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10분

by 회색달

“글을 쓰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옆 동료가 물었다. 내 손으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지 8년, 수만 번은 들은 질문이다. 그때마다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메모하는 거죠’, ‘자꾸 잊어버려서요’… 틀린 말은 아니다. 자주 잊고 실수하니까, 줄이기 위해 메모를 반복했다. 그게 전부였다.


어떤 하루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침 부터 회의의 연속에 쉬지 않고 올라오는 결재까지 처리하느라 오전을 다 보낸 날이었다.

옆 동료는 담배피러 나갔다. 따라 나가 바람이라도 쐴까 했다가 책상 구석에 밀어두었던 독서대를 다시 앞으로 가져왔다. 어제 펴놓은 책은 그대로였다. 채근담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처세를 담은 책이라고 했다.


문장 몇 줄을 따라가다가 전화를 받고, 다시 그 문장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감정과 태도에 관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서랍을 열어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내 펜을 들었다. 문장을 그대로 옮겼다.


그 모습을 동료가 지켜보고 있었다. 바쁘게 일하면서도 책을 펴고 펜을 드는 모습이 신기하다고 했다. 집중이 되느냐고 물었다.


“바빠서요.”


동료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바쁜데 어떻게 책을 읽고 필사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사람을 상대하다 보면, 내가 아닌 상태가 됩니다. 그때가 가장 위험했습니다. 남의 감정에 휘둘리고, 나를 잃어버리는 날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잠시 틈을 냅니다. 나를 붙잡기 위해서요.”


동료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완전히 이해한 표정은 아니었다.


“바쁘게 일에 쫓겼던 날은 어땠어요?”

“정신없이 보내다가, 지친 채로 하루를 끝내죠.”


몇 년 전의 내가 떠올랐다. 환경과 조직, 타인에게 맡긴 시간은 삶이 아니라 소모에 가까웠다. 퇴근 후에는 술과 짧은 영상으로 하루를 흘려보냈다.

하루 종일 바쁘게 살다 보니, 정작 바쁘지 않을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심망의란(心忙意亂).

마음이 바쁘면 생각은 어지러워진다.

결국, 나를 놓치게 된다.


10분.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담아 믹스커피를 마시던 시간. 지금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사무실 밖을 걷는다. 비가 와도, 더운 날에도 걷는다. 시간을 줄일지언정 멈추지 않는다. 나만의 틈을 만들기 위해서다.

독서대가 자리를 잡은 뒤로는 산책과 독서를 함께한다. 10분 동안 책장을 넘기고 한 줄을 남긴다. 그걸로 충분하다.


“벌써 다 읽었어요?”

동료가 물었다.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빈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듯했다.

“저번 주에 산 책은 다 읽었어요?”

“아, 맞다. 나도 읽어야 했지. 그럼 나도 10분만 읽어볼까.”


책과 가까워 진 뒤부터는 쓰는 일도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이제는 매일 반복하는 일이 되었고, 어느새 삶의 한 부분이 되었다.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 프란츠 카프카


그 말처럼, 책은 나를 조금씩 흔들어 깨웠다.
바쁘게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도 나를 붙잡아두는 시간, 책은 나만의 안전벨트가 되어주었다.
내일이면 또 하루가 시작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10분을 미리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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