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괜히 주말에 <로마의 휴일>은 봐가지고.
<이터널 선샤인>을 보고 나와서 버스정류장까지 20분 가량을 걸었다. 눈이 아직 녹지 않은 길을 조심조심 걸으면서도 자꾸 울컥하는 마음에 괜히 투덜거렸다. 주말에 본 <로마의 휴일>이 지독하게 사랑스러워서, 로맨스 영화 중 반드시 손꼽히는 <이터널 선샤인> 재개봉까지 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배우 짐 캐리를 좋아하기도 하고, 색감이 예쁘다는 말도 들었고, '사랑'에 대해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것도 알고 있어서 사실 큰 걱정 없이(?) 극장에 들어섰다. 내 취향이 아닐 리가 없으니까!
처음 조엘을 보면서는 내가 아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만의 평온한 루틴이 있는, 슴슴하고 무해한 일상을 사는 어떤 고요한 사람. 조엘은 어느 날 갑자기 계시처럼 깃든 예감을 무시하지 않고 몬탁 행 기차를 잡아탄다. 그리고 거기서 도대체 다음 행동을 종잡을 수가 없는, 클레멘타인을 만난다. 조엘의 첫 나레이션은 "나는 원래 낯선 여자를 만났을 때 바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었고, 식당에서 두 번째로 클레멘타인과 마주치자 "나는 왜 여자들이 조금만 호감있는 티를 내면 사랑에 빠질까"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조엘이 가진 특유의 '고요함'을 '수동' 내지는 '미온'이라는 단어로 대체하고 싶었다. 좋아하면 좋아하는 거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함은 대체 뭔데? 정말 별로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나눈 사랑의 기억은 우리가 피곤함을 못이기고 가뭇하게 빠져든 어느 오후의 꿈처럼 뒤죽박죽이다. 두 사람이 서로의 기억을 지우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먼저 선택한 건 클레멘타인이었고, 조엘도 복수심과 분노에 못이겨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어느 밤, 침대에 가만히 누운 채로 온 정신이 뒤흔들리는 조엘을 두고 현실에서는 온갖 사건들이 뒤죽박죽 일어난다. 어쩌면 꿈보다 더 꿈 같은, 막돼먹은 일들까지도.
조엘은 가장 가까운 기억에서부터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을 짚어간다. 시점이 과거로 흐를수록, 조엘의 눈가가 젖는다. "이 기억은 지우지 말아주세요." 세이프 워드를 외치면 그만두기로 했지만, 어쩐 일인지 멈춰지지 않는다. 조엘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클레멘타인의 손을 붙들고 달린다. "클레멘타인을 지우지 않을 거야." 예측할 수 없는 시한폭탄 같던 클레멘타인을, 사실은 그 자체로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조엘은 자신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기억까지 소환하여 도망친다. 그래도 무언가가 자꾸 무너진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바닷가의 집도 폐허가 되기 직전, 조엘은 클레멘타인에게서 처음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제야 조엘은 자신이 부단히 도망쳐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더 사랑하는 것은 더 약해지는 일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조엘은, 도망쳤다고 해서 덜 아프거나 덜 불행하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그러나 결국, 조엘은 기억을 잃는다.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몬탁으로 가는 기차에서 만난다. 아주 우연히. 'nice'라는 단어에 진저리를 치다가 5초도 안 돼서 'nice'라고 말해달라며 옆에 붙어 앉는 클레멘타인에게 조엘은 지독하게 끌린다. 둘은 결국 다시 사랑에 빠진다. 지극히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조엘을, 클레멘타인이 계속해서 끌어당긴다. 일전의 기억과 늘 같은 시작이다. 그러다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생긴다. 조엘은 늘 그랬듯 클레멘타인을 밀어내고, 클레멘타인은 다시 조엘을 찾아간다. 그리고 또다시 감정의 골이 생기고, 클레멘타인이 조엘의 집을 박차고 나간다. 늘 그렇듯 조엘은 집 안에 붙박이장처럼 우두커니 서있다. 멀어져가는 클레멘타인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강렬한 감정을 소유한 만큼 괴로워하는 클레멘타인은 잠시 걸음을 멈춘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 잠시 진정해야 한다. 다음 순간, 마침내! 조엘은 클레멘타인을 붙든다. 어떤 일이 있었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든, 어떤 일이 닥치든 클레멘타인을 붙들기로 결심한 참이다.
이제는 사랑 영화를 봐도 울지 않을 줄 알았는데 엔딩을 보면서 눈물이 났다. 버스를 타러 걸어가는 길, 찬바람이 뺨을 스치자 목도리에 고개를 묻고 코를 훌쩍였다. 어차피 내게 사랑했던 기억을,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잊겠냐는 질문은 아무런 힘도 없다. 나는 사랑에게서 도통 벗어날 수 없다. 대신 요근래 복잡하던 마음이 개는 것 같았다. 사랑은 능동이다. 사랑은 '하는 것'이다. 내가 원래 하지 않던 것도 기꺼이 하게 만드는 것. 내 마음은 수도 없이 내리친 철처럼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