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은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주말을 맞이하여 모처럼 한가한 아침 시간을 보냈다. 늦은 아침을 먹고 휴식을 취한 뒤, 비비안과 함께 집 근처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 갔다. 홍콩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비비안의 가족들과 함께 “얌차”를 즐겼던 딤섬 식당 바로 옆에 있는 카페였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한국에는 없지만, 홍콩에서는 수도 없이 볼 수 있는 편의점 “서클 케이”부터 시작해서, 야구장, 동네 음식점, 미장원, 야채가게 등등 모든 게 새로웠다. 신기한 마음에 길을 가던 도중 멈춰 서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 마주한 동네 풍경은, 이제는 꽤나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는 멈춰서 사진을 찍지도 않았고, 주변 풍경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으며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홍콩 생활에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홍콩의 봄 날씨는 들쭉날쭉하다. 어떤 날은 30도에 근접한 무더운 날씨였다가, 다음날이면 20도 정도의 선선한 날씨가 된다. 그러다가, 그다음 날은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내린다. 계절에 따라 날씨를 예상할 수 있는 한국의 날씨와 비교해 보았을 때, 홍콩의 봄 날씨는 변덕스럽고 예상하기 힘들다. 처음 홍콩에 왔을 때, 이런 변덕스러운 날씨에 당황했다. 오늘 반팔, 반바지를 입어도 밖에서 활동하기 힘든 무더운 날씨였다고 하더라도, 그다음 날에는 긴팔과 긴 바지를 입어도 약간은 추위가 느껴지는 날씨가 찾아올 수도 있었고, 비가 하루 종일 내리며 습한 날씨가 찾아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주는 그저께까지 조금 덥다가, 어제는 날이 흐려지며 선선해지더니 오늘은 기온이 더 떨어지고 비가 내렸다. '주말이라 화창한 날씨였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지만, 야속하게도 하늘엔 회색빛 구름이 꽉 차있었고, 비바람도 매우 세차게 불었다. 바닷가여서 그런지 바람이 더 세게 느껴졌고, 날씨에 압도당하는 듯한 느낌까지 들었기 때문에, 우리는 피신하듯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내 친구 멜리사가 예전에 아주 재미있는 말을 했어” 카페에서 음식과 음료를 시킨 뒤 비비안이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말?” 내가 물었다.
“아주 철학적인 이야기였는데, “계획은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라는 말이야. 네가 아무리 계획을 철저하게 세운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살다 보면 여러 변화에 필연적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변화가 때로는 네가 세운 계획에도 영향을 미쳐서, 원래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다는 거지. 나도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한국에서 생활할 줄 몰랐어. 그냥 홍콩에서 평생 살 줄 알았지. 근데 난 한국에서 1년 반이나 지내다 왔잖아.” 비비안이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네. 내 경우도 그래. 오래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고,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난 홍콩 영화랑, 주성치 같은 홍콩 영화배우만 좋아했지, 내가 진짜 이곳에서 생활하게 될 줄은 몰랐어.”
“그치. 그런 게 되게 신기해.”
“너는 그럼 어떤 인생 계획이 있었어?”
“사실 나는 진로에 대해서는 특별한 계획은 없었고, 사무실에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이면 된다고 생각했어. 일보다, 원래 사귀었던 남자 친구랑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었던 게 가장 큰 인생 목표이자 계획이었어.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로 그 남자랑 헤어지게 되었고, 지금은 너랑 지내고 있잖아. 이런 것만 보더라도 아무리 우리가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막을 수 없는 큰 변화가 온다면 그것을 거스를 수 없을 거야.” 비비안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앞으로 계획을 안 세울 생각이야?” 내가 물었다.
“아니. 계획은 필요해.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계획을 세울 거고, 지키려고 노력도 할 거야. 그런데, 만약 도중에 큰 변화가 나를 찾아온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거나 낙담하지는 않을 거야. 변화는 당연한 거니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 변화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그것에 대응할 수도 있지만, 변화가 너무 큰 경우에는 대응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면 되는 것 같아. 그렇게 되면, 어떠한 큰 변화가 나를 덮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오늘은 홍콩에 온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이다. 변덕스러운 홍콩 날씨가 이제는 좀 익숙해질 때쯤 비비안이 내게 이런 말을 한 건 우연이겠지만, 덕분에 지난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인생이 내가 세운 계획대로만 되길 바랬던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그 계획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더 심각했던 건, 그 인생 계획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닌 부모님 혹은 사회가 원하는 삶이었다. 계획을 벗어난 삶을 살면, 인생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질 것이라는 불안감이 하루하루를 지배했고 그럴수록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졌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이 계획을 완전히 "박살"내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무너질 줄 알았던 인생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으며 지루했던 삶은 다채로워졌고,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다. 이 해방감 앞에서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그동안 스스로를 옥죄었던 삶의 태도를 반성하면서 앞으로는 인생을 퍼즐처럼 맞춰가며 살기보다는, 인생이라는 바다 앞에 내 자신을 내던져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바다에 오는 크고 작은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몸과 마음으로 완벽하게 이해한 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나의 인생 계획에 존재하지 않았던 홍콩이라는 낯선 땅이었다.
2019/4/13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