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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시행착오가 필요한 이유

by 리얼라이어

아이디어를 빠르게 최소요건제품(시제품)으로 제조한 뒤 시장의 반응을 통해 다음 제품 개선에 반영하는 전략을 <린(lean)스타트업>이라고 한다. 린스타트업은 '만들기 > 측정 > 학습'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꾸준히 혁신해 나가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2011년 미국에서 출간된 동명의 에릭 리스의 저서 <Lean Startup>이 실리콘밸리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2012년 11월 국내에 번역된 뒤에는 국내 벤처기업 아니라 대기업 임직원과 벤처투자자들 사이에서도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나 또한 번역된 책을 당시에 구입해서 읽었고, 지금도 때에 따라 필요한 쳅터를 읽어보곤 한다.


린스트업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이름과 학습 방식이 다소 생소하다고 생각될 수 있겠으나, 이미 우리는 영어로 트라이얼 앤드 에러(trial and error) 즉, 시행착오(試行錯誤)라는 말을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시행착오는 끊임없는 시도와 실수를 통해 새로운 이론과 지식을 얻게 되는 학습 방식을 일컫는다.


시행착오든 린스타트업이든 모두 '시도'와 '개선`이라는 좌표를 가리키고 있다. 좌표만 읽어서도 안되고, 흉내만 내서도 안된다. 올바른 길로 보다 가깝게 가려면 반복 실천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래야 낭비를 줄일 수 있고,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바로 시행착오를 겪고 이겨 내는 일이다. 이것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시행착오가 필요한 이유다.


| 책 <빨간 연필> 줄거리


딸아이의 어휘력 향상을 위해 독서지도 책으로 선정한 <빨강연필>은 전체 스물한 개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목차부터 마지막 목차까지 한 편씩 끊어 읽고, 한 편마다 딸아이와 나는 학습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는 어휘에 각자의 형광펜으로 색을 칠하기로 했다.

민호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실수로 친구의 물건인 유리 천사를 깨뜨리고 만다. 떨어진 날개 앞부분은 아귀가 맞았지만 뒷부분에는 작은 조각이 비었다. 다행히 잘게 바스러지지 않은 작은 조각을 찾았을 때 교실로 반 친구들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민호는 깨진 유리 천사를 재빨리 주머니에 넣는다. 자신의 유리 천사가 없어진 것을 안 물건의 임자로부터 교실은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이때 민호는 화장실로 가서 깨진 유리 천사를 변기에 버리려 하지만 마땅치 않다. 잠시 후, 교실로 들어온 담임 선생님. 선생님은 반 아이들 모두 눈을 감게 한 후 유리 천사를 가져간 아이에게 자백할 시간을 주지만 아무도 나서는 학생이 없다. 그 날 민호는 선생님이 검사하는 일기장이 아닌 비밀 일기장을 꺼내어 오늘 있었던 일을 적는다. '사실을 말하면 믿어줄까? (중략) 학교에 가기 싫다'


<빨강연필>의 첫 번째 목차 '1. 날개잃은 천사'편의 줄거리다. 민호가 실수로 깨뜨린 친구의 유리 천사를 어쩔 줄 몰라서 숨긴다던지, 담임 선생님이 눈을 감게 하고 유리 천사를 가져간 학생에게 자백할 시간을 준다던지, 제출하는 일기장 외에 민호만의 비밀 일기장이 있다던지 하는 내용이 읽는 내내 내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특히 담임 선생님에게 제출하는 일기장 외에 비밀 일기장이 있다는 설정이 더욱 그랬다. 내 유년시절의 추억이 깃든 물건이 있는 보물 상자 꾸러미 그 어딘가에 내 비밀 일기장이 있기 때문이다. 기억도 나지 않은 만 큼 오랜 시간 동안 어두컴컴하고 습한 그곳에 자리한 내 비밀 일기장 말이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꺼내어 읽어 봐야지 했었는데 생각난 김에 보물 상자 꾸러미를 찾아봤지만 집엔 없었다. 아, 친가 창고에 있지! 또다시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 관용 표현


사설, 기사, 소설이 아닌 동화라서 그런지 읽었을 때 난해하거나 학습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어휘는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꼼꼼히 찾아내어 노란색, 연두색 형광펜을 칠했다. 딸아이도 두 번째 읽은 책이라서 어려움 없이 독서를 마쳤는데, 책을 보니 5곳에 주황색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윤쌤이 학습지 만들 자료가 부족할까 봐 아는 어휘에도 색을 칠했다나? 그런데 뭐지, 이 녀석! 정말 '오줌발'의 뜻을 모르고 있었던 거야? 물었더니 모른단다. 오줌에 발이 달린 거냐는 농을 치는데 얼굴을 보니 진짜 모르는 듯 보였다. 맙소사!


(c) 슬로우 스타터


노트북 디스플레이에 오피스 프로그램 워드(word)와 어학사전을 띄워 놓고 두 사람이 칠한 형광펜 색상을 바탕으로 사전을 찾아가며 학습지 문항을 하나씩 만들어 나갔다. 딸아이가 모르겠다는 '오줌발'도 문항을 만들어 나가는 중에 개인적으로도 자주 봐왔던 뜻, 예문, 유의어, 반의어, 맞춤법 외에 '속담, 관용구'란이 눈에 띈다. '오줌'과 관련된 속담 중 사람이 미지근한 것에도 델 정도로 매우 허약함을 이르는 말 '오줌에도 데겠다'는 속담이 있다. 나도 처음 알게 된 속담이지만 생활에서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표현으로 보였다. 가끔씩 엄살을 떠는 딸아이에게 언젠가 이 속담을 써먹어야지 생각하며 '관용 표현'에 관한 내용도 학습지 안에 녹여내기로 했다.


‘관용 표현’이란 원래의 뜻과는 다른 새로운 뜻으로 굳어져 쓰는 표현으로서 관용어, 속담 등이 있다. 관용 표현을 사용하면 좋은 점이 있다. 짧은 말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 듣는 이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다. 재미있는 표현이어서 듣는 이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관용 표현을 사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 은 말하여야 할 상황과 말할 내용을 확인한다. 그리고 상황에 어울리고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관용 표현을 찾아 상황에 알맞게 관용 표현을 넣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된다.


딸아이가 <아빠펜> 학습지를 통해 다양한 관용 표현을 알아두고 익혀서 생활 속 알맞은 상황에서 사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어휘 학습지 구성


<빨강연필>의 첫 번째 목차 '1. 날개잃은 천사'편에서는 20개의 어휘 학습지 문항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문항은 프린트물로 뽑아서 클리어 파일에 끼워 딸아이에게 전달되었다. 이제 딸아이는 문항마다 주어진 과제를 노트에 적고 이를 이용하여 짧은 글을 짓는 연습까지 하게 된다. 문항을 만들면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책의 문장에서 쓰인 어휘의 뜻 외에 해당 어휘의 다른 뜻과 그 뜻에 맞는 예문 써보기, 해당 어휘의 유의어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써보며 익힐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 가슴 한 켠이 서늘히 내려앉았다.

#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안도감을 주었다.


형용사 '서늘하다'는 위의 두 문장처럼 뜻이 다른데 첫 번째 문장에서 쓰인 '서늘하다'는 '사람의 성격이나 태도 따위가 차가운 데가 있다.'는 뜻이고, 두 번째 문장에서 쓰인 '서늘하다'는 '물체의 온도나 기온이 꽤 찬 느낌이 있다.'의 뜻이다.


또한 '기품'은 기품(氣品), 기품(奇品), 기품(氣稟) 이냐, '의식'은 의식(意識), 의식(儀式), 의식(衣食), 의식(倚息)이냐에 따라 뜻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의 문장에서 쓰인 '기품', '의식'의 경우, 문장에서 각각 어떤 뜻으로 쓰였는지 확인하여 쓰고 한자에 따라 다른 뜻도 찾아 쓰게 했다.


(c) 슬로우 스타터


| 어휘 익힘 노트 확인


역시 딸아이는 바빴다. 이미 정해진 공부와 시간에 맞춰 가야 하는 학원 그리고 학원 과제까지 하느라 자정이 다되어 가는 시간까지 책상머리에 앉아있다. 녀석, 나를 닮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다. 엉덩이가 무척 무겁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해야 하니까 물리적으로 시간이 모자라니 자는 시간을 조금 줄여서라도 다 끝내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래도 초등학생이 자정까지 책상에 앉아 있는 건 좀 아니지 않니, 딸아!


어쨌든 딸아이가 첫 번째 <아빠펜> 학습지를 다 끝냈다. 시작하고 1~2일 소요될 줄 알았는데 4일이 걸렸다. 여러 가지를 해야 하는 딸아이에게 <아빠 펜>이 부담됐던 것일까? 시간으로 계산하면 약 5~6시간 정도 걸린 것 같은데 딸아이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그런 딸아이를 애써 외면한 후 학습 노트를 살펴봤다.


하기 싫어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첫 페이지의 글씨체가 일관되게 유지된 것을 보니 숙제라고 생각하기보단 나름 공부한다 라는 마음으로 임한 모습이다. 다행이다! 그런데 노트를 보고 있자니 필기량이 많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나라면 필기를 하다가 볼멘소리로 쓰는 양을 줄여달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딸아이는 군소리 않고 마무리를 했으니 칭찬해줘야겠다.


그런데 한 가지 지적할 부분이 있었다. 학습지 마지막 문항은 20개의 어휘를 사용하여 짧은 글짓기를 하는 것인데 딸아이가 쓴 글을 읽어 보니 어째 책 내용과 비슷한 게 아닌가! 주제 상관없이 학습한 어휘를 사용하여 자유롭게 글짓기를 해서 어휘를 제대로 익히는 일이었는데 내 의도대로 되지 않은 것을 보니 뭔가 대책이 필요해 보였다.


| 피드백


"윤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나름 한다고 했는데 칭찬이 너무 박한 것 같아요!"

"아, 미안! 학습태도 만점입니다. 앞으로 기대가 커요."

"그리고..."

"아직 윤쌤의 말 끝나지 않았어요."

"..."

"윤쌤도 처음 <아빠펜>을 만들다 보니까 부족하고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시간부터는 이번과 조금 다르게 문항을 만들어 보려고요. 계속해서 성실히 임해주세요!"

"아, 윤쌤! '오줌발' 말인데요. 이번에 알게 돼서 <아빠펜>이 도움됐어요. 감사!"

"고맙! 그리고 <아빠펜> 하면서 윤쌤에게 바라는 점, 바꿨으면 하는 점 같은 의견 있으면 피드백 시간에 얘기해주세요."

"오케이, 윤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아내가 키득키득 거리며 말했다. 두 사람이 이것 때문에 다투는 일 없도록 서로 지금처럼 존댓말로 대화하라고. 그래서 짧은 글짓기에 관해 피드백하려고 했던 마음을 접었다. 아무래도 이 얘기를 꺼내면 딸아이와 옥신각신 할 것 같아서였다. 일단 두 번째 시간에 두고 보기로 하고 나는 두 번째 목차인 '빨강연필'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 하는 일은 늘 그렇듯 오래 걸리기 마련이다. 익숙지 않아서도 그렇고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실수할까 봐, 잘못할까 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스러운 맘에 심기도 불편하다. 그러다가 점점 익숙해지고, 방법도 알게 돼서 속도가 빨라진다. 단순히 반복 숙달했기 때문일까?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실행하면서 어떻게든 알맞은 방법을 찾아내 서다. 그것도 몸집이 작을 때 그리고 빠르게 움직여서 말이다.


시행착오가 없다면, 내가 시행착오를 무시했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아빠펜>은 내겐 '시간 낭비'이고 딸아이에게는 '효과 제로'였겠지. 뜬구름 잡지 않게 해 준 너에게 고마움을 전할게, 시행착오(試行錯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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