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부딪히며 지나온 것들. 파도는 늘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있었다.
11월의 어느 오후,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알림 창에 뜬 숫자는 17,500원.매달 정산 알림은 늘 ‘0원’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당장 무엇을 바란 적은 없으니, 실망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화면에 찍힌 적은 금액이
유난히 와닿았다.
아마 흩어져 있던 시간들이 아주 미세하게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탓이었을 것이다.숫자가 0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늘 그 이상이다. 처음이면 더 그렇다.
작년 9월부터 몇 권의 공저 작업에 참여했다.여러 작가와 서로 다른 문장을 한 권에 묶는 일이다. 겉 보기엔 멋있지만, 실제 과정은 비교적 단순했다.
출근길에 스친 장면을 메모하고, 점심시간엔 그 장면을 문장으로 바꿨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
글감이라기보다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운 움직임을 기록하는 과정이었다. 언젠가 한 줄이라도 될까 싶어 모아둔 조각 같은.
초고는 새벽에 읽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고요한 시간이라, 내 글의 빈틈이 선명한 이유에서였다.
걸리는 문장은 마치 한글 맞춤법 검색기처럼 바로 드러났고, 단어 하나에 오래 머물렀다.
틀린 말은 없다고 믿고 있었지만, 맞지 않는 문장은 분명히 있었다. 나에게 그걸 골라내는 감각이 조금씩 생기는 중이었다.
출판사가 보내오는 파일 이름은 늘 비슷했다.
‘rev3_final’, ‘final진짜’, ‘진짜최종’. 파일을 열면 늘 빨간 주석이 보였다. 그땐 왜 이런 문장을 썼는지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 많았다. 그럴 때면 파일을 닫고 집 밖으로 나와 걸었다. 잠시 길가의 의자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문장을 읽다 보면, 막혀 있던 문장은 어느 순간 길을 찾았다.
공저 작업은 리듬이 일정하지 않았다.
서로의 톤을 맞추다 보면 하루가 어느새 지워졌다. 의견이 늘어지는 날엔 톡방이 미세하게 들떠 보였다. 그럴수록 나는, 서랍에서 노트를 꺼냈다. 문장 흐름을 손으로 직접 그리면 결론이 조금이라도 빨리 끝날까 해서였다.
결국 쓰는 일은 결국 정리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문서 하단에 날짜를 적어두는 습관이 있다.
어느 시점부터 적힌 날이 조금씩 많아졌다.
성장은 조용하다. 먼지처럼 쌓인다. 모으는 사람만 그 변화를 안다. 이번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아주 느리고, 아주 작은 성취. 하지만 분명 반복될 수 있는 종류의.
책상 위 노트를 펼쳤다. 오늘 날짜를 적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 미세한 움직임이 오늘은 꽤 괜찮았다. 글을 쓰는 일도, 책을 만드는 일도, 결국 그런 식으로 조금씩 밝아지는 것 같았다.
창문밖이 소란스럽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아침 해가 들어왔다.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지만,
앞으로 쌓일 페이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오늘은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작은 성취는 생각보다 진한 향기를 남긴다.
그리고 방향을 정해준다. 이번 달 역시, 그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노트를 덮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천천히, 그러나 분명한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