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 속에서 낯설게 바라보기: 글감과 친해지는 길
글쓰기를 배우겠다고 시간과 돈을 꽤 썼다. 수십, 어쩌면 수백만 원. 강의니 수업이니,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런데도 아직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 없다. 가끔은 이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엉뚱한 길을 걷는 건 아닌지 불안할 때도 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이 일 말고는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계속 쓰기를 반복하다 보니 SNS에는 수백 편의 글이 비공개로 남아 있고, 공저 작업과 A출판사의 월간 시리즈에는 내 이름 대신 필명이 몇 달째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 년을 보내다 보니 글도, 시간도, 마음도 조금씩 쌓여갔다. 그 과정을 지나며 하나는 분명해졌다. 쓰는 일은 어쩌면 살아내는 일과 같다는 것.
그래서 나는 오늘도, 숨 쉬듯 쓰고 있다.
글쓰기 초보일수록 가장 먼저 부딪히는 건 ‘무엇에 관해 써야 할지’ 막막하다는 벽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일을 글로 옮기는 건 쉽지 않다. 읽지도 않은 책, 듣지도 않은 강연을 대충 옮기는 식으로는 마음을 움직이는 글이 나올 수 없다. 누군가 “그 글이 좋았다”는 말을 들었다면, 거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작가가 글감을 어떻게 찾았는지, 무엇을 보고 어떤 메시지를 던졌는지 스스로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좋은 글감은 멀리 있지 않다. 오히려 가까운 곳에 있다. 매일 마주하는 물건, 사람, 대화, 풍경 중에서 마음에 남는 것을 붙잡으면 된다. 글쓰기는 거창한 작업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나만의 체취를 남기는 일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이야기라도 독자와 완전히 동떨어져 있지만 않는다면 공감은 저절로 만들어진다.
이 과정을 주식 투자에 비유해볼 수 있다. 투자 초보가 낯선 분야의 인기 종목부터 사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 익숙한 기업부터 공부하고 천천히 시작한다. 글감 찾기도 똑같다. 낯선 주제에 매달리기보다 익숙한 일상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 내가 자주 마주하는 것, 잘 아는 것, 쉽게 마음이 움직이는 곳에서 관찰을 시작하는 것. 그게 첫걸음이다.
글감 찾기는 좋은 종목을 고르는 것과 닮았다. 익숙한 곳에서 시작해 눈을 열어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과정이다. 어제와 똑같이 본 풍경도 마음을 달리하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좋은 글은 이런 ‘낯선 시선’과 꾸준한 관찰에서 나온다.
초보 작가라면 거창한 것보다 익숙한 것에서 출발하는 게 가장 안전하고 효과적이다. 진솔함은 기술보다 강하다. 독자들은 현란한 표현보다 마음이 담긴 문장을 더 오래 기억한다. 글감을 고를 때도 ‘투자자’처럼 차분히 바라보고, 시간을 들여 살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는 주변에서 몇몇 작가들을 본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만의 언어로 글을 쓴다. 대단한 기교 때문이 아니라, 자기 삶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삶이 곧 특별함이 된다.
P 작가가 그렇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아이들과 지내는 일상을 글로 옮겼다. 활자 중독이라 불릴 만큼 책을 좋아했고, 사서 자격증까지 땄다.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꾸준히 기록했다. 그 글은 어느새 에세이가 되고, 공저가 되고, 결국 다른 작가들을 길러내는 밑거름이 됐다. 시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이었다.
E 작가는 다섯십에 허리 디스크와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변화가 필요했다. 딸과 함께 산책하듯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게 수년째 이어졌다. 몸이 달라지고 마음이 단단해지면서 마라톤 풀코스까지 완주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책으로 엮었다. 독자들은 그 책을 읽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한 사람의 변화가 누군가의 시작이 된 것이다.
또 어떤 작가는 딸의 아픔을 글로 남겼고,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암 투병기를 써내려갔다. 거창하지 않은 일상의 이야기들이 책이 되고,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글이란 특별한 소재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나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많은 사람이 글감을 찾지 못해 헤맨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를 빌리거나,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옮기곤 한다. 하지만 그런 글은 생명력이 짧다. 마음이 담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기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서도 작고 진한 감정은 늘 피어난다. 글감은 거기 있다.
주식 초보가 익숙한 기업부터 공부하듯, 글쓰기도 익숙한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오늘 본 풍경, 들은 말, 스쳐간 감정 하나라도 차분히 붙잡아 보는 것. 마음이 닫혀 있을 땐 글도 막히지만, 마음을 열면 사소한 순간도 좋은 글감이 된다. 낯설게 보는 연습을 하면, 평범했던 하루도 새로운 이야기로 변한다.
내 이야기를, 내 삶의 조각을 글로 쓰는 것. 그것이 가장 강력한 글감이다. 독자는 완벽한 문장을 원하는 게 아니라, 진짜 이야기를 찾는다. 글감은 멀리 있지 않다. 멋진 사건이나 특별한 경험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이미 내 안에, 내 주변에 있다. 그 속의 작은 이야기에 눈을 뜨고 마음을 열면 된다. 거기서부터 나만의 문장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