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부딪히며 지나온 것들. 파도는 늘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있었다
자신의 역사가 없으면
그건 쓸모없는 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아직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회색달
스무 살 때 나는 별생각이 없었다. 대학만 졸업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다음은 직장이었고,
직장에 가면 삶이 남들처럼 흘러갈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믿었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그냥 그랬다. 다들 그렇게 말했으니까.
막상 지나고 보니 하나를 넘기면 다음이 나왔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는 말은 계속 이어졌고
끝이라고 생각했던 도착 지점은 항상 조금 더 멀리 있었다.
가고 있긴 한데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는 잘 몰랐다.
이쯤이면 된 것 같은데 아직은 아니라는 느낌만 남았다. 지쳤다는 말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몸이 먼저 알았다.
그런데도 주말이 되면 집에 오래 있지 못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고, 그냥 가방을 챙겨서 나갔다.
멀리 갈 생각도 없었다. 집에만 안 있으면 됐다.
떠났다가 돌아오고 다시 일하고 또 며칠 버티고
그러다 또 나갔다. 여행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은 숨 좀 돌리는 응급처치 수준이었다.
이대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장소만 잠깐 바꿔두는 느낌으로.
서른 살에 이혼을 했다. 이유를 정확히 말하긴 어렵다. 이혼을 해서 떠나지 못하게 된 건지
떠나지 못하던 상태가 그 선택으로 이어진 건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지금 와서 순서가 뭐가 중요하겠냐만, 확실한 건 그 무렵 나는 더 이상 떠날 수 없었다는 거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고, 가고 싶다는 생각도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본능처럼 하던 일이 그때는 멈췄다. 그냥 하루를 넘겼다. 다음 날도 넘겼다.
특별한 건 없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그 시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표현으로 하면
마음이 완전히 바닥난 상태였던 것 같다.
그런데도 시간은 갔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 던 10년이 지나 있었다. 그동안 나는 거의 일만 했다. 왜 그렇게 살았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다. 도망치지 않으려고 한 건지 도망칠 힘이 없었던 건지는 굳이 나누지 않았다. 어차피 그때의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살아는 있었으니 됐다.
다만 잘 살았다고 하긴 좀 애매하다. 누가 잘 지냈냐고 물으면, 대답을 잠깐 고민하게 되는 정도였다. 계절은 계속 바뀌었고 연말도 매번 왔다. 나는 늘 다음 일만 보며 살았다.
한 해를 돌아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는 귀찮게 느껴졌다. 잘 버텼다는 말독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그냥 또 한 해가 갔구나 그 정도였다. 지금와서 생각해 보면 그 시간은 떠나지 않고 버티는 법을 어쩔 수 없이 익힌 시기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지금, 나는 마흔을 넘겼다. 이제는 크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 대신 예전과는 다른 공백이 있다. 뭔가 잘못된 건 아닌데 딱히 잘되고 있다는 느낌도 없다. 연말이 되면 괜히 지난 시간을 세어보게 되고 올해도 큰일 없이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부터 나온다. 그래서 다시 떠나볼까 한다.
이번엔 목적지가 없다. 어디로 갈지 보다는 하루를 어떤 상태로 보내는지가 궁금하다.버스를 타고 움직이고 시장에서 밥을 먹고 사찰을 좀 걷고 전기 자전거도 하나 싣고 갈 생각이다.
힘들면 전기 쓰고 괜찮으면 그냥 밟는다.
딱히 계획은 없다. 이제는 안다. 여행이 뭔가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자유도 계속되면 피곤해진다는 걸. 그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것도, 다 포함해서 여행이라는 걸.
예전에는 떠나야 버틸 수 있었고 한동안은 떠나지 않고 버텨야 했다. 지금의 나는 머무는 법을 잊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 여행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모르겠다. 예전처럼 나를 구해줄 거라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돌아왔을 때 지금보다 조금 덜 흔들리면 그걸로 괜찮다. 아직은 그냥 좀 더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으니까.
구본형 작가의 [나는 이렇게 될 것이다] 157p '항구를 떠나본 적 없는 배를 배라 할 수 있을까'를 읽고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