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만큼이나 많은 장르, 악기, 스타일의 음악이 있다. 영화나 광고를 통해 이미 익숙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곡이 많다. 음악 치료, 심리 치료, 태교 음악, 수면 음악처럼 기능성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명곡들은 많은 아티스트에 의해 반복 연주된다. 진정한 애호가는 같은 작품이라도 비교해 들으며 음반을 구입하고 비교적 고가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콘서트 티켓을 예매한다. 다름 아닌 클래식 얘기다.
"어? 아빠! 이 목소리 윤아인... 피아니스트 윤아인 목소리야!"
"와, 어떻게 목소리만 듣고 알아?"
"맞아, 맞다니까. 말할 때 약간 떨리는 목소리... 잘 들어 봐 봐!"
점심을 먹기 위해 거실로 나온 딸아이가 식탁에 앉기도 전에 말했다. 특색 있는 음색을 지닌 유명인이거나 방송인이 아니고선 어떻게 목소리만 듣고 누구인지 알 수 있단 말인가. 몇 분 정도 듣고 있다가 생각한 끝에 말한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게 말했다 하더라도 이렇게 확신 있게 말하다니 정말 딸아이 말 마따라 피아니스트 윤아인의 목소리가 맞는 것일까?
지난 2020년 한 해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매우 불편한 동거를 해야만 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확진자 소식이 문자 메시지로 배달되고 있다. 백신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지만 2021년 올 한 해도 바이러스와 불편한 동거는 계속될 것 같다. 때문에 딸아이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봄이 오더라도 zoom을 켜고 온라인 세상에서 새 학년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상황 때문에 출근 시간을 뒤로 미룬 채 평일 오전엔 딸아이를 돌보고 있다. 그러나 한 편으론 어쩔 수 없는 현상황 덕분에 딸아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만큼 딸아이와의 반복되는 티키타카(tiki-taka)는 피할 수 없다. good, not bad, bad를 골고루 갖춘 케미스트리(chemistry)를 자랑한다고나 할까. 어쨌든 점심 상차림은 오롯이 내 몫이기에 오늘도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았다, 가스레인지 불 조절을 높였다 줄였다 했다.
지금 스피커에선 피아노와 바이올린 합주곡을 뿜어내고 있다. 평소에는 그러니까 아내와 딸 그리고 나 이렇게 세 사람이 집에 있을 땐 블루투스를 이용해 대중음악을 듣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딸아이와 둘이 있는 평일 점심을 먹는 시간 즈음엔 라디오를 듣는다. 대략 오전 10시부터 정오를 약간 넘어선 시간까지 얼마 되지 않지만 주파수는 늘 한 곳에 고정되어 있다. KBS Classic FM (서울, 인천, 경기, 충남 북부 93.1 MHz / 춘천 91.1 MHz)이다.
이유는 서두에서 언급되었듯이 기능성 목적이 크다. 클래식 음악은 나나 딸아이에게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편안한 대화를 주고받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 더욱이 음악적 교양을 넓히는데 도움이 된다. 특별히 찾아 듣거나 들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소나타, 교향곡, 협주곡, 무곡, 서곡, 녹턴, 세레나데 등등등 언제 다양한 기악곡을 들을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성악과 합창도 들을 수 있으니 학창 시절에 시험을 위한 듣기가 아니기에 정을 붙이는데 어렵지 않다. 물론 여전히 들어도 잘 모르고, 들어봤어도 제목 하나 제대로 외는 작품은 매우 적다. 말 그대로 클래식 문외한이다.
KBS Classic FM (c)슬로우 스타터
그러나 의도적으로나마 KBS Classic FM을 통해 클래식을 조금씩 접하다 보니 전 세계가 열광하는 우리나라 아이돌 그룹의 고유한 특성처럼 감탄하게 된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칼군무와 같다. 한치의 오차가 있다면 칼군무라고 부를 수 없다. 지휘자와 현악기군, 목관악기군, 금관악기군, 타악기군이 일사불란하게 합을 이룬다. 그저 소름이 돋기에 충분하다. 합창도 마찬가지다. 남성, 여성, 혼성 그리고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가 조화를 이뤄내며 귀로 혼을 빼놓는다.
기악 협주곡은 미치 합이 좋은 리더와 팀원으로 이뤄진 장수 아이돌 그룹 같다. 리더는 훌륭한 팀워크를 위해 듣기, 말하기로 팀원 간의 소통을 이끌고, 팀원 또한 개인이 아닌 '우리'로서 그룹을 위해 헌신한다. 독주 악기의 기교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작곡한 소나타 형식의 악곡을 들어본다면 공감이 갈 것이다.
피아노, 첼로, 바이올린 등의 기악 독주곡은 아이돌 팬덤과 같다. 아이돌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발표하는 공식 앨범, 굿즈, 콘서트 티켓을 구입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특정 멤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지하철 광고, 버스 광고, 카페와 같은 장소를 대관하여 컵홀더 이벤트도 진행한다. 연주자마다, 명곡마다 고유의 팬이 있는 독주곡이야 말로 꿈나무를 만들어 내고, 애호가가 생겨나게 만들어 버린다.
성악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조수미의 팬이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를 듣고 나는 3년 전 돌아가신 내 아버지를 만나고 왔다. 2006년 독창회(파리 샤틀레 극장)에서 조수미가 불렀던 이 곡은 당시 공연 전, 조수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공연을 취소하고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가 관객과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설득에 아버지께 헌정하는 마음으로 무대에서 아베마리아를 불렀다. 곡의 서사도 서사지만 그녀의 꼿꼿한 심지에 반해버렸다. 또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내 맘의 위안이 필요할 때,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가족이 생각날 때 찾아듣곤 한다. 그리고 내가 조수미의 팬이 된지는 불과 6개월 전부터다.
"맞지! 맞지! 내 말이 맞지! 피아니스트 윤아인 맞잖아!"
대박! 소오름!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합주곡이 끝난 뒤 <KBS 음악실>의 신윤주 진행자가 피아니스트 윤아인과 근황 토크를 이어가는 소리에 딸아이가 밥을 먹다 말고 내게 큰소리를 쳤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딸아이는 지금까지도 피아노 학원에 다니고 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딸아이의 장래희망은 피아니스트였다. 평범하고 무난한 수준이지만 피아니스트를 꿈꾸기에는 부족한 탓에 피아노는 좋아하고 잘 다루는 악기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도 피아니스트를 꿈꿨던 덕분에 웬만한 피아니스트 정보는 알고 있는 듯했다. 그래도 목소리만 듣고 연주자를 알아맞춘다는 것은 실로 놀랍다. 딸아이의 청음이 좋은 건가?
오늘 <KBS 음악실>은 바이올린 김재원, 피아노 윤아인의 초대석으로 3곡을 라이브로 청해 들었다. 정오가 넘었다. 딸아이도 나도 점심 식사를 마쳤다. 딸아이는 오늘 해야 할 다양한 공부를 위해 다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나는 설거지 후 출근을 할 것이다. 평일 오전까지 딸아이와 함께 하는 날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부터 딸아이와 함께 라디오를 들을 수 없으니 벌써부터 아쉬움이 크다.
집에서 라디오를 듣게 된다면, KBS Classic FM에 주파수를 맞춰보자. 클래식 음악? 쫄지말자. 그냥 귀로 들으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