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더라도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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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달


서문.


지난해 마라톤 이후 주 1회는 달리기를 다짐했건만 저번주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 결국 못했습니다. 대신 이번 주에는 두 번을 달리기로 하고 화요일과 목요일 이틀을 달렸습니다

기록은 지난해보다 나아졌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발목과 허리가 시큰거리네요.


강변을 달리다 보니 지난번 보다 꽃이 많이 보였습니다. 개나리도 있었고 민들레, 벚꽃도 피어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분명 모두 같은 4월의 목요일을 보내고 있을 텐데 어떤 나무는 아직도 꽃을 피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습니다.

벌써부터 강바람에 잎을 떨구는 나무도 있었는데 말이죠. 누구에게나 오늘이 봄은 아니었나 봅니다.


목표 거리를 완주하고 숨을 정리하며 방금까지 달려온 길을 천천히 걸었습니다. 이전과는 다른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벤치에 앉아 강아지와 강을 바라보는 할아버지, 강변에 앉아 나물 캐는 할머니, 한가로이 산책 중인 고양이도 봤습니다.


에피소드 1.


며칠 자주 앓았습니다. 어깨도 다쳐서 병원을 다녔고, 불면증이 다시 생기는 바람에 처방받은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만 해야지' 하는데도 정체 모를 불안과 막연한 두려움이 스멀스멀 밀려와 새벽까지 뜬 눈으로 보낸 밤도 많았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일이 바빠 점심시간 샌드위치 하나 입에 물고 문서처리했습니다. 물 한잔 마시고 꾸역꾸역 입에 밀어 넣는데 '지금 무얼 하는 건가' 싶다가도 쌓인 업무에 다시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마치 쉬지 않는 기계처럼, 마우스와 키보드를 번갈아 조작했습니다. 무언가에 쫓기듯, 오늘 내에 일 처리하지 못하면 욕 한 바가지 들을 사람처럼.


농땡이 부리지 않고 열심히 살면 무조건 잘 될 줄 알았습니다. 어제보다 1초라도 더 빨리 정해놓은 골인지점을 통과해야만 성공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 컨디션이 나빠 숨 가쁜 날이나, 강변에 날아다니는 하루살이가 하필 눈이나 입에 들어가는 날이면 당황해 속도가 줄었습니다. 순간 잡히지 않는 벌레에 화를 냈습니다. 누가 보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터, 허공에 헛손질을 하니 그럴 수밖에요.


에피소드 2.


재 작년까지만 해도 지금의 일은 나와 맞지 않는다며 이직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다른 도전 앞에서는 망설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늘 선택한 순간마다 후회만 남은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용기가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뒤늦게 모든 선택의 결과를 책임지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데, 이런 삶의 태도를 배운 건 얼마 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니 마음은 다른 곳에 가있고 몸은 이곳에 있으니 결과가 좋을 리 없었을 겁니다.


변화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과정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성공을 꿈꾸지만 정작 통과의례의 고통과 아픔은 피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진정한 성공은 어느 한순간에 짠 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흘린 땀방울의 무게만큼 더 확장되는 성장판이라는 것을.

문제는 이러한 순간이 참기 힘들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나와 같은 출발선상에서 시작했는데도 한 참 먼저 골인지점에 통과 한 사람을 봤을 땐 멀쩡하던 배가 아팠습니다.


메시지

빨리 피는 꽃은 그만큼 일찍 지기 마련입니다. 확실합니다. 오늘 달리며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입니다. 남들보다 먼저 봄을 맞겠다고 꽃봉오리 만개해 봤자 주변에서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아름다움도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에게는 자기만의 봄이 있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으니 다가올 봄을 위해 닫힌 성장판을 열 준비를 묵묵히 하면 됩니다.

일찍 피는 봄의 기대보다 마지막 자락의 아쉬움이 더 큰 법입니다. 더 많은 햇볕과 충분한 영양보충을 통해 내 꽃을 더 크고 화려하게 피우면 됩니다.


몇 번을 달렸던 똑같은 길이었는데, 어제와 오늘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건 과거의 미련도, 내일의 막연함 두려움에 잠 못 이루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달리고 있는, 앞으로 가야 할 길 위에 발을 쉬지 않고 내딛는 것뿐입니다.


이전보다 기록이 좋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남들보다 느려도 괜찮습니다. 반복하는 노력만 있으면 됩니다. 결국 지금 딛는 발걸음이 모여 오늘의 마침표로 향할 테니까요. 지금 흘린 땀 한 방울만큼 내일의 내가 짊어질 무게를 줄일 수 있다는 희망으로, 그런 노력으로 오늘을 살아내면 됩니다. 느려도 괜찮습니다.



원래 이 글의 메시지는 '쓸모없는 시간은 없다.' '땀방울은 배신하지 않는다' 등의 과거 경험으로부터 지금의 내가 됐다는 자존감 회복이었습니다.



그러다 이은대 대표의 글 쓰기 수업을 듣던 중 '비슷한 경험 일지라도 끝에 메시지만 살짝 바꾸면 다른 글이 됩니다'라는 말 한마디에 경험에서 시간으로 바꿔 봤습니다.


역시 글 쓰기는 무궁무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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