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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달리 Jan 25. 2024

10.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 들

삶은 녹화없는 생방송

 


독서에 마음을 두게 된 이후부터는 집에 텔레비전을 없앴다. 가끔 누가 집에라도 올 때면 그들의 공통된 반응이 재미있다.

 당연히 거실 한가운데에 있어야 할 네모 반듯한 모양의, 쉬지 않고 영상을 계속 보여주는 기계가 보이질 않으니 어색하단다. '최소한 집에서 어떤 소리라도 들려야 사람 사는 것 같지 않으냐'라는 농담에는 '귀찮아'라는 한 마디로 일축시키기는 여유까지 생겼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사람들과 일하면서 나누는 대화나 곳곳에서 들리는 기계 작동 소음, 출퇴근 시간에 들리는 자동차의 경적도 '소리' 라면 소리다. 오랫동안 직장생활을 하면서 이 '소리'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했다.

 집중해서 일해야 하는 상황에는 전화벨 소리에 순간 집중이 풀려 힘이 빠지기도 했고, 간간히 사무실로 찾아오는 협력업체 직원들 때문에도 힘들었다.

 이 상황은 한동안 심해져 결국엔 공황장애라는 진단을 받아 약의 도움을 받는 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집에 들어와서 까지 의미 없이 떠드는 기계가 반가울 리 없다.


 대신 거실이며 안방 침대 옆, 식탁, 작은방, 베란다, 하물며 화장실에까지 책을 올려뒀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처음 서재에서 읽던 책을 그대로 들고 움직이다 보니 그렇게 된 거다. 나중엔 그 책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자기 자리인 양옆으로 누워 있게 된 것이고.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 약속이라도 한 듯 한마디를 붙인다.

"뭔 집에 아무것도 없냐. 책밖에 없어."


 오늘 저녁 식탁 위에는 정기 간행물로 읽고 있는 좋은생각 23년도 6월 호가 올라왔다. 작년 가을부터 매달 이맘때 즈음이면 현관문 앞으로 배달된다.

두께가 얇아 몇 분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쓴 자신의 이야기를 읽는 건 매번 신기하고 즐거운 일이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즐거운 일이 생겼다. 거실 창문을 넘어 주방에 위치한 식탁 앞까지 오늘의 마지막 해가 들어온 것이다. 마치 오늘 하루의 낮이 밤에게 자기 자리를 내어주기 싫었는지 둘이 한데 뒤엉켜 서로를 밀어내는 모습이다.

 잠시 그걸 구경하다가 다시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고요했던 거실은 어느새 그 둘의 무대가 돼있다. 만약 텔레비전을 켜놓았다면 보지 못했을 나만 볼 수 있는 오늘 이 시간만의 자연의 생방송. 당연히 재 방송은 없다.

 주방과 거실 사이의 벽에는 몇 년 동안 모아놓은 책이 또 제자리를 찾지 못해 옆으로 누워 쌓여 있다. 대부분 읽으면서 그어놓은 형광펜과 볼펜으로 낙서 천지다. 어떤 책은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놨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제 기능을 잃어 책장 속으로 없어진 지 오래다.

 언제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를, 제자리 흔적만 남은 것도 있다. 오래된 책이라면 정말 시기적으로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고작 해봐야 10년도 안된 책들이다.

 독서에 빠진 이후로는 대부분 직접 서점에 들러 제가 격을 치른 뒤에 가지고 왔으니 전자 마트에서 포인트며 가격을 깎아 구입하는 가전제품 보다 더 가치가 있다. 이미 그 가격이 텔레비전을 넘어선 지도 오래다.


좋은 생각 잡지는 1992년부터 창간된 월간 잡지다. 된장은 오래 묵을수록 맛이 깊어진다고 했던가, 글도 쓰고 난 뒤 시간이 한참 지나면서 점차 맛이 깊어지는데 하나같이 감탄하는 표현이 똑같다. '아 맞아. 그때는 그랬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비슷한 시기에 쓰인 다른 이들의 글을 읽을 땐 잠시 옛 추억에 빠져보기도 한다. 된장처럼 깊은 맛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이런 매력 때문에 월간 잡지를 지난 3년째 모으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어린 시절의 내 기억 중 하나가 Tv보다는 책과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아버지께서도 신문과 책을 달고 사셨던 분이라 가끔 거실에 앉아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닦고 있는 어머니와 티격태격하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이 컸던 것일까, 나의 독서 욕심은 그때 처음 생겨났었을 거다. 성인이 된 이후부터는 책과 거리가 멀어졌었지만 마음속에는 늘 '읽기'에 대한 열정은 남아 있었다.


사람들의 조용한 이야기에서 생명력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 단순한 인쇄물에서 살아있는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까?.

자신만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깊은 고뇌와 인내가 필수인 만큼 한 편의 글은 그 사람의 생명 에너지를 담은 또 하나의 생명체이다.

설령 표현이 조금 서툴더라도 퇴고라는 과정을 거쳐 더 빛나게 만들 수도 있다.

 항상 세상 속 수 많이 소리를 들으며 살아가는 우리의 귀 대신 글로 옮겨진 수많은 이들의 감동, 위로, 행복 등의 이야기야말로 오래도록 남아 마음을 채우는 것이다.


잡지를 모으며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는 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도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있고 평범해 보이는 날이었지만 오래도록 기억되는 날이 있다.

 비결은 모두 쓰기다. 그러니 나만 평범하고 따분한 인생이라고 하지 말아야겠다. 그래야만 내 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록하여 남길 수 있을 테니.

수 십 년 동안의 수 천, 수만 명 이 글을 쓰고 남긴 이유, 자신의 모든 기억이 쓰지 않으면 사라질 것임을 깨달아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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