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부딪히며 지나온 것들. 파도는 늘 있었고, 나는 그 위에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지나온 시간이 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급했고, 마감을 넘기는 데 온 힘을 소진했다. 연말이 되어서일까, 생각이 짙다.
조금 멀어져 보니 그 시간들이 어떤 모양으로 쌓였는지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이상한 일이다. 인생도, 일도, 빠져나온 다음에야 비로소 보인다.
나는 올해 마흔하나, 직장 생활 20년 차다. 기업에서 교육을 기획하고, 행사를 만들고, 전체를 총괄하는 일을 해왔다. 겉으로 보기엔 늘 바쁜 사람이었고, 주변에서도 성실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 가지 질문이 마음에 남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일을 잘해온 걸까. 아니면 그저 오래 해온 걸까.
돌이켜보면 나 역시 바쁨을 성실함으로 착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야근을 많이 하면 열심히 일한 것 같았고, 하루 종일 회의와 전화로 시간을 보내면 생산적인 하루를 보낸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결과가 남지 않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그 바쁨이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점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원래 분주한 성격의 사람은 아니다. 일의 전체 윤곽이 보이지 않으면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일에는 좀처럼 에너지가 붙지 않는다. 반대로 한 번 마음이 가는 일에는, ‘이 정도면 됐다’는 선에서 멈추지 못하고 끝까지 파고드는 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성향은 장점이기도 하고 단점이기도 했다.
2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을 보며, 일을 대하는 태도는 대략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주어진 일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고, 역량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직 어디에나 있고, 조직은 늘 이 유형을 감당하며 돌아간다.
두 번째는 주어진 일을 ‘간신히’ 해내는 사람이다.
시킨 일은 한다. 마감은 맞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일은 늘 부담이고, 추가적인 고민은 피하고 싶어 한다. 많은 직장인이 이 단계에 오래 머문다.
세 번째는 주어진 일을 한 번 더 고민하는 사람이다. 왜 이 일을 하는지 묻고, 어떻게 하면 반복을 줄일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스템을 만든다. 이 단계부터 일은 단순한 과업이 아니라 사고의 대상이 된다.
네 번째는 한 발 더 나아가는 사람이다.
해야 할 일을 넘어서, 그 일이 만들어낸 성과를 수치와 지표로 증명하고, 다른 부서, 다른 조직과 비교 가능한 결과로 만든다. 인정과 상훈은 이 단계에서 따라온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결과라는 점이다.
나는 이 네 가지 유형이 능력의 차이라기보다는 선택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에서 보냈다. 언제나 네 번째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다만 분명한 순간들이 있었다. 어떤 업무에는 유난히 몰입했고, 구조를 바꾸고, 결과적으로 분명한 흔적을 남겼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느꼈다. 아, 이건 ‘일을 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만들어냈다는 감각에 가깝다는 것을.
그 경험 이후로 생각이 바뀌었다. 성실함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성실함은 출발점이지 도착지가 아니다. 아무리 오래, 아무리 열심히 해도 방식이 바뀌지 않으면 일은 결국 사람을 소모시킨다.
우리는 너무 쉽게 바쁘다. 그리고 그 바쁨을 스스로에게 면죄부처럼 사용한다.
“이 정도면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다”라고.
하지만 정말 묻고 싶다. 그 바쁨은 당신을 성장시키고 있는가, 아니면 제자리에 묶어두고 있는가.
20년을 일해보니 분명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일은 저절로 깊어지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한 단계 위를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식으로 바쁘다.
지금 당신은 어디쯤에 서 있는가. 주어진 일을 감당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그 일을 넘어서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오늘의 노력이 내일의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그리고 여전히 그 답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더 이상 이유 없이 바쁘고 싶지는 않다. 언젠가 이 일을 떠나더라도 “그 사람은 이런 일을 했다”라고 설명될 수 있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다.
어쩌면 일은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시간을 증명하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일은,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