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대로 쓰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까 봐

by 회색달


세상에 에세이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 글쎄, 적어도 나는 아니었다. 누군가 내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을 때, 혹은 요즘 무엇에 빠져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 “글을 씁니다”라고 답하는 건 여전히 쑥스러운 일이다. 그건 글쓰기가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단지 글 자체가 내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니 아직도 얼떨떨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글쓰기를 특별한 재능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내 인생의 목표는 언제나 명확한 결과가 있어야 했다. 자격증 시험을 보고, 어학 점수를 올리고, 몸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하는 것. 노력한 만큼 결과로 치환되어 돌아오는 안전한 보상들이었다. 그러니 나와 ‘작가’라는 말은 거리가 멀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별생각 없이 잡지사에 투고했던 짧은 글 하나가 채택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보상은 현금도, 화려한 상패도 아니었다. 만 원짜리 편의점 교환권 하나. 누군가는 비웃을지 모를 그 작은 바코드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음료수 몇 잔을 사 사무실 사람들에게 나눴다. 한여름, 음료 병에 맺힌 차가운 물방울과 목을 타고 넘어가는 몇 모금의 액체가 오랜 나의 갈증을 해소해 주었다.


이 경험은 단순히 먹을 수 있는 공짜 티켓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만 늘 맴돌던 생각의 파편들이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인정’ 받았다는, 생애 첫 번째 사회적 증명이었다. 자격증 합격 연락을 받았을 때의 쾌감과는 결이 달랐다. 스펙이 채워지는 기분이 아니라, 내 안이 ‘나만의 생각과 언어’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자주 기웃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공모전 사이트를 습관적으로 새로고침하고, 잡지사의 문을 수시로 두드렸다. 그때 그 만 원의 인정을 잊지 못해 쓰고 또 썼다. 꾸준함이란 사실 대단한 인내심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어제 썼으니 오늘도 쓰고, 오늘 썼으니 내일도 써보는 관성일 뿐이다.


그렇게 관성적인 ‘기웃거림’을 멈추지 않으니 기적 같은 일들이 이어졌다. 공저로 내 이름이 박힌 책이 나왔고, 굵직한 공모전에서 당선 소식을 듣기도 했다. 얼마 전엔 공저 출간 소식을 들은 친구 녀석이 “참 꾸준하다”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나는 꾸준히 노력한 것이 아니다. 그저 쓰고 읽는 동안 나의 흩어져 있던 감각을 되찾아 주는 시간에 중독된 것뿐이다. 결국 나에게 글을 쓰는 행동은 노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숨을 쉬는 것과 같았다.


폴 발레리는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제는 ‘쓰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글을 쓰고 난 후에는 퇴고를 반드시 거쳐야 한다. 쓰고 고치는 무한 반복의 과정. 결국 꾸준한 글쓰기란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체를 재정의하는 과정이었다.


왜 하필이면 글쓰기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이 내가 나로 살아가기 위해 선택한 가장 정직한 관성이라고.


이제는 만 원권 교환권의 기억이 희미해져 간다. 어떤 거창한 목적이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읽는 대로 쓰고, 쓰는 대로 생각하는 이 삶이 꽤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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