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드람 2020~2021 V리그’ 여자부 챔피언 결정전에서 준우승이 확정된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박미희 감독이 언론과 인터뷰를 갖으며 어렵게 시즌을 마무리한 선수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전후좌우 모르고 보면 경기에서 진 패장(敗將)으로서 담담하게 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겠다. 하지만 흥국생명의 팬이라면 박 감독의 이 말에 상당한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국내 배구 팬의 한 사람으로서 박 감독의 메시지가 유독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정성이 담겨 있어서다. 또 가슴 뭉클했다. 그래서 그의 메시지를 글로써 기록하고 싶어졌다.
흥국생명은 이번 시즌 팀 이름 보다 '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의 줄인말 '어우흥'과 '흥국생명+어벤저스'를 합친 '흥벤저스'로 불렸다. 국내 여자부 프로 배구단 6개 팀 중 정규 우승은 물론 챔피언 결정전까지 통합 우승을 일궈낼 막강한 전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사실상 절대 1강은 흥국생명 차지였다.
흥국생명은 이번 시즌 내부 FA였던 국가대표 레프트 이재영 선수를 잔류시켰고, 쌍둥이 동생인 국가대표 주전 세터 이다영 선수를 FA로 영입했다. 지난 시즌 코트에서 함께 뛰었던 루시아 프레스코 선수를 외국인 선수로 다시 지명했다. 여기에 세계 최고의 올라운더 레프트이자 국가대표 주장인 '배구 여제' 김연경 선수가 해외 생활을 마치고 12년 만에 흥국생명으로 복귀했다. 코로나 19 로 인해 세계 배구 리그 환경이 달라지면서 예상치 못하게 김연경 선수가 국내로 복귀한 것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용병만 세 명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렇게 흥국생명은 무패 우승에도 도전할 만큼 사상 최강 팀이 되었다. 시즌의 막이 오르자 흥국생명 선수단은 보란 듯이 개막 10연승을 거머쥐며 '어우흥'과 '흥벤저스' 이름에 걸맞게 최고의 경기력을 선사했다. 언론에서는 이번 시즌을 두고 싱거운 순위 다툼을 예고하면서도 어떤 팀이 흥국생명을 끊질기게 괴롭힐지, 어떤 팀이 흥국생명에게 1패를 안겨줄지를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배구 팬들의 호응을 이끌어 내는데 좋은 기사감이 될테니까 말이다.
팀 전력이 한 쪽으로 너무 치우친 스포츠는 선수들의 박진감 넘치는 모습과 짜릿한 경기의 흐름을 기대하기 어렵다. 팬으로서 이변(異變)있는 경기가 속출하는 것도 당황스럽지만 팀의 전력 차이로 경기의 흥미가 떨어지면 덩달아 팬의 관심도 떨어질 수 밖에 없다. 내가 그랬다. 정해진 왕좌 게임이라도 보위를 위협할 서사가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다. 마땅한 서사가 없다면 뉴스로 결과만 확인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승승장구 할 것 같던 흥국생명에게 작은 돌 하나가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김연경 선수와 이재영, 이다영 쌍둥이 자매의 갈등이 이다영의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흥국생명은 경기 외적인 문제로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이다영의 SNS 게시글은 학창 시절 폭력 고발의 시작점이 됐는데 이는 커다란 나비효과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재영, 이다영 쌍둥이 자매는 학교 폭력 가해 사실을 인정했고, 팀을 떠나게 됐다. 이 사건으로 한국 배구계는 쑥대밭이 됐다. 그리고 선수, 감독을 가리지 않고 학교 폭력 고발이 한국 스포츠 이곳저곳에 들불처럼 번져갔다. 연예계 또한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흥국생명은 외국인 선수 루시아 프레스코가 어깨 부상으로 팀을 이탈하면서 브라질 출신의 새로운 외국인 선수 브루나 모라에스 두스 산투스를 대체 발탁했지만 심한 기복 탓에 전력누수로 이어졌다. 이에 김연경 선수가 중심을 잡고 팀을 추스르려고 애썼지만, 이마저도 백업 선수의 기량이 핵심 자원 선수를 잇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선수단 사기는 바닥을 쳤고, 반등을 꾀하지 못한채 '어우흥'은 점점 모래성이 되어갔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었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명언 중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No player is bigger than the Team)'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명언은 팀 스포츠 경기에서 원 팀 즉, 조직력이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결국, 2020~2021 V리그 여자부 통합 우승은 조직력을 앞세워 원 팀으로서 끝까지 멘탈 관리를 잘한 GS 칼텍스 Kixx 가 차치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박미희 감독은 1980년대 대한민국 여자 배구계를 빛낸 레전드다. 은퇴 후 10년 가까운 기간동안 배구 명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역대 흥국생명 감독 중 가장 오랫동안 재임한 감독으로서 대한민국 역사상 리그가 운영 중인 단체 구기 종목 가운데 최초로 통합 우승을 달성한 여자 감독이다. 그래서 국내 프로 스포츠 역사에 등장하는 여자 지도자 중에서 가장 성공한 지도자로 불린다. 하지만 그에게 이번 시즌은 자신의 배구 인생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악재를 만나 잔혹 동화 한 편을 쓰게 됐다.
박미희 감독은 경기 후 언론과 갖은 인터뷰에서 선수들과 코칭 스태프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진짜 스포츠의 가치가 무엇인지 선수들이 이번 시즌을 통해서 많이 느낀 것 같다. 정말 너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경기를 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선수와 스태프의 노력 때문이었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감독은 캡틴 김연경 선수에게 '이번 시즌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격려 외엔 직접적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리더 역할을 충분히 했다. 후배들에게 충분한 귀감이 되었다.'며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했고 '배부를 때 진수성찬보다 배고플 때 빵 한 조각이 소중하듯 어려울 때 용기를 준 많은 팬들께 감사드린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끝까지 응원을 아끼지 않은 팬들대한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이어 그는 '스트레스가 많았다. 1년을 준비했는데 외부적인 요인으로 우승을 하지 못한 건 아쉬움이 남는다.'며,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 글과 말로 받은 상처도 있었다. 치유가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겼다. 천하의 박미희 감독도 일순간에 몰아친 풍파에 마음의 상처가 깊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그가 감독의 자리에서 그간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심정으로 코트에 나섰는지 짐작케 하는 이 말에 숙연함마저 들었다.
경험 앞에 장사(壯士) 없다. 인생에서 예상치 못한 어퍼컷을 맞았을 때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은 바로 ‘실패 경험’에서 비롯된다. 몇 안 되는 사람을 제외하고 대부분 살아가면서 역경의 상황에 맞닥뜨리고 고난의 시련을 겪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의식주부터 연애, 결혼, 다이어트, 금연, 사업, 투자, 취업, 면접, 건강,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실패담을 안고 일상을 보낸다.
박미희 감독이 선수들에게 말했다. '수고했다. 오늘이 지나가면 또 과거가 된다. 이제 새로운 순간들이 찾아온다.' 이 말은 이번 시즌을 계기로 선수들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인 동시에 혹독한 실패를 경험한 박미희 감독 스스로에게 전하는 격려의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또한 지금도 어디선가 실패 중인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의 말로도 읽힌다. 그리고 내겐 지난 날 외롭고 지치고 쓸쓸했던 마음을 쓰담쓰담 보듬어준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