 어제 도착하며 이미 본 풍경. 탁 트인 바다는 시원했지만, 특별한 건 없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천장을 보며 누웠지만, 딱히 할 일은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시간에 익숙해질 무렵, 나는 다시 숙소를 나섰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났다. 걷다 보니 길가의 돌담이 보였다. 어제 무심히 지나쳤던 그 길. 흔하디흔한 제주의 돌담이었다. 하지만 멈춰 서서 보니,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결들이 드러났다. 검은 화산석 사이로 오랜 시간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낮은 돌담에도 자신만의 색이 있었다. 햇빛 각도에 따라 검은 돌에서 푸른빛이 감돌기도 했다. 분명 이전에 봤던 돌담과 같은 곳이지만, 지금만큼은 달랐다. 익숙함 속에 감춰진 새로움이었다.


마을 한 바퀴를 돌고 숙소 대문 앞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회색빛 그림자를 만났다. 왼쪽 귀가 살짝 접힌 길고양이. 녀석은 한쪽에 앉아 주위를 살폈다. 조용히 다가가니, 나를 한번 보더니 이내 돌담 사이로 사라졌다. 빠른 몸놀림이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잊히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고양이를 반대편 골목에서 다시 마주쳤다. 이번엔 좀 더 가까이 있었다. 녀석은 나를 봐도 도망가지 않았다. 조용히 눈을 깜박이며 인사를 건넸다. 고양이의 대답은 없었다. 나를 힐끗 보고는 자리를 털고 앉아 햇볕을 쬐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모습이, 마치 ‘너도 좀 쉬어 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녀석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고 앉아 한참을 함께 햇볕을 쬐었다. 일주일 내내 내가 한 일이라고는, 매일 이 고양이를 찾는 일에서부터 시작했다. 무언의 시간. 그럼에도 일상에 작은 리듬이 더해졌다.


숙소 스태프와도 자주 마주쳤다. 처음에는 인사만 하던 사이였지만,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물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졌다. “오늘도 산책 가세요?”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넸다. “네. 특별한 건 없는데, 매일의 마을 표정이 다르네요.” 나의 작은 발견을 담담하게 전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주 매력이죠. 다른 곳도 그럴 겁니다. 같은 길을 걸어도 매일 다르고, 또 걸을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하게 되니까요.” 그녀의 말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같은 풍경을 봐도 매번 다르게 느낄 수 있다는 것. 제주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삶의 방식에 대한 통찰이기도 했다.


한번은 비가 왔다. 제주 특유의 스콜성 소나기.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밖은 어제와 다른 세상이었다.

돌담에 비가 스며들자 색이 더 깊어졌다. 젖은 흙 같은 진한 검은색이 됐다. 돌 구멍에 고인 빗방울은 구슬처럼 투명했고,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도 일정했다. 창문 바로 밑 유채꽃잎에도 빗방울이 고여 있었다. 바람에 꽃잎이 흔들릴 때마다 물방울이 떨어지며 반짝였다.

그 촉촉한 풍경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순간, 사진으로 남길까 했지만, 이내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굳이 '기록'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 자리에서 온전히 보고 느끼는 것이 더 중요했다. 내 눈과 마음에 담는 것으로 충분했다.


소나기가 그친 조용한 골목을 걷고 있을 때였다. 돌담에 기대 쉬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해녀 복장이었다. 온화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 “네 안녕하세요. 여행 왔어요?” “네. 저 숙소에서 며칠 머물고 있습니다.” 나의 계획을 짧게 말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네. 다들 뭐 그리 바쁘게 다니는지. 천천히 둘러 봐요” 나의 작은 시도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같았다. 어쩌면 내가 처음부터 찾던 답이 며칠째 머물렀던 숙소, 걸었던 골목길과 할머니의 한마디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주간의 시간이 그렇게 흘렀다. 처음엔 밋밋했던 모든 풍경이 거짓말처럼 다르게 보였다. 길모퉁이의 소박한 간판이 친근했다. 오래되어 녹슬고 기울어져 반쯤 열려 있는 대문도 정겨웠다. 모든 것이 살아있는 듯했다.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는 기쁨을 깨달았다. 마지막 날, 숙소를 나섰다. 스태프가 물었다. “한 주 동안 지루하지는 않으셨어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오히려 하루하루가 달랐습니다.” 다들 더 화려한 걸 보러 떠나지만, 한자리에 오래 머무는 것이 때론 더 깊은 재미를 준다는 걸 이번 여행에서 비로소 느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생각했다. 나는 새로움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늘 새로운 풍경과 경험만을 쫓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깊이 들여다보고 한곳에 머무는 것에 내가 서툴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번 여행은 '이미 아는 것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연습' 같았다. 같은 숙소, 같은 골목, 같은 고양이와 돌담. 자세히 보니 어제와 오늘이 달랐다. 모든 순간이 새로운 발견이었다.

알던 것을 깊이 알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그 발견이 여행의 기쁨일 수도 있고, 나아가 삶의 기쁨일 수도 있다. 찰나에도 영원을 담는 힘. 이 깨달음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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