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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슬욱 Nov 17. 2019

탑에 올라, 빵을 담는다

홍콩 청자우 섬

    작년 비비안과 함께 한옥에서 생활할 때 영국에서 온 M이 약 열흘 동안 한옥에서 묵고 간 적이 있다. M은 마른 체형, 185 정도 되는 큰 키에 멋진 은발을 갖고 있는 30대 초반의 신사였다. 웃음이 많아 친근한 인상을 주었던 그를 아침저녁으로 한옥에서 마주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사도 자주 나누게 되었고, 공용 주방에서 아침 식사도 몇 번 같이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꽤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의 부인은 홍콩 여자인 L로 10년 동안 교제한 끝에 2017년 부부가 되었다고 했다. L은 처음 2박만 한옥에서 M과 함께 묵다가 3일째 되는 날 업무 때문에 영국으로 먼저 돌아갔다. 비비안은 첫날 그들이 체크인을 할 때, 한옥 문을 열고 들어오는 L을 보자마자 "전형적인 홍콩 여자"처럼 생겼다고 확신하며 그녀에게 광둥어로 인사를 건넸다. L은 깜짝 놀라며 비비안에게 광둥어로 말을 건넸고 둘은 대화를 이어갔다.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M과 나 또한 상황이 재미있다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고, 두 개로 나뉘던 대화의 주제는 어느새 하나로 모여 네 명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M과 L은 이미 서울 여행 계획을 짜 왔는데 그들이 알아온 관광명소, 음식점, 카페가 현지 사람이 보기에도 방문할만한 가치가 있는 곳인지 검증받고 싶어서였는지 우리에게 그 장소들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러다가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홍콩으로 옮겨갔다. 

"홍콩에 와 본 적이 있나요?" M이 나에게 물었다.

"네. 2011년 여름에 4박 5일 일정으로 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어요." 내가 M에게 대답했다. 당시에는 홍콩에서 살기 전이었는데, 홍콩 방문은 대학교 1학년 때 여행을 다녀온 게 전부였다.

"혹시 청자우 섬에 가보셨나요?" M이 재차 내게 물었다.

"아니오. 처음 들어보는 섬인데요. 가볼만한가요?"

"사실 제 아내의 부모님이 청자우 섬에 살고 있어요. 저희는 결혼식을 홍콩과 런던에서 두 번 올렸었는데, 홍콩에서 올린 결혼식 장소가 청자우 섬이었죠.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에요. 도심과 떨어진 섬에서, 홍콩식으로 혼례를 했죠. 전통 의상을 입고, 전통 가옥에서 전통 의례를 따랐어요. 좋은 추억이에요. 그래서 저희는 청자우 섬에 자주 가요. 주로 L의 부모님을 만나러 가죠. 정말 매력적인 섬이에요. 홍콩에서 꽤 큰 섬 중 하나지만, 사람도 많이 살지 않고 높은 건물도 없죠. 가서 아무 생각 없이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터로 돌아오곤 해요. 지금 말하는 순간 머릿속에 섬 풍경이 그려지네요." 

"만약, 홍콩에 가게 된다면 저도 꼭 방문해 봐야겠는데요." 내가 대답했다

"맞아요. 정말 추천하는 홍콩의 섬이에요. 가는 것도 어렵지 않아요. 센트럴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정도면 섬에 다다를 수 있어요. 그런데, 가게 된다면 꼭 "번 타워 클라이밍 (Bun Tower Climbing)" 경기가 열릴 때 방문하세요." M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게 뭐죠?" 

"청자우 섬에서 1년에 한 번 열리는 가장 큰 축제예요. 축제날이 되면, 섬에 있는 광장에 10층 정도 되는 탑을 세워요. 그 탑 표면에는 "평안빵"이라고 하는 특별한 빵이 빼곡하게 붙어 있어요. 개수로 따지면 천 개 이상이 될 것 같아요. 평안 빵은 하얀 중국식 빵 안에 팥, 연꽃 앙금 등의 속을 채워 넣은 빵인데 청자우 섬 주민들의 평안을 기원하며 만들어 먹는 빵이라고 해요. 한가운데에 빨간색 한자로 "평안"을 찍어 놓은 게 매력적인 빵이죠. 이 평안빵을 제한 시간 안에 많이 담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게임을 합니다. 그게 바로 "번 타워 클라이밍"이에요."

"M이 나보다 더 잘 아는데?"  비비안이 약간은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이 축제 말이야. 홍콩 전역에 생중계될 정도로 인기가 많아."

"좀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축제 전에 대회에 참가할 8인의 선수를 미리 선발해요. 예선전인 거죠. 이 예선전을 통과한 최종 8인이 축제 당일 결승전에 출전할 수 있어요." 옆에 있던 L이 말했다. 

"맞아요. 만약 홍콩에서 한 가지만 할 수 있다면, 저는 펭자우에 가서 이 축제를 볼 거예요. 정말 특별하고, 스릴 넘치고, 재미있어요. 인생 최고의 경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꼭 보셔야 해요." M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홍콩에 가게 된다면, 저도 꼭 가볼게요."


    번 타워 클라이밍 축제 전날인 2019년 5월 8일, 비비안과 함께 청자우 섬으로 가는 배를 탑승하기 위해 센트럴 선착장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이용객이 별로 없어 한적한 선착장이 오늘은 축제를 즐기러 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탑승 대기줄은 선착장 입구부터 길게 늘어져 선착장 밖까지 길게 늘어서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 뱀 같았다. 사람이 많아 배에 탑승할 수나 있을까 걱정했지만 배가 추가 편성되어 생각보다 금방 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뱃멀미를 걱정했지만, 날이 좋아 파도가 거의 없어 선상 위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배를 탑승한 지 약 40분 만에 섬에 도착했다. 평소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한적한 이 섬의 도로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고, 모처럼 맞이하는 손님으로 거리와 상점은 활기를 띠고 있었다. 도로변에는 각종 기념품을 파는 가게, 차 가게, 음식점, 디저트 가게 등이 있었는데 점원들은 손님을 놓칠 새라 분주하게 가게를 홍보하고 있었다. 비가 오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날은 무척 좋았고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뜨거웠다. 우리는 길거리에서 팔고 있는 맥주와 함께 얼린 수박 디저트를 먹으며 더위를 식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길 곳곳에는 경찰과 소방대원이 추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관광객들을 특별히 신경 쓰지는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선착장에서 찍은 청자우섬 (좌), 사람들로 꽉 차있는 거리 (우)
선착장 앞 풍경 (좌), 수박 디저트 (우)

    번 타워 클라이밍은 사실 청자우 번 페스티벌 (Cheung Chau Bun Festival)의 일부다. 이 축제는 음력 4월 2일부터 8일까지 일주일 동안 열린다. 축제의 기원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청자우 섬은 흑사병과 해적의 공격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어느 한 어부가 "팍 타이 (Pak Tai)"라고 하는 신의 초상화를 들고 섬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악귀를 쫓은 뒤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청자우 섬에서는 축제 마지막 날인 8일 오후에 그때를 기념하며 청자우 거리 곳곳을 다니며 행진을 한다 (Parade of Floats). 아이들에게 다양한 색깔의 전통 중국 옷을 입히고, 큰 널빤지 위에 올린 뒤 거리 곳곳을 행진한다. 행렬에는 악기 연주자, 기수, 사자춤 및 용춤을 추는 무용가 등 다양한 사람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정신없이 섬을 구경하다가 골목을 울리는 악기 소리를 듣고 행진하는 골목으로 이동했는데, 행진은 이미 시작하여 골목 양쪽에 준비된 의자에는 이미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고, 그 뒤로 나있는 좁은 골목들에도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우리는 작은 골목 중 그나마 행진이 잘 보이는 골목에서 자리를 잡고 행진을 구경했다. 판자 위에 올라간 아이들이 눈 앞을 지나갔고, 중국 전통음악은 거리를 가득 매웠으며 아이들 사이사이로 사자춤, 용춤을 추는 무용수들이 껴있었다. 

   축제 기간 일주일 중 마지막 3일 동안 청자우 섬사람들은 고기를 일체 먹지 않고 채식을 한다. 이 3일 동안 청자우에 있는 모든 가게는 고기를 판매하지 않으며, 심지어 섬에 딱 하나 있는 맥도널드에서도 야채 패티를 넣은 야채 버거 단일 메뉴만 판매한다. 우리는 행진을 구경한 뒤, 이 특별한 햄버거를 맛보기 위해 사람들 무리를 헤쳐 나가며 맥도널드로 향했다. 맥도널드는 선착장 바로 앞에 있었다. 1층에 주문 카운터가 있고 2층에는 몇 개의 자리만 있는 작은 가게였는데 이 날은 특별한 햄버거를 맛보기 위한 사람들로 북적였다. 단일 메뉴만 판매하고 있어서 미리 버거를 준비해 놓았는지,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개의 햄버거 세트를 받을 수 있었다. 빵 사이에 버섯, 콩을 갈아 거기처럼 만든 뒤 그 위에 튀김 가루를 묻혀 튀겨낸 야채 패티가 들어간 작은 햄버거로 패티 사이사이에 옥수수, 완두콩, 당근 등이 들어가 있어 씹는 맛이 있었다.

"이 버거 어때?" 내가 비비안에게 물었다.

"나는 괜찮은데? 깔끔하고 괜찮네. 너는 어때?"

"나도 괜찮아. 그런데 그렇게 맛있지는 않네. 한 번쯤 먹어볼 만한 것 같아"

날이 너무 더웠으므로 버거를 먹고 남은 콜라를 한 잔씩 들고 빨대로 조금씩 마시면서 매장 안에서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매장 안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다음에 어디 가볼까?" 비비안이 나에게 물었다.

"밥을 먹었으니, 디저트를 먹어야겠지? 평안빵 한번 먹으러 가보자" 내가 비비안에게 제안했다.

"좋아."

야채버거 단일메뉴만 판매하고 있던 맥도날드와 매장 안에 붙어있던 안내문

    번 페스티벌 기간에는 "평안빵"을 먹는다. 이 빵은 찐빵같이 하얀 빵 안에 팥, 연꽃으로 만든 앙금을 채워 넣은 빵이다. 빵 위에 붉은색으로 "평안" 글자를 적어 넣는 게 특징이며 말 그대로 취식자의 평안을 기원하는 빵이다. 우리나라 찐빵과 같은 식감을 기대하고 먹었으나, 식감이 부드럽지 않고 질겼다. 축제 기간 동안 청자우 섬의 빵집에서는 평안빵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제빵사가 다 조리한 뒤 마지막에 도장으로 빵 위에 "평안" 도장을 기계적으로 찍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축제 마지막 날인 8일에서 9일로 넘어가는 자정에는 번 타워 클라이밍이 시작된다. 번 타워 (Bun Tower)는 말 그래도 빵으로 만든 탑으로 약 18미터 높이의 거대한 탑을 세워놓고 그 표면에 수백 개의 평안 빵을 붙인다. 3분 동안 빵을 가장 많이 담은 사람이 게임에서 승리하며, 행사 이전에 예선전을 통해 결선에서 대결할 최후의 8인을 먼저 선정한 뒤 행사 당일에는 이 8인이 경연을 펼친다. 예전에는 실제 빵을 매달아 놓았으며, 안정 장치 없이 게임을 진행했기 때문에 안정성 문제가 항상 제기되었는데 결국 1978년 탑이 쓰러지는 사고가 발생하여 행사 참가자 100여 명이 중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한 다음에 시합은 잠정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홍콩 정부는 안전장치 확보, 모형 빵 사용 등의 개선책을 발표한 뒤 2005년에 시합을 재개하여 올해까지 이어지고 있다.

평안빵을 팔고 있는 노포 (좌)와 가게 앞에서 판매중인 평안빵 (우)
평안빵 모형 (좌), 구매한 평안빵 (우)

   

점원이 기계적으로 빵 위에 도장을 찍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사람이 많을 것을 우려하여 비비안과 나는 경기 시작 4시간 전인 8시부터 경기장 앞에서 대기하다가 11시가 돼서야 경기장에 입장할 수 있었다. 가운데에는 60피트 높이의 타워가 세워져 있었으며 그 주변에서는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었다. 홍콩 전역에 생중계되는 축제인 만큼 중계 카메라가 이곳저곳 설치되어 있었고 리포터로 추정되는 사람이 경기장 이곳저곳을 돌며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선수들은 안전장치를 착용했고, 장내 아나운서는 선수를 한 명 한 명 소개했다. 8명의 선수 중 어깨까 떡 벌어지고 군살이 하나도 없이 근육질 몸으로 유독 눈에 띄는 선수가 있었는데, 현직 소방관으로 7년 전부터 작년까지의 대회 우승자라고 했다. 선수 소개가 끝나고, 정확히 정오가 되자 경기가 시작되었다. 탑 위쪽에 있는 빵일수록 높은 점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선수들은 모두 같은 전략을 구사했다. 탑 꼭대기까지 최대한 빨리 올라간 뒤, 위에서부터 빵을 쓸어 담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탑을 올라갈 때가 장관이었다. 8명의 참가자들이 탑의 꼭짓점으로 모이는 게 꼭 자석에 끌려가는 철심 같았다. 시합 중간에는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는 데 애를 먹는 사람도 있었고, 빵을 잘 못 집어 자꾸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눈에 띄었던 소방관만은 3분 동안 안정된 자세로 빵을 가방 안에 쓸어 담았다. 경기 초반에는 소방관과 비등비등하게 호흡을 맞추는 경쟁자가 몇 명 있기는 했지만, 중후반으로 넘어가자 소방관만이 눈에 띄어서 굳이 발표하지 않더라도 누가 우승할지 추측하는 게 어렵지 않을 정도였다. 소방관은 올해로 8번 연속으로 우승했고, 경기가 끝난 뒤 우승 트로피와 상금 전달식이 있었다. 새벽 한 시에 가까운 시간에 행사장의 불은 꺼졌고, 허기진 배를 달래러 거리에 있는 국수를 한 그릇씩 먹고 숙소로 돌아갔다.

예전 번 타워를 복원해 놓은 조형물 (좌), 경기장 모습 (우)
경기가 시작되면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해 선수들이 타워를 오른다 (좌), 선수들이 꼭대기에 다다른 뒤 빵을 담는 모습 (우)

    지금 내 눈 앞에는 청자우 섬에서 산 평안빵 기념품이 보인다. 여행에 다녀온 뒤 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흐려진다. 이 망각을 최대한 줄이기 위하여 여행지에서의 추억을 담아 기념품을 꼭 사 온다. 평안빵 기념품을 보며 축제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 때로부터 6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섬에 다녀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홍콩은 상황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5월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였던 홍콩인데 6월 이후 홍콩에 오는 사람이 줄어, 지금은 거리가 한산하다. 평안빵 너머의 창문 밖에서는 열 두시가 넘은 시각이지만 사람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찰이 출동하는지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도 들린다. 이내 사이렌 소리는 멈추고, 경찰과 시민이 대립하는 소리가 들린다. 10층 높이의 아파트지만 온 동네를 울릴 정도로 똑똑히 들린다. 사람들이 경찰에게 소리를 치지만 소용이 없는 것 같다. 동네는 곧 잠잠해졌다. 독특한 문화가 도시 이곳저곳 녹아있는 홍콩. 이 문화를 하나하나 찾아가고 경험해 보는 재미가 있는 홍콩. 이 매력적인 도시가 예전의 빛을 되찾을 수 있을까? 

숙소에서 바라본 청자우 섬의 바다 풍경.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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