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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Jan 25. 2024

7.작가의  의무

늘 기록하는 사람, 작가

 초등학교 2학년까지 하루 동안 마을버스 두 대가 들어오는 시골에 살았다. 그렇다 보니 학교를 편하게 다닌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꿨다. 등굣길은 논을 가로질러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한 시간은 넘게 걸렸다.

1학년 때 즈음의 기억이 있다. 눈을 감 떠올려보면 벌써 30년도 넘은 일인데 얼마 전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하다. 그때만 해도 도시락을 챙겨 다녀야 하는 때였다. 원통 모양의 도시락 통을 담아 끈이 달린 검정 가방에 넣고, 한쪽 어깨에 걸어 다녔다. 반대쪽 어깨엔 신발주머니에 길게 끈을 달아 걸었다.

그렇게 오래 걷다 보면 양 허벅지에 도시락 가방과 신발주머니가 교대로 투박하게 부딪히게 되는데, 그걸 무릎으로 툭툭 치며 다녔다. 마치 어렸을 때부터 축구공 다루기가 생활 브라질 시골마을의 아이들처럼 말이다.


 문제는 도시락 통 안이다. 가만히 들고 가도 시원찮을 판국에 어느 때는 쥐불놀이하듯 빙빙 돌리면서 다녔다. 그런 날엔 반찬으로 담아놓은 김치며, 깍두기 국물이 새어 나와 통에 잔뜩 묻었다.

그런 날은 집에 와 어머니께 도시락 통을 내밀 땐 꾸중을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제 혼이 났다 한들 오늘이 즐거우면 또 반복하는 게 어린 내 마음 었다.  의기소침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당시 시골에 살 땐 내 친구 거의 다 비슷하게 살았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러나  잘 사는 집과 그렇지 못한 집은 도시락 반찬에서부터 티가 는 법이다.

내 도시락 반찬은 집에서 먹는 밑반찬을 덜어가는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다른 친구와 비교된 날이 많았다.

 분홍색 소시지에 커다란 계란 물 입은 햄이며, 동글동글 모양이 맛있어 보이는 문어 모양의 소시지, 어느 날은 우리 집에서는 명절 때나 볼 수 있었던 갈비까지 있었다.

 한 번은 도시락이 창피해 학교를 안 가겠다고 고집부렸다가 어머니께 등짝을 호되게 맞고 집을 나선 적도 있었다. 눈물을 훔치며 시골 대문을 열고 나오는데, 보통 때라면 이미 출근하고도 남았을 시간에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을 테니 차로 데려다주겠다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한 마디 하시는데 또 그게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아침부터 집안에서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나왔으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지만 논 길을 가로질러 걸어가도 되지 않는 기쁨 보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더 좋았다


 아버지의 아버지는 6.25 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오셨다고 했다. 아무도 연고 없는 낯선 땅.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작농과 사장에서 하는 일이 전부였고, 어떻게든 하루 삶을 살아내는 것이 전부였다.

 종종 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듣다 보면 '이게 무슨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가' 싶다가도 지금 살고 있는 집이나,  늘 소일거리를 찾아다니는 두 부모님을 보면 이해가 된다.

시골 살이 때에는 방 한가득 인형을 쌓아놓고 눈을 붙이시는 어머니를 본 적도 있었으니까. 옆에서 도와드릴 일 없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똑같았다.

'너는 아빠, 엄마 말씀 잘 듣고 공부만 열심히 해라. 그게 네 할 일이다.'

 전교생 백 명도 되지 않는 시골 분교. 거기에서 잘해봐야 어디 까지겠냐마는 행여 그런 부모님께 꾸중 듣기 싫어 나름 열심히 했다. 받아쓰기 100점. 그것만이 내가 부모님께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칭찬이었다.


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던 1996년. 두 부모님께서는 가난을 피해 시내 작은방 하나 딸린 상가로 이사했다. 문제는 순대 국밥 장사를 준비하느라 모아놓은 돈을 다 써버려 시골집보다 더 작은방에서 세 가족이 자야 했는데, 그래도 좋았다. 더 이상 논 길을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학교를 가는데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날아갈 듯 기뻤다. 하나 더, 학교 급식이 시작되던 때라 더 이상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는  제일 기쁜 일이었다.


'파주 순대'.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던 가게 이름이었다. 덕분에 졸업할 때까지 내 별명은 '파주 순대'였다.  한참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에 창피했다. 그것 때문에 친구들과 많이 싸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께서 교대로 선생님과 면담했고 그날 저녁이면 집에 가 또 혼나기를 반복한 기억이 난다.


"대체 너는 누굴 닮아서 그러니. "

"걔들이 먼저 놀렸다니까요. 왜 나한테만 뭐라고 그러세요?"

"그렇다고 친구를 때리면 돼?"

친구들의 놀림 때문에 받은 창피함 보다 내 마음 몰라주는 부모님의 원망 때문에 집을 나간 적도 있었다. 그래봐야 고작 집 근처 놀이터에서 빈둥대다가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게 전부였지만.

'분명 나는 부모님이 주워 오신 걸 꺼야.' '나는 왜 태어난 거지?'

 비 오는 날이면 학교 정문까지 차로 데려다주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웠다. 진로 상담 때마다 식당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다들 희망 직업, 꿈에 힘주어 쓸 때 나는 몇 번을 쓰고 지운 것도 화가 났다.

 왜 나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지, 왜 우리 집은 냄새나는 순대 국밥집을 하는지, 그것도 학교 앞에서 하느라 몇 년을 놀림받아야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수 십 년 전의 기억이다. 지금은 그날을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다. 직업으로 하는 일은 작가와 거리가 멀지만 과거 겪었던 모든 일을 하나씩 되짚어 보니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소중했음을 깨닫는 중이다.

 도시락 반찬이 창피해 학교 가기 싫다고 떼쓰던 아들, 친구들의 놀림이 싫어 친구들과 싸웠을 때의 아들 앞에서 늘 미안해하셨을 부모님의 마음은 오죽했을까. 부족하게 성장한 덕분이어서 일까, 어른이 되어서도 늘 부족함을 당연하게 여긴다. 원하는 것을 사주시거나 넉넉하게 용돈 한번 주신 적 없던 부모님 덕분에 돈의 소중함을 느꼈고 절약을 배웠다.


 그토록 원망스러웠던 가난과 부모님이 오늘날의 나를 완성한 셈이다. 과거의 일이 없었다면 나는 글 쓰는 일을 꿈꾸지 못했을 테니까. 작가는 늘 쓰는 사람이다. 자신이 겪은 경험을 통해 손으로 이야기하는 사람. 늘 모든 일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하며 읽는 마음에 울림을 선물해야 한다. 그것만이 글의 가치, 작가의 의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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