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라는 착각

54. 부딪히며 지나온 것들. 파도는 늘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있었다.

by 회색달
어른이라고 해봐야
실패 앞에서는
늘 어린아이 일 뿐이다.

어른이 되면 실패도, 막막함도 덜 무서울 줄 알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잖아.'


그런데 여전히 겁부터 났다. 눈앞에 벽이 나타나면 오래 바라봤다. 높고, 빈틈이 보이지 않는 장애물 앞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멀찍이 떨어져서는 혼자서만 커다랗게 만들었다.

가보지 않았을 뿐인데, 자세히 보지 않았을 뿐인데.

막연함은 늘 멀리서 커져갔다. 실패도 그랬다.


사실 어떤 장애물은 두려워하기만 해서 더 커 보였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벽처럼 느껴졌지만, 막상 가까이 가보면 생각보다 낮을 때도 있었고 의외로 쉽게 부서질 날도 많았다. 마치 손으로 눌러보면 스티로폼처럼 쉽게 꺼지는 것처럼. 그제야 알게 됐다. 내가 두려웠던 건, 벽이 아니라, 상상 속의 무게였다는 걸.


어른이라고 해서 실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아이의 실패는 주저앉히게 한다면 어른의 실패는 지나는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태도가 된다. 그 차이가 실패를 이용하는 키가 된다.

지금은 넘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는 사이 내 키가 먼저 자라 있을지도 모른다. 그땐 같은 벽이 아무렇지 않게 발밑으로 지나갈 수도 있다.


굳이 맞서 싸우지 말고, 나지 않은 척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다만 멈추지만 말자. 서 있지 말고, 천천히라도 앞으로 가보자. 벽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나는 계속 자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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