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가 제일 쉬웠습니다.

미루는 습관을 가진 직장인의 이야기

by 회색달

"오늘도 야근 당첨인가…….;"

답답했다. 아침 출근길. 할 수만 있다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 현실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퉁퉁 부은 눈을 손으로 비비며 운전석에 앉았다. 아침 일곱 시. 매일 반복되는 일상. 퇴근은 몇 달째 밤 아홉 시가 넘어야 했다. 분명히 이 만큼 직장에서 시간을 보냈다면 끝이 보였어야만 했다. 머릿속 상상으로 따지자면 이미 끝나고 남았을 일들. 현실은 달랐다. 말 그대로 서류와 끝나지 않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차라리 이 일을 그만둔다고 말할까?' '아, 출근하다가 사고라도 나면 좋겠다. 며칠 동안 누워 있고 싶다….'

매주 월요일. 일주일의 시작을 알리는 회의 준비로 바쁜 날이다. 차라리 주말에 출근해서 미리 준비라도 했더라면 나았을까, 후회됐다. 애꿎은 날씨 탓, 저 멀리까지 신호를 기다리면서 서 있는 내 앞의 차를 탓했다. '아, 더럽게 밀리네'


전화가 왔다. 고개를 슬쩍 돌려 보니, 직장동료 B다. 운전대를 잡은 손을 어찌할 수 없어 그대로 뒀다. 전화는 몇 번을 더 울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아마 이번 주간 회의자료를 찾는 중에 전화했을 거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출근해서 자료를 출력해서는 회의 준비를 끝마쳤어야 했다. 처음 몇 번은 그러려니 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출근 시간이 아직 남아 있었는데, 왜 굳이 내가 아무런 이득이 없는 일을 해야 해?’라며 혼잣말을 했다.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전쟁 같은 시간을 미리 준비해서일까, 아니면 준비성이 부족해서일까. 그렇게 온 신경이 곤두선 채로 일주일을 시작했다.


저번 주에는 B가 나보고 '이런 식으로 하면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겠냐'며 나한테 불만 섞인 말을 했다. 그것도 인상을 가득 쓰고서.

사실, 나라고 안 한 것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은 밀리다 결국 책상을 넘쳐흐르는 날이 부지기수였으니 내 마음이 오죽했을까.


내가 맡은 업무는 직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인사 관련 행정 분야를 처리하는 자리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불편함'이나 에로 및 건의 사항을 요구할 땐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것도 한두 명이어야지 어느 날은 전화응대에, 사무실로 방문하는 사람까지 겹치다 보니 몇 명을 내 책상 앞에서 우두커니 세워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날도 많았다.


사무실에 들어섰다. 분위기가 휑하다. 나를 포함해서 직원 5명이 일하는 작은 부서다. 세 사람은 이미 회의실로 향한 듯했다. 책상 여기저기 흩어진 서류 뭉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마음이 급해졌다. 아직은 회의 시작 전이다. 서둘러 자료를 챙겨 사무실을 다시 나섰다.


'끼익'

혹시라도 회의가 시작하지는 않을까 해서 뒷문으로 들어가는데 문 여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크게 들렸다.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일주일에 한 번. 사내 사원을 포함, 대리, 과장급이 모여 진행하는 회의. 부서별로 순서에 맞춰 발언이 진행됐다.


"인사 담당자! 저번 주 인사 00 조사서 어떻게 됐어요?"

"아, 그게 저, 아직 일부 데이터 종합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게 아니라 어떻게 처리 중인지, 언제 보고서를 받아볼 수 있을지 묻는 거 아니겠어요?"

"아…. 네 오전 중으로 처리하겠습니다."

"좋아요. 점심시간 전까지 가지고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죠."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는데 그들의 시선은 마치 ‘뭐야, 그 정도도 못 해?’라며 질타하는 듯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C 부서에서 회신을 빨리 안 줘서 그랬던 건데 그걸 왜 나한테 뭐라고 해?. 그것도 수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줬어야 했나…….; 하 토요일에 출근해서라도 전화로 빨리 달라고 독촉 전화를 해야 했나…?;


주말의 달콤한 휴식과 맞바꾼 월요일의 씁쓸함은 무어라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만큼 내가 회사 일에 소홀했던 그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대우를 받으니 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오전에 보고해야 할 문서가 종합됐다. 사실 이틀 정도면 끝낼 수도 있었다. 부서별로 직접 전화를 돌려 ‘언제까지’ 회신을 달라고 한다거나, 그래도 안 되면 직접 찾아가서 현장에서 사람들을 하나씩 붙잡고 물어도 될 만한 일이었다. 단순히 서명 하나만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걸 미루다가 아침 회의 시간에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듣게 된 거고. 아니, 어쩌면 차라리 포기했다는 표현이 맞을 수도 있겠다. 다른 업무에 치이다 보니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도였는데 일일이 사람을 찾아다닌다는 건…….


약 200여 명의 서명이 담긴 서류뭉치를 한 장씩 꺼내 들어 스캐너에 올려뒀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번갈아 가며 스캐너를 작동시켰다. 1초, 2초, 3초. 아직도 처리해야 할 서류는 산더미인데 이놈의 기계는 내 마음 같지가 않다. 더군다나 혼자 이일을 처리해야 하다 보니 마음은 바쁜데 그럴수록 손은 더디다.


우선 모든 서류의 서명을 처리했으니 일은 끝낸 셈이다. 팀장에게 전원 이상 없이 처리했음을 보고했다. 남은 일은 점심을 먹고 와서 마무리를 짓는 일이다. 그 끝이 언제 일지는 몰라도 퇴근 시간 전에만 끝낼 수만 있다면 다행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을까, 그나마 오후까지 사무실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서류 밑으로 왔다 갔다 하는 스캐너의 불빛이 새어 나왔다. 멍하니 바라봤다. 분명 육체적으로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지럼증이 밀려왔다. 눈앞이 캄캄했다.


평상시에 늘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걸 내가 왜 해?’라는 생각을 먼저 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몇 번씩 튀어나왔다. 문제는 혼자 있을 때면 몰라도 주변 동료들이 있을 때도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행동했다는 거다. 밝아졌다가 금세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는 스캐너의 불빛을 보며 혼자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미루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떻게든 더 원활하게 해결할 방법을 찾았어야 했는데. 흔히 사람들이 하는 ‘일머리’가 부족하다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제일 쉬운 일이 포기다. 포기를 직접 실천하는 건 회피, 도망이고. 어쩌면 나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괴로움을 느끼고 지금의 일을 도망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알 수 없는 생각의 벽 끝에 수십 번째 반복 중인 스캐너의 불빛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멍하니 같은 동작을 반복하다가 서류를 제대로 올려두지 않은 채로 기계를 작동시킨 탓에 불빛이 눈에 반사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수십, 수백 번 반복 중인 기계가 마치 ‘정신 좀 차리자’라며 무언의 압박 보내는 듯했다. ‘그래 오늘만큼은 야근은 하지 말자. 겨우 이 정도로 이래서야 하겠어? 하다 보면 금방 하겠지.’


일주일이나 걸렸던 업무는 몇 시간 만에 끝났다. 진작에 주말에 잠시라도 나와서 해결할 걸 그랬나 싶었다. 그걸 귀찮다고 거의 반 포기한 채로 있었으니 나 참, 스스로에게도 창피한 일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성장의 책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