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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바람길

익숙함 속에서 낯설게 바라보기: 글감과 친해지는 길

by 회색달


한 참 제주도를 찾은 해가 있었다. 봄과 여름, 가을까지 한 달에 한 번은 꼬박 다녀왔다. 제주도의 시골길, 내 키보다 낮은 돌담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멀리서 보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엉성하게 쌓인 돌들이, 가까이 가보면 묘하게 단단했다.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라 제멋대로 놓인 것 같지만, 그 돌들 사이에는 바람이 지나갈 수 있는 틈이 있다. 그 틈이 바로 돌담을 지탱하는 비밀이다.


사람들은 흔히 바람이 세면 돌담이 무너질 거라 생각하지만, 정작 제주 돌담은 바람이 세서 무너지지 않는다. 바람을 막지 않고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바람은 틈 사이로 빠져나가고, 돌담은 그 자리에 남는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뒤통수를 한대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엉성함이 강함으로, 허술함이 오히려 견고함을 낳는다는 결과에 지금껏 실수하지 않으려고, 매사에 완벽하게 보이려고만 했던 나와 비교됐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 문득 깨달았다. 글도, 사람도, 그 돌담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실수를 두려워한다. 잘못된 문장, 빗나간 판단, 어색한 표현이 나올까 봐 몸을 움츠린다. 하루를 계획대로 보내지 못하면 자신을 탓하고, 한 줄의 문장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글을 버린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삶을, 그리고 글을 숨 막히게 만든다.

하지만 돌담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다. 그 엉성함이 없었다면 바람은 막혔을 것이고, 결국 돌담은 바람에 부서졌을 것이다. 실수는 허점이 아니라 통로다. 그 통로가 있을 때 우리는 넘어지지 않는다.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장의 틈, 생각의 빈자리가 있어야 글이 숨을 쉰다. 단어 하나하나를 틀리지 않게 맞추려 애쓰기보다, 엉성하더라도 자신이 느낀 바람의 방향을 따라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순간 글은 비로소 살아난다.

글감을 찾을 때도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완벽한 주제’나 ‘멋진 문장’을 먼저 떠올리려 한다. 하지만 글감은 그런 계산된 계획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실패의 순간, 뜻대로 되지 않은 날, 실수로 놓친 말 한마디 속에 숨어 있다. 그때 느낀 부끄러움, 후회, 혹은 민망함을 정직하게 꺼내놓을 때, 거기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실수를 외면하지 말고, 그 안에서 ‘왜 그랬을까’ ‘무엇을 배웠을까’를 물어보면 된다. 그 질문 하나가 바로 글감의 씨앗이 된다.


실수를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무심코 흘린 말, 하지 말았어야 했던 행동, 미완성의 문장까지 브런치 스토리의 서랍에 남겨 둔다. 감정과 생각을 솔직히 적어놓으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된다. 그게 글감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글은 결국 ‘잘 쓴 문장’을 쫓는 일이 아니라, ‘기억과 마음을 다시 꺼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수를 글감으로 삼는다는 건, 자신을 끊임없이 새로 발견하는 과정이다. 오늘의 실수는 내일의 문장이 된다.
완벽하지 않은 하루가 쌓여 결국 나만의 언어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실수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바람이 돌담의 틈을 통과하며 길을 만들 듯, 실수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통과하며 새로운 시선을 만든다.

결국 글을 쓴다는 건, 완벽한 벽을 쌓는 일이 아니라 바람이 드나드는 틈을 내는 일이다. 그 틈이 있을 때 우리는 진짜로 살아 있는 글을 만난다.


삶도 글도 결국은 그렇게 흘러야 한다. 제주의 돌담이 세찬 바람을 견디듯, 우리도 실수를 통과하며 더 단단해진다. 바람이 없으면 돌담은 무너지고, 실수가 없으면 사람은 닫힌다. 돌담의 틈이 바람길을 만들 듯, 우리의 실수도 삶의 바람길이 되어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글에도, 마음에도 바람이 드나들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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