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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경제적 독립운동가 Aug 20. 2020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청춘의 독서_유시민 

청춘의 독서 - 유시민

"청춘의 독서"는 유시민 작가가 청년 시절 삶의 이정표가 되었던 고전들을 다시 읽으며, 잃어버린 삶의 행로를 다시 찾고자 하는 책이다. 그는 총 14권의 고전을 다루면서, 문명사의 이정표를 세웠던 위대한 지성인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과거의 자신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독서 중 작가가 책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들려주고 있다. 


지금의 나를 만든, 나의 "청춘의 독서"는 무엇이었을까? 

시간을 갖고 정리를 해봐야 하겠지만, 아래의 책들은 목록에 포함될 것이다.


-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 나관중, 삼국지 (이문열 평역)

-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 

- 박노자, 좌우는 있어도 위 아래는 없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 조정래, 한강

- 버락 오바마, 담대한 희망


내가 "청춘의 독서"를 펴낸다면, 나는 각각의 책과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과거의 나와는 어떤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처음 접하고, 내가 알고있던 역사와 정반대의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대화를 걸어올까. [좌우는 있어도 위 아래는 없다]를 읽고, 너무나 무비판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당연시 해왔으며, 지식인, 세계인으로써의 의무를 망각한 채 살아왔음을 반성하던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에게 어떤 대화를 걸어올까.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서 '똘레랑스 (관용)'라는 개념을 처음 접하고 프랑스와 한국에서 '파업'을 대하는 언론과 시민들의 자세를 비교해보던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청춘의 독서" 본문 내용 중, 02 /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전환시대의 논리 - 리영희]에서 발췌한 [기자 풍토 종횡기]라는 수필은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읽어도 나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거나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기자도 얼마쯤 혼탁한 물에서 헤엄치다 보면 의식이 달라진다. 면역이 된다. (......) 여러 해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습기자로서 선배 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반을 소리 높이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야. 건전한 국민 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그것으로서의 동화 과정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남의 집의 눈총밥으로 마쳤다는 사실이나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어제의 불우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에 크게 탓하지 않아도 좋다. 문제는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된 그의 머리에서 기획되는 특집 기사가 '매니큐어의 예술'이니 '바캉스를 즐기는 법' 따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논설위원이 되거나 평론의 한 편이라도 쓸 때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게 맡기기를' 따위가 아무 저항감 없이 나오게 된다. 서울의 종합병원의 환자가 레지던트 파업으로 하루 이틀 치료를 못 받는 것에 격분하는 기자는 이 나라의 1342개 면이 의사 없는 무의촌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 많은 농촌에서 일생 동안 의술이라는 현대 문화의 혜택을 거부당한 채 죽어가는 백성이 왜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사회의 체제와 결부해서 생각해볼 리 없다. (......)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유시민, 청춘의 독서

유사한 예로, [한강]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어려운 삶을 살던 '허진'이 대기업에 입사하여 승승장구하면서 차츰 경영자의 시각을 갖게 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을 도와주었던 유일표와 노동운동에 대해 사고방식의 마찰을 빚는 모습을 보며 그의 시각 변화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던 과거의 나는 지금의 나와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우리는 우리가 읽은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며 (마틴 발저), 내가 읽은 책이 곧 나의 우주다 (강석주)라고 했다. 책과의 대화, 지식인들과의 대화, 과거의 나와의 대화를 통해 오늘도 나와 나의 우주는 만들어져가고 있다. 




01 / 위대한 한 사람이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죄와 벌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p.19

'어째서 착한 사람들이 이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인간 사회는 이러한 부조리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죄와 벌]을 읽는 동안 내내 이런 의문이 나를 사로잡았다.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과 소설 속에 나오는 1860년대 제정러시아가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기 어려운 비슷한 사회로 보였다. 그때 대한민국은 조세희 선생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동철'이라는 필명을 쓰는 정체불명 작가의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을 낳은, 정의가 짓밟히고 악당들이 활개 치며 착한 사람들이 멸시당하는, 바로 그런 나라였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어떤 사회적 악덕이 존재한다면, 그러한 사회악은 도대체 왜 생겨났는가? 사회악을 완화하거나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와 벌]은 내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떠난 독서와 사색, 행동과 성찰, 지금도 끝나지 않았으며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그 기나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p.30

스탈린과 히틀러 같은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에 입각해 '모든 종류의 폭력을 사용할 권리'를 행사함으로써 구축했던 사회를 가리켜 우리는 '전체주의'라고 한다. 이 체제는 인간의 생명과 권리를 학살하고 억압하는 '제도화된 악'이었다. 스탈린과 히틀러, 그리고 이들의 지시를 받아 대량 학살을 저질렀던 수많은 부하들이 전당포 노파 자매를 죽인 것 때문에 라스꼴리니꼬프가 겪어야 했던 끔찍한 정신적 번민과 고통에 시달렸다는 증거는 별로 없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죄악을 저지름으로써 어떤 선한 목적도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인류는 20세기의 전체주의 경험을 통해 나쁜 수단으로는 결코 좋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p.32

라스꼴리니꼬프의 '초인론'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체주의 체제로 현실화되었다.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려는 신념'을 실행하기 위해 "온갖 종류의 폭력과 범죄를 저지를" "완전한 권리를" 행사한 전체주의 체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동등한 인권과 참정권을 부여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에게 의사 결정권을 제한적으로 위임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있다. 20세기 세계사는 소수의 '비범한 사람들'이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수없이 많은 소냐와 두냐들이 좋은 세상을 만든 것이다. 만약 도스토옙스키가 20세기를 목격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만 이룰 수 있다."


02 /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전환시대의 논리 - 리영희]


p. 42

이 모두가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베트남전쟁은 이미 끝난 뒤였지만, 대한민국은 벌거벗은 임금님을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없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베트남전쟁은 "월맹의 침략에 맞서 자유민주주의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미국과 혈맹이 함께했던 정당한 전쟁"이어야 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참전은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혈맹의 도리를 다한 자랑스러운 참전"이어야 했다. 월남과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온 국민이 "옆집에 오신 손님 간첩인지 다시 보자"라는 투철한 안보 의식으로 무장하고, "박정희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론을 통일"하여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야"만 했다. 다른 말을 했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지하실로 끌려간다는 무서운 소문이 도는 나라였다. '북괴의 간첩'이나 '용공분자'로 몰리지 않으려면 진실을 알려고 하지도 말아야 했고, 진실을 알아버린 경우에는 그것을 남에게 말하지 말아야 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비굴과 자기 모독, 그리고 지적 암흑 상태"가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국민은 이러한 '지적 암흑 상태'를 스스로 극복했다. 용기와 신념을 지닌 언론인들 덕분이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71년 6월 13일 <뉴욕타임스>가 미국 국방부 극비 문서를 특종 보도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게 된 모든 과정과 배경을 담은 문서였다. 미국 정부는 이것을 보도하는 행위가 간첩죄에 해당한다며 보도 금지 가처분을 신청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워싱턴포스트>가 뛰어들었다. 결국 <뉴욕타임스>의 첫 보도가 나간 지 17일째 되던 6월 30일, 미국 연방 대법원은 언론의 손을 들어주었다. 국방부 기밀문서 보도 금지 가처분은 위헌적 언론통제이고, 그 보도가 국가 안보를 위협한다는 사실을 정부가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결한 것이다.


p.46

[전환시대의 논리] 제5부에 실린 [기자 풍토 종횡기]라는 수필은 원래 월간 <창조> 1971년 9월호에 기고한 글이다. 그런데 무려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 읽어도 독자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고 자기의 일상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놀라운 일이다.


- 기자는 수습 또는 견습이라는 '미완성'의 자격으로서도 출입처에 나가면 위로는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은행 총재로부터 아래로는 국장, 부장, 과장들과 동격으로 행사하게 된다. 그들이 취재 대상의 하부층과 접촉하는 기회는 오히려 드물다. 장관이나 정치인이나 사장, 총재들과 팔짱을 끼고 청운각이니 옥류장이니 조선호텔 무슨 라운지니 하면서 기생을 옆에 끼고 흥청댈 때, 그 기자는 일금 1만 8000원 또는 고작해서 일금 3만 2000원이 적힌 사내 사령장을 그날 아침 사장에게서 받을 때의 울상을 잊고 만다. 

(중략)

처음에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거나 돼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기자도 얼마쯤 혼탁한 물에서 헤엄치다 보면 의식이 달라진다. 면역이 된다. (......) 여러 해가 걸리는 것이 아니다. 어제 수습기자로서 선배 기자들의 무력과 타락과 민중에 대한 배반을 소리 높이 규탄하던 사람이 내일은 벌써 "골프는 결코 사치가 아니야. 건전한 국민 오락이야"라는 말을 하기 시작한다. (......) 여기서부터 그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지배계급의 그것으로서의 동화 과정을 걷는다. 


고등학교를 남의 집의 눈총밥으로 마쳤다는 사실이나 갖은 수모를 겪으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나온 어제의 불우를 잊어버리는 것은 그 개인의 문제이기에 크게 탓하지 않아도 좋다. 문제는 부장이 되고 국장이 된 그의 머리에서 기획되는 특집 기사가 '매니큐어의 예술'이니 '바캉스를 즐기는 법' 따위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논설위원이 되거나 평론의 한 편이라도 쓸 때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만 하는 것, 현실은 정부에게 맡기기를' 따위가 아무 저항감 없이 나오게 된다. 서울의 종합병원의 환자가 레지던트 파업으로 하루 이틀 치료를 못 받는 것에 격분하는 기자는 이 나라의 1342개 면이 의사 없는 무의촌이라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다. 그 많은 농촌에서 일생 동안 의술이라는 현대 문화의 혜택을 거부당한 채 죽어가는 백성이 왜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사회의 체제와 결부해서 생각해볼 리 없다. (......) 모든 것이 '가진 자'의 취미와 입장에서 취재되고 기사화된다. '지배하는 자'의 이해와 취미에서 신문은 꾸며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가진 자와 지배하는 자는 대연각의 음밀한 방에서 나오면서 이 기자의 등을 다정하게 두드린다. "역시 이완용 기자가 최고야. 홍경래 기자는 통 말을 알아듣지 못한단 말이야." 그러고는 득의만연해서 돌아서는 이완용 기자의 등 뒤에서 눈을 가늘게 하여 회심의 웃음을 짓는다.


국민의 소시민화, 백성의 우민화, 대중의 오도라고 말하는 학생들의 비난이 전적으로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부인할 용기를 가진 기자가 몇 사람이나 될지 의심스럽다.


p.49

지식인은 무엇으로 사는가. 리영희 선생은 말한다. 진실, 진리, 끝없는 성찰, 그리고 인식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신념과 지조. 진리를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용기. 지식인은 이런 것들과 더불어 산다.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니 선생이 내게 묻는다. 


너는 지식인이냐. 너는 무엇으로 사느냐. 너는 권력과 자본의 유혹앞에서 얼마나 떳떳한 사람이었느냐. 관료화한 정당과 정부 안에서 국회의원, 장관으로 일하는 동안 비판적 지성을 상실했던 적은 없었느냐. 성찰을 게을리하면서 주어진 환경을 핑계 삼아 진실을 감추거나 외면하지 않았느냐. 너는 언제나 너의 인식을 바르게 하고 그 인식을 실천과 결부시키려고 최선을 다했느냐. 


부끄럽다. 당당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사상의 은사'앞에 서는 것이 정녕 이토록 두려운 일인가. 


03 / 청춘을 뒤흔든 혁명의 매력 

[공산당 선언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p.55

[공산당 선언]은 포악한 권력의 무자비한 압제와 넘어설 수 없는 절대 빈곤의 장벽에 절망한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숨이 넘어가는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생기를 불어넣는다. 억압과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연대하고 투쟁하는 것이, 단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도모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하고 역사와 문명의 승리를 앞당기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는 신념은 그 얼마나 매력적인가! [공산당 선언]을 읽는 동안 가슴이 쉬지 않고 두근거렸다. 19세기 유럽의 청년 지식인들과 노동자들이 이 선언문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사회주의혁명, 그 영광과 좌절의 역사를 알지만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 막히는 찬란한 이상이었다. 


p.58

힘없는 시민만 그렇게 당한 게 아니었다. 정당의 총재도 소위 '용공조작'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특히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사실상 승리를 거두었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 씨에게 집요하게 공산주의자 혐의를 씌웠다. 일본에서 납치해 죽이려 했고, 집 박으로 나갈 수 없도록 불법적으로 연금했으며, 군사재판에 회부해 사형선고를 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미얀마 군사정권이 아웅 산 수 치 여사에게 가하고 있는 탄압과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 10년이 되어서도 명색이 '중도 실용'이라는 간판을 걸고 집권한 정권의 공안 기관과 집권당 간부들이 정치적 적대 세력에게 '친북 좌익 세력'이라는 올가미를 던졌다. 

(중략)

그러나 유사 이래 인간이 만든 모든 권력은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제약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지금 두려움 없이 [공산당 선언]을 읽는 나는 행복하다. 거기에서 진리를 찾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오류를 담은 책을 마음대로 읽을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p.62

이와 같은 역사관이 말하는 바는 분명하다. 사회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적대적인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계급들 사이의 투쟁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동력이다. 예전의 사회가 그랬던 것처럼 자본주의 사회에도 적대적인 계급이 있다. 생산수단 또는 자본을 소유한 부르주아계급 (부르주아지)과 자본을 소유하지 않은 프롤레타리아계급 (프롤레타리아트)이다. 자본주의사회는 서로 투쟁하는 이 적대적인 두 계급의 통일체다. 마르크스는 이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함으로써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가 영원히 종식된다고 했다. "계급투쟁의 역사"였던 "지금까지 모든 사회의 역사"가 종말을 고하고, 계급도 계급투쟁도 없는 '공산주의 천년왕국'이 도래하는 것이다. 영국이나 독일 같은 개별 국가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확신했다. 


p.67

문제는 이론가 마르크스가 아니라 혁명가 마르크스에게 있었다. 역사법칙에 따라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내부에서 새로운 계급과 계급투쟁이 발생함으로써 역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그가 말했다면, 공산주의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혁명가 마르크스는 자기가 원하는 세상의 변화를 보고 싶은 나머지 이론가 마르크스를 망가뜨렸고, 이론가 마르크스는 결과적으로 대중을 속인 셈이 되었다. 


둘째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결국에는 인간 사회를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로운 발전이 만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되는 연합체"로 만들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인간이 과연 그런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존재인지 의심했다. 사회적 연대 의식과 사명감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더러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보통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만으로는 살지 못한다. 일시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영원히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이기적 욕망 추구를 부정하고 자유로는 개성의 발현을 극도로 억압하는 사회는 오래 지속되기 어려우며, 지속된다 하더라도 좋은 사회라고 말하기 어렵지 않을까.


p.70

그러나 마르크스가 모든 점에서 틀렸던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자본주의 비판 이론으로서의 가치와 생명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세계화, 글로벌 시장, 금융 독점자본의 출현,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금융 위기와 산업공황, 끝없이 실업자와 산업예비군을 만들어내는 노동 절약형 기술혁신, 심화되는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 비록 적절한 해법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할지라도, 언제나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어찌 고맙고 귀하지 아니한가. 


04 / 불평등은 불가피한 자연법칙인가 

[인구론 - 토머스 맬서스]


p.75

이는 곧 맬서스가 인구문제를 제기한 것은 그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해결이 불가능한 것이므로 이를 방임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모든 빈곤과 악덕은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특히 하층민들에게 설득하기 위한 것임을 말해준다. 즉 맬서스에 의하면 사회적 불평등과 하층민의 빈곤은 인구법칙이라는 자연법칙의 필연적인 결과로 된다. 따라서 하층민의 고통은 그들 스스로의 책임이며 이를 개선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자연의 질서를 거역하는 것이며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p.83

[인구론] 초판에서 콩도르세의 진보 사상을 주된 공격 목표로 삼았던 맬서스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 정리한 제6판에서는 페인의 [인권]을 최종 표적으로 설정했다. 페인은 1791년과 1792년에 쓴 [인권]에서 왕정을 비판하고 공화정을 옹호하는 한편, 부자들에 대한 누진적 소득세를 재원으로 삼아 대중 교육과 실업 구제 등의 공공 사회정책을 실시하자고 주장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프랑스대혁명이 낳은 1795년의 [인권선언]은 페인의 주장을 반영하여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없는 모든 시민은 동포의 도움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선언했다. 이른바 자연법의 토대 위에 '사회권적 기본권'을 수립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사상은 모든 문명국가의 보편적 규범이 되었다. 자유권적 기본권과 아울러 사회권적 기본권도 인간의 천부적 권리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10조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권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제34조는 다음과 같다.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신체장애자 및 질병, 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렇지만 맬서스는 달랐다. 그는 자연법에 의해서 성립되는 권리는 재산권 한 가지밖에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사회권적 기본권 그 자체를 부정했다. 


p.85

[인구론]은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모든 형태의 이상주의 사상과 사회운동에 대한 유죄 선고 판결문이었다. 맬서스가 보기에 인간의 평등과 생존권을 옹호하는 모든 사상과 이론은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유해한" 것이었다. 사회적 불평등과 불공정을 비판하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 자연법적 권리를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망상의 산물일 뿐이었다. 맬서스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자기의 신념을 밀고 나갔다. 그는 중세기의 봉권적 특권에 근거를 둔 사유재산과 노동자 농민에 대한 자본가들의 가차없는 수탈, 해외 식민지에서 저지른 학살과 약탈에 대해 아무런 비판적 문제의식도 표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들을 토대로 진행된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자연법에 의거해 정당한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간주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부자의 이데올로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처음 [인구론]을 읽었을 때, 나는 맬서스를 미워하고 저주했다. 내가 책과 현실에서 만난 어느 누구도 맬서스처럼 뻔뻔하고 냉정한 어조로 가난한 사람을 모욕하고 부자를 편들지는 않았다. 


p.89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맬서스를 "악의에 가득 찬 심술궂은 이데올로그"로 볼 수는 없다. 그 역시 진지한 자세로 나름의 선한 목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맬서스는 가난한 하층민들에게 자녀를 많이 낳지 말라고 충고했다. 마르크스는 혁명을 통한 프롤레타리아 해방을 예언했지만 맬서스는 오로지 인구 증가를 억제하는 것만이 빈곤을 탈출하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역설했다. 인구 증가를 억제하면 임금이 오를 것이라고 걱정하는 자본가들에게 위선을 그만두라고 일갈했다. 


p.92

다시 [인구론]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우리 모두는 갖가지 편견과 고정관념을 지니고 산다.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모든 종류의 통념이 논리적, 경험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일일이 시험하고 검토할 수 없는 일이기에, 많은 경우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념과 사고방식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나는 맬서스와 얼마나 다른가. 내가 옳다고 믿는 것, 내 신념을 받치고 있는 수많은 통념들 가운데 그릇된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없을 것인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 속에도 그런 것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인구론]과 맬서스는 금이 간 거울이다. 내 생각도 그릇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일그러져 있지 않은지 경계하면서, 거기에 나를 비추어 본다. 생각은 때로 감옥이 될 수 있다!


05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대위의 딸 - 알렉산드르 푸시킨]


p.105

그런 푸시킨에게 제정러시아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그는 [대위의 딸] 곳곳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진보적 견해를 매우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노출시켰다. 19세기 제정러시아에 이런 말을 하는 시인이 있었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21세기 세계 최고 문명국가라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전쟁 당시 '테러 혐의자'들에 대한 고문을 공식 허용하고, 부시 대통령과 체니 부통령, 럼스펠드 국방장관 등이 그것을 정당화했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와 비교하면, [대위의 딸]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은 마치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난다. 겉보기에 황제의 자비로움을 칭송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제정러시아의 전제정치를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다. 


- 고문은 옛날부터 우리의 사법제도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으므로 그것을 폐지하라는 여제 폐하의 은혜로운 칙령도 오랫동안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피고 자신의 자백은 그를 제대로 기소하는 데 불가피한 절차라고들 생각했지만 사실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건전한 법률적 사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생각이다. 피고의 범죄 부인이 그의 무죄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없다면 그의 자백은 더더욱 유죄의 증거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야만적인 관습의 폐지를 유감으로 생각하는 늙은 판사들의 얘기를 나는 가끔 듣는다. 


p.107

푸시킨의 육신은 러시아인의 피를 받았지만 정신은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전쟁의 세례를 받았다.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를 침략했다가 참혹한 패배를 당했는데, 이 전쟁을 러시아인은 '조국 전쟁'이라고 부른다. 이때 퇴각하는 프랑스 군대를 추격하여 서유럽으로 간 한 무리의 청년 장교들이 있었다. 평신 출신 병사들과 사선을 넘나들면서 고락을 나누었고, 서유럽에서 난생처음 자유의 공기까지 마시고 돌아온 이 청년 장교들은 혁명적 지식인들과 함께 차르 전제정치와 농노제도를 철폐하고 러시아를 입헌군주제, 공화제, 연방제 국가로 개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를 만들었으니, 역사는 이들에게 '데카브리스트 (12월당원)'라는 이름을 주었다. 푸시킨은 비밀결사에 가입하진 않았지만 이들 데카브리스트의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었다. 

(중략)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은 세계 역사에서 달리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철없는 청년들의 고결한 반란"이었다. 인간의 존엄성과 문명의 진보에 대한 신념, 낙후하고 퇴락한 조국 러시아를 살리겠다는 애국심, 체제를 전복하는 사업에 얼마나 큰 따르는지 전혀 헤아리지 못한 순진무구함, 전제 왕정과 계급제도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체제에 반기를 든 아름자운 자기부정, 데카브리스트의 비극적 최후는 이런 요소들이 버무려진 역설의 미학과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실제 상황으로 보여주었다. 푸시킨의 문학과 삶은 그 상황의 일부였다.


p.112

푸시킨은 200년 전 전제정치와 농노제도가 실시되던 동토 러시아에서 인간의 자유를 노래했다. 그는 인류가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휴머니즘과 민중에 대한 사랑을 문학으로 꽃피웠다. 당대의 현실에 대해 그가 느꼈을 분노, 환희, 절망,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전해 오기에, [대위의 딸]을 읽으면 가슴 깊은 곳이 아려 온다. 푸시킨은 황제의 권력으로 모독할 수 없었던 고귀한 영혼이었다. 그는 얼어붙은 땅에서 솟아오른 꽃이었다. 아무리 두꺼운 먹구름도 그 빛을 가리지 못한 밤하늘의 별이었다. 그 별은 오늘도 문명의 하늘에서 빛나고 있다. 푸시킨!


06 / 진정한 보수주의자를 만나다 

[맹자 - 맹자]


p.120

맹자는 제후의 지위를 가진 자로서 왕을 죽이고 새 왕조를 세웠던 주 무왕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은나라 주왕이 폭정으로 인의를 해쳤고 간언하는 충신을 모두 죽였으며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으니 군주로서의 정당성 또는 정통성을 이미 상실했다고 본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무왕은 반역자가 아니며, 주나라의 정통성을 의심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왕조를 바꾸는 역성혁명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사상을 반길 왕이 있을까?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덕으로 선정을 펴라는 맹자의 왕도 정치 이론을 부국강병에 몰두하던 전국시대 왕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그 이후 여러 통일 왕조들에서도 맹자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혹시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의심해본다.


p.132

보수가 이념이 아니라 "연속성과 안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전통적인 제도와 관습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라면, 맹자는 정말 멋진 보수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흔히들 보수가 물질적 이익과 세속적 출세를 탐낸다고 하지만 진짜 보수주의자는 이익이 아니라 가치를 탐한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다른 누군가와 싸우는 전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면에 정체성의 닻을 내린다. 진짜 보수주의자는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자신을 성찰한다.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누가 자기를 알아주지 않아도 실의에 빠지지 않으며 깊은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빛난다. 맹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나는 측정할 수 없는 사유의 깊이를 느낀다. 


- 내가 남을 사랑해도 남이 나를 가까이하지 않으면 인자한 마음이 넉넉했는지 되돌아보고, 내가 남을 다스려도 다스려지지 않으면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지 않았는지 반성해볼 것이며, 예로 사람을 대해도 나에게 답례를 하지 않으면 공격하는 마음이 충분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일을 하고도 성과를 얻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한다. 자신이 바르다면 온 천하 사람이 다 내게로 귀의할 것이다.


07 / 어떤 곳에도 속할 수 없는 개인의 욕망 

[광장 - 최인훈]


p.143

특고는 특별고등경찰, 일제가 정치운동과 사상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경찰 조직이다. 조선인 특고 형사는 독립운동가와 민족 지사, 공산주의 운동가와 노동운동가들을 감시하고 체포하고 고문하는 등 가장 악랄한 친일 매국 행위에 종사했지만 아무도 그로 인해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의 친일파 재등용 정책에 힘입어 신생 대한민국 경찰 조직의 심장부에 눌러앉았다. 이승만 - 박정희 - 전두환 시대 공안 기관들이 저지른 야만적 고문 행위는 모두 일제 특고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 육사 출신으로 관동군 장교 복무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광장]에 묘사된 이 장면은 그가 대통령으로 있었던 시대에도 변하지 않은 현실이었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지 않은,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등용했던 대한민국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의심받는 나라였다. 


p.146

다음 문장들을 보면 최인훈 선생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체제가 실패로 끝날 것임을 분명하게 예견했다. 인간의 욕망을 억압하면서 사회적 사명감으로 사람을 강제하는 체제, 개인의 자발성과 신명을 말살해버리는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작가의 진단이었다.


-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고장. 북조선 사회에 무겁게 덮인 공기는 바로 이 터부의 구름이 시키는 노릇이었다. 인민이 주인이라고 멍에를 씌우고, 주인이 제 일 하는 데 몸을 아끼느냐고 채찍질하면, 팔자가 기박하다 못해 주인까지 돼버린 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걸음을 떼어놓는다. '일등을 해도 상품은 없다'는 데야 누가 뛰려고 할까? 당이 뛰라고 하니까 뛰긴 해도 그저 그만하게 뛰는 체하는 것뿐이었다. 사람이 살다가 으뜸 그럴듯하게 그려낸 꿈이, 어쩌다 이런 도깨비놀음이 됐는지 아직도, 아무도 갈피를 잡지 못해서, 행여 내일 아침이면 이 멍에가 도깨비방망이로 둔갑할까 기다리면서, 광장에는 꼭두각시뿐 사람은 없었다. 


인민 정권은, 인민의 망치와 낫이 피로 물들여지며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인 붉은 군대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바스티유의 노여움과 기쁨도 없고, 동궁 습격의 아슬아슬함도 없다. 기요틴에서 흐르던 피를 본 조선 인민은 없으며, 동상과 조각을 망치로 부수며, 대리석 계단으로 몰려 올라가서, 황제의 안방에 불을 지르던 횃불을 들어본 조선 인민은 없다. 그들은 혁명의 풍문만 들었을 뿐이다. 30년 전에 흥분이 있었다는 풍문을 듣고 흥분할 수 있다면 그는 감정의 천재다. 1789년에 있었던 흥분의 얘기를 듣고 흥분할 수 있다면 그는 천재다. 북조선 인민에게는 주체적인 혁명 체험이 없었다는 데 비극이 있었다. 공문으로 명령된 혁명, 위에서 아래로, 그건 혁명이 아니다. 그 공문을 보낸 사람이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이라도 그렇다는 일은, 이 사상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서운 일이었다.


p.152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들었다는 사실을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사실 이것은 최인훈 선생이 이미 분명하게 다루었던 문제였다. 나는 여러 해 전에 그것을 읽었지만, 작가와 질적으로 전혀 다른 경험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을 내면에 접수할 수 없었다. 다시 [광장]을 읽으면서, 이명준의 말을 내가 그동안 무의식 안에 담아두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은 이명준이 북의 고위관리로 있던 아버지에게 퍼부은 말이다. 아버지는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한다. 혁명은 없고 혁명의 소문만 있는 잿빛 공화국에서도 아버지는 그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였을 뿐이다. 


- 아하, 당은 저더러는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라는 걸.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지을 테니, 너희들은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말하기를......" "일찍이 위대한 스탈린 동무는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동무들에 의하여, 일찍이 말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제 아무도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아, 이 무슨 짓입니까? 도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겁니까?

(중략)

그런데 그로부터 무려 30년 세월이 지난 뒤에 새로운 이명준들이 나타났다. 최인훈의 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른 북한 경험을 가진 세대의 이명준들이었다. 


1980년대 중반 대한민국에서 한 무리의 청년들이 집단적으로 관념의 월북을 시도했다. 소위 '주사파' 대학생들이다. 그들의 관념적 월북은 이명준의 월북과 마찬가지로 강요된 월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관념적 월북으로 내몬 것은 광주에서 대학살을 저지르고 권력을 움켜쥔 정치군인들, 인권유린과 부정부패를 저지른 독재 권력의 압도적인 물리력에 대한 증오감과 좌절감이었다. 


p.155

이명준의 자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설 속에서 그는 망명자로서 자존심을 지키면서 소박하되 품격 있는 삶을 영위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것은 "붉은 심장의 설레임"이 있고 "가슴속에서 자랑스러운 정열이 불타는" 가치 있는 삶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바다의 심연에 몸을 던졌다. 바다에 뛰어들기 전 이명준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채 전사한 여인 은혜가 "무덤 속에서 몸을 풀었고", 그 모녀가 두 마리 갈매기로 환생해 석방 포로를 실은 타고르호를 따라 마카오까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그들과 하나가 되어 사랑하며 살아가기 위해 몸을 던졌다. 


08 / 권력투쟁의 빛과 그림자 

[사기 - 사마천]


p.170

사마천은 공자와 달리 역사를 사실에 입각해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렸했을 뿐만 아니라 서술 형식도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기술하는 [춘추]의 편년체보다 훨씬 입체적인 기전체를 창안했다. [사기]는 역사를 다섯 가지 형식으로 서술했다.


그 중심은 제왕을 중심으로 거시 권력의 변화를 다룬 [본기]다. 황제에서 순임금까지 다섯 명의 전설 시대 제왕을 다룬 '오제본기'부터 '진시황본기'와 '항우본기'를 거쳐 자신이 모셨던 무제 시대를 서술한 '효무본기'까지 사마천은 3000여 년에 걸친 중국 왕조의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집대성했다. 

(중략)

마지막이 뛰어난 인물들을 다룬 [열전]이다. 70편인 [열전]은 [본기]와 짝이 되어 기전체 역사서인 [사기]의 두 축을 형성한다. 


p.173

[사기]를 다시 살펴보면서 나는 한신의 죽음이 적응의 실패에서 온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 비극이 아니라,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가 말한 것처럼 역사에서 늘 일어나는 '역할의 전도' 현상에 한신이 적응하지 못했거나 적응을 거부함으로써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리고 인간적 비극으로 말하면 한신을 버린 한고조의 삶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p.174

새 시대는 새로운 사람을 부른다. 구시대의 도전에 성공적으로 응전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새 시대의 도전에 제대로 응전하지 못하면 어떤식으로든 도태되고 만다. [사기] 전체를 통틀어 이러한 '역할의 전도' 현상을 가장 도드라지게 보여준 인물이 한신이다. 그런데 한신의 비극을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숙손통이라는 지식인이었다. 숙손통은 한신이 숙청당한 바로 그 시기에 황제의 총애를 받는 권력의 실세로 떠올랐으며, 그의 성공은 한신의 비극과 극적으로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진다. 


p.184

정치는 위대한 사업이다. 짐승의 비천함을 감수하면서 야수적 탐욕과 싸워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한신과 유방이 빛을 좇는 불나방처럼 권력을 향한 본능에 이끌려 투쟁의 소용돌이에 뛰어들었다 할지라도, 그들은 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인의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만하면 충분하지 아니한가. 비록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한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때로 맹목적 욕망과 시기심에 휘둘렸다 할지라도, 그러한 마음과 능력을 발휘하여 결과적으로 성인의 고귀함을 이루었지 않은가. [사기]를 덮으며, 한신과 한고조가 겪었던 인간적 고통과 비극적 죽음에 대해, 이 모든 것들을 기록해 인류에게 선사한 역사가 사마천의 삶에 대해 깊은 존경과 높은 찬사를 바친다. 


09 / 슬픔도 힘이 될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p.190

솔제니친은 이 슈호프가 국 두 그릇을 해치우는 장면을 정밀하게 묘사했다. 처음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마치 가톨릭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는 장면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 슈호프는 모자를 벗어 무릎 위에 얹는다. 한쪽 국그릇에 담긴 건더기를 숟가락으로 한 번 휘저어 확인한 다음, 다른 그릇에 담긴 국도 똑같이 확인한다. 웬만큼은 들어 있다. 생선도 걸려든다. (.....) 슈호프는 먹기 시작한다. 우선, 한쪽 국그릇에 담긴 국물을 쭉 들이킨다. 따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배 속으로 들어가자, 오장육부가 요동을 치며 반긴다. 아,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서 죄수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 두 그릇에 담겨 있던 국물만을 모두 마신 다음에는 한쪽 그릇에 다른 쪽 건더기를 옮긴다. 그다음, 그릇을 흔들어 정리를 하고 다시 숟가락으로 모조리 긁어낸다. 이제야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다. 다른 쪽 그릇이 계속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 슈호프는 남은 국물과 함께 양배추 건더기를 먹기 시작한다. 감자는 ..... 작지도 않고 크기도 않고 게다가 얼어서 상한 것이었지만, 흐물흐물한 것이 달짝지근한 데가 있기도 하다. 생선살은 거의 없고, 앙상한 등뼈만 보인다. 생선 지느러미와 뼈는 꼭꼭 씹어서 국물을 쪽쪽 빨아 먹어야 한다. 뼈다귀 속에 든 국물은 자양분이 아주 많다. (.....) 슈호프는 드디어 거나한 저녁 식사를 마쳤다. 그러나 빵은 남겨두었다. 국을 두 그릇이나 먹고 빵까지 먹는다는 것은 어쩐지 분에 넘치는 일이다. 빵은 내일 몫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 인간의 배는 배은망덕한 것이라서, 이전에 배불렀던 것은 금세 잊어버리고, 내일이면 또 시끄럽게 조를 것이 뻔하니까 말이다. 


p.193

그런데 국 두 그릇을 해치우는 슈호프의 모습은 결코 비천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장엄하고 성스러운 광경이었다. 나는 이것이 솔제니친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한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누구도 이런 글을 쓸 수 없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슈호프를 수용소에 가둔 소련의 정치체제와 권력자들에 대해 억누르기 어려운 적개심을 느꼈다. 솔제니친이 독자의 가슴속에 이런 감정이 일어나기를 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이러한 감정을 피해 가지 못할 것이다. 


p.195

그런데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등장하는 강제노동수용소는 제정 시대 유형지 작업장과는 크게 다르다. 이 수용소들은 1917년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생겨나기 시작해 스탈린 시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솔제니친이 묘사한 것은 수용소가 아니었다. 그가 그려낸 것은 소비에트연방, 다시 말해서 옛 소련 사회 그 자체였다. 혁명의 이름으로 분칠한 공산당 독재와 개인숭배, 개인의 자유에 대하 억압, 위아래가 서로를 속이는 공동 생산, 비효율을 제도화한 생산 목표 할당제, 출신 성분으로 피아를 구분하는 새로운 신분제도, 그리고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를 격리하는 강제노동수용소. 이 길지 않은 소설 한 편에 스탈린 시대 소련 사회의 모든 것이 축약되어 있다. 이것은 단순한 '수용소 문학'이 아니다. 


p.197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스탈린 격하 운동이라는 시대 상황 덕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공산당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2월 제20차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독재와 대숙청, 농정 실패와 개인숭배 등 스탈린 체제의 야만성과 권력 남용을 비판하는 역사적인 비밀 연설을 했다. 그 후 소련에서는 알게 모르게 스탈린 격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솔제니친은 이런 분위기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수용소 경험을 농축한 소설을 썼다. 그렇지만 겉은 '수용소 문학'처럼 꾸몄지만 사실은 소련 체제를 전면 비판한 이 소설을 발표할 방법이 없었다. 여러 잡지에 기고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게재를 수락하지 않았다. 솔제니친은 당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잡지 [노브이 미르]에 원고를 보냈다. 편집장 트바르돕스키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읽기 시작했는데, 원고를 읽는 동안 말할 수 없이 큰 충격과 감명을 받았다. 그는 문학평론가 비사리온 벨린스키가 도스토옙스키의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 원고를 읽다가 그랬던 것처럼, 정장을 다시 입고 넥타이까지 맨 다음 책상에 반듯이 앉아 원고를 마저 읽었다고 한다. 


위대한 작가의 탄생을 예감한 트바르돕스키는 이 원고를 들고 공산당 서기장 흐루쇼프를 만나 발표를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흐루쇼프도 혼자 결정을 내리지 못해 공산당 중앙위원회 확대회의까지 열었으나 논란은 계속되었다. 결곡 트바르돕스키는 이 소설 발표로 인해 무슨 문제가 생기면 편집장으로서 그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지겠노라는 거약을 하고 이 소설을 잡지에 게재했다. 푸시킨과 도스토옙스키가 황제의 검열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제니친은 공산당의 검열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p.201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처음 읽은 후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솔제니친과 수많은 소련 국민을 가두고 죽였던 강제노동수용소와, 그런 야만적 장치를 불가결한 구성 요소로 보유했던 사회주의 체제는 이미 사라졌다. 동서 이데올로기 전쟁의 포화 속에서 때로는 부당하게 비난받았고 때로는 터무니없이 찬양받았던 작가 솔제니친도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다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으면서, 그런 엄청난 세상의 변화를 다 견디고 내 마음속에 남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결국 남은 것은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싶다. 아무리 혹독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사람. 땀 흘려 일하는 사람. 때로 보상받지 못하는 노동이라 할지라도 인간에게 유용한 것을 만드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면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 얻는 감명이 25년 세월을 견디고 내 마음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나는 이번에 알게 되었다. 


10 /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종의 기원 - 찰스 다윈] 


p.219

진화의 법칙을 승인한다면 곧바로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인간도 사육동물처럼 개량할 수 있는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인간에게 '바람직한 변이'와 '바람직하지 않은 변이'가 있다고 한다면, 인위선택을 통해 '바람직한 변이'를 가진 개체를 선택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변이'를 가진 사람을 도태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 이 질문에 대한 긍정적 대답이 나왔으니, 다름 아닌 우생학이었다. 


p.223

다윈은 자연에 대해서는 냉혹한 관찰자였지만 인간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우생학이나 '인종 개량'의 망상이 지닌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윈은 문명국가에서는 예방접종과 환경 개선 등 국가의 공중 보건 정책과 빈민을 구제하는 복지 정책이 '열등한 개체를 제거'하는 자연선택의 작동을 저지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이 종국적으로 호모사피엔스라는 '문명에 길들여진 종'을 생물학적으로 퇴화시킬 가능성이 있는지를 신중하게 검토했다. 그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 미개인 사회에서 몸이나 마음이 허약한 사람은 곧 제거된다. 그리고 생존하는 사람의 건강 상태는 일반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명화한 우리들은 몸이나 마음이 허약한 사람이 제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우리는 저능한 바보나 병든 사람을 위해 보호시설을 세우고 빈민구제법을 제정한다. 의료인은 모든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최대한의 기술을 발휘한다. (.....) 의지할 데 없는 사람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도움은 주로 본능적인 동정심의 부수적인 결과다. (.....) 확실한 이유가 있을 때에도, 우리 본성의 고결한 부분이 악화되지 않는 한 동정심은 저지되지 않았다. (.....) 만약 우리가 약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면 어느 정도의 이익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극도의 죄악도 함께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약한 사람들이 생존하고 자신과 똑같은 후손을 퍼뜨리는 것이 틀림없이 나쁜 효과를 미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작용이 계속해서 일어나지는 않는 것 같다. 즉 약하고 열등한 사회 구성원이 건강한 사람처럼 자유롭게 결혼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p.225 

다윈의 진화론은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렇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삶의 진실을 노출시켰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이기적 동물이다.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인 동물임을 과소평가하면 현실적으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인간이 또한 이타주의와 자기희생이라는 고귀한 도덕적 재능을 진화시켜온 존재임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벌거벗은 탐욕과 아귀다툼이 판치는 살벌한 야만으로 몰고 갈 위험에 빠진다. 


[공산당 선언]을 일고 가슴이 설레는 젊은이라면 반드시 다윈을 읽어야 한다. 세상이 원래 경쟁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인데 국가가 무엇 때문에 빈부 격차 해소나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느냐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 역시 다윈을 제대로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인간은 이기적 본성을 버리지 못하지만, 동시에 이타 행동을 우러러보는 직관적 도덕률을 지닌 동물이다. 인간은 또한 밤하늘의 별을 볼 때에도 땅에 발을 디뎌야만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실의 이해타산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고결한 이상주의가 사라진다면 인간의 삶이 너무 비천할 것 같다. 누구나 다윈만큼씩만 인간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이타주의에 공감한다면, 이 세상은 훨씬 더 살 만한 곳이 되지 않겠는가. 


11 / 우리는 왜 부자가 되려 하는가 

[유한계급론 - 소스타인 베블런]


p.245

사회의 진화가 '제도의 자연선택'이라면 제도는 무엇인가. 베블런에 따르면 제도는 종국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와 기능에 관한 일반적인 사고방식"이며, "일정한 시기에 통용되는 모든 제도의 총체"가 그 시대의 생활양식이 된다. 지배적인 생활양식은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적 태도"다. 그런데 사회제도의 총체로서 한 시기의 지배적인 생활양식 또는 습관적 사고는 환경이 변화를 강요하지 않는 한 무한정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렇게 전승되는 제도, 습관적 사고, 견해, 정신적 태도와 소질은 그 자체가 보수적인 요인이 된다. 모든 인간은 보수적이다. 물리학에서 인정되는 관성의 법칙이 사회제도와 사고방식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활환경은 계속 변화한다. 따라서 지배적 생활양식과 습관적 사고방식은 그 시기의 생활환경 또는 상황에 잘 부합하지 않게 된다. 


어느 시점엔가 변화한 환경이 기존의 지배적인 생활양식과 습관적 사고를 더는 허용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다. 사회의 진화는 이럴 때 일어난다. 사회의 진화는 개인이 어쩔 수 없이 변화한 상황에 부합하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정신적 적응 과정이다. 개인의 정신적 적응은 환경의 변화가 몰고 온 압력이 강하고 개인이 기존의 지배적 생활양식을 고수하면서 그 압력을 견딜 수 있는 능력이 약할수록 잘 일어난다. 생활환경의 변화가 주는 압력에 덜 노출되거나 둔감한 사람일수록, 그 압력을 버텨낼 힘이 있는 개인일수록 더 오래 정신적 적응을 거부할 수 있다. 유한계급이 바로 그런 개인들의 집단이다. 유한계급은 물질적 이익이나 기득권 때문에 보수적인 것이 아니다. 


p.248

아프리카 오지 원시 부족의 생활상을 관찰하는 인류학자처럼 사회제도의 진화 과정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다가 떠난 베블런이 나를 위로한다. 원래 그런 것이니 상처받지 말라고. 보수성은 유한계급만의 특수성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보편적 성향이라고. 그들은 다만 진보가 요구하는 인습적 사고와 행동 양식의 재조정을 귀찮아해서 그런 것뿐이라고. 생활환경의 변화가 더 진행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보면 사실이 그런 것 같다. 저학력 저소득 고령층 유권자들이 유한계급의 속물주의와 물신숭배 문화를 충실히 대변하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것은 '준평화적 야만 문화' 단계에 있는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우리나라가 매우 심한 편이지만 우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혁신과 진보는 언제 어디서나 저속하고 품위 없다는 인습적 비난에 봉착한다는 베블런의 다음과 같은 분석에 위로를 받으면서 자문해본다. 나도 그처럼 팔짱을 끼고 냉담한 태도로 이 세상을 관찰만 하면서 살면 마음이 편해질까?


p.249

베블런의 주장은 현실에 잘 들어맞는다. 그렇지만 그는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지나치게 비관적이었다. 나는 그가 호모사피엔스를 과소평가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똑같이 노출되어 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서로 다르다. 인습적 사고와 행동 방식을 바꾸는 데 민감하고 능동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둔감하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전자는 진보적이고 후자는 보수적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더 유연하게 인습적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교정하는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일까? 똑같은 생활환경의 변화에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자신에 대해,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사회제도에 대해 더 넓고 깊게 이해하고 성찰하는 지성적인 사람일수록 더 유연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두뇌 활동이 활발하고 많이 배우고 다양한 문화를 폭넓게 경험한 사람일수록 더 진보적일 수 있는 것이다. 역사는 문명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평균적 지성과 성찰 능력도 더 높이 발전하며, 제도의 진화 역시 그만큼 빠르고 수월해진다는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12 / 문명이 발전해도 빈곤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 

[진보와 빈곤 - 헨리 조지]


p.255

스미스는 분업과 자유 거래가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의 축복을 내릴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제시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가져오는 풍요의 열매를 토지 소유자가 독점한다는 차액지대론을 수립함으로써 경제학에 '우울한 과학'이라는 불길한 운명을 선고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기술 진보의 경제적 혜택을 토지 소유자가 지대 형식으로 독점하기 때문에 근로대중은 영원히 빈곤을 벗어날 수 없다. 


조지는 차액지대론을 지주와 농업 자본가, 농업 노동자로 구성된 영국 시골 마을에서 뉴욕과 같은 미국의 대도시로 끌어왔다. 리카도와 마찬가지로 그는 경제 중심지의 토지를 보유한 지주들이 진보의 과실을 지대 형식으로 독점하기 때문에 대중은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뉴욕에 환생한 리카도였다. 하지만 그는 리카도와 달리 미래를 비관하지 않았다. 리카도와는 달리 확실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해결책은 지주의 불로소득을 조세로 징수하고 그 대신 다른 모든 세금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조지의 아이디어는 '토지 단일세 운동'이라는 사회운동으로 발전했다. 


p.257

처음 읽었을 때나 다시 읽는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게 [진보와 빈곤]은 꿈을 일깨우는 책이다. 조지는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푸른 오아시스를 보여주었다. 삭막한 대도시에서 길을 읽은 사람들의 가슴에 망각해버렸던 이상을 되살리고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진보와 빈곤]은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오늘날에도 민중의 삶이 이렇게 힘들고 팍팍한 이유를, 그 숨겨진 비밀을 밝혀주는 책이다. 


p.260

조지의 사상은 사실 그리 과격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았다. 그는 토지소유권을 근거로 지주가 취득하는 지대를 공동체의 것으로 만들자고 했을 뿐이다. 그래서 조지의 사상을 가리켜 '토지공개념' 또는 지공주의라고도 한다. 조지는 마르크스와 달리 사유재산제도의 폐지 또는 생산수단의 국유화를 주장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폐기하자고 하지도 않았다. 토지를 국유화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조세 징수를 통해 생산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은 사람이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근거로 진보의 경제적 과실을 독점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진보와 빈곤이 동시에 존재하는 부조리를 해소하려고 했을 따름이다. 그는 자연이 또는 하느님이 준 토지를 특정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라고 생각했다. 그의 사상은 전통적인 경제학의 울타리를 넘어 철학과 종교의 영역에 걸쳐져 있었다. 조지의 지대 이론은 논리적으로 명확하며 누구나 경험적으로 공감할 수 있다. 설명의 논리 구조는 리카도의 차액지대론과 똑같다. 


p.268

'용산 참사'가 일어난 후 [진보와 빈곤]을 다시 읽었다. 용산 지구 도심 재개발은 낯선 사건이 아니다. 자본주의 시대에 형성된 세계의 대도시 어느 곳에서나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세희 선생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썼던 1970년대에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 도처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 용산 참사는 조지가 말한 대로 "한 조각만 소유하여도 기계 기술자보다 더 많은 소득이 생"기는, "금화로 포장해도 좋을 만큼의 값"을 가진 토지 위에서 벌어졌다. 좁은 골목과 낡고 초라한 주택, 퇴락한 골목 시장, 거기 발 딛고 사는 가난한 사람들을 남김없이 쓸어낸 후에, 그 자리에 화려한 마천루를 세움으로써 상업과 생활 중심지의 토지가 지닌 잠재적 시장가치를 온전히 실현하려는 것, 그것이 바로 도심 재개발의 목적이다. 


p.271

조지가 밝히려고 했던 진리는 분명하게 밝혀졌다. 그는 옳았으며 지금도 옳다. 그러나 그가 말한 바대로 그 진리가 받아들려지기는 어렵다. 사람은 보통 진리보다는 이익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분투하고 고난을 감수하는 '조지의 벗'들이 세상 곳곳에 있지만, 그 진리가 온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노태우 정부가 실시한 토지초과이득세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노무현 정부가 실시했던 종합부동산세에 대해서도 사실상 위헌 결정을 선고했다. 이로써 두 제도는 모두 폐지되거나 무력화되었다. '근본적 변화'는 고사하고 '부분적 점진적 개선'마저도 이렇게 실현하기 어렵다. 


p.272

'근본적 변화'는 아름다운 꿈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에 이르지 못하는 부분적, 점진적인 개선을 아름답지 않거나 의미 없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누구도 변화를 일으키려고 도전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근본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것이 토지문제만 있는게 아니다. 우리는 국가 경제 위기나 기업의 도산에 직접적 책임이 없는 노동자들을 경제 위기 극복이나 기업 회생을 명분으로 대량 해고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 부당함을 지적하는 노동조합의 항의에 국가는 물대포와 강제해산, 손해배상과 구속, 유죄 선고로 대응할 뿐이다. 이런 부조리를 해소하는 '근본적 변화'가 너무도 어려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이런저런 부분적 점진적 개선이라도 해보려고 노력한다. 조지와 같은 성자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해서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반드시 비난하고 멸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3 / 내 생각은 정말 내 생각일까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p.299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도 이제 국가와 언론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정부와 특정한 언론이 문제인 시대에 살게 되었다. 우리도 드디어 40년 전 독일 수준에 도달한 셈인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뵐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에서 개탄해마지않았던 수준에도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독일에는 <빌트>가 하나밖에 없지만 우리나라에는 여러 개의 <빌트>가 있다. <빌트>도 <빌트>이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도 <빌트>이고, <쥐트도이체 차이퉁>도 <빌트>이고,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도 <빌트>라고 생각해보라. 독일 사회는 오늘과 같지 않을 것이다. 발행 부수 일등부터 삼등까지가 모두 <빌트>와 같은 신문인 나라. 그리고 그 밖에 또 여러 개의 작은 <빌트>가 있는 나라. <빌트>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면 신문 시장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나라, 그게 대한민국이다. 


p.301

만약 슈프링어 재벌이 <빌트>와 같은 신문뿐만 아니라 방송사도 가지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차이퉁>의 보도 행태를 계속한다고 가정해보라. 무슨 일이 더 벌어질 것인가.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큰 <차이퉁>이 세 개 있고, 작은 <차이퉁>이 또 여럿 있는 나라에 <차이퉁 방송>까지 등장하는 것이다. 신문사와 대기업이 지상파와 종합편성 채널 편성권을 장악하고, 대기업이 광고주의 위력으로 다른 미디어까지 간접적으로 조종하면 종국적으로 인터넷 포털까지 남김없이 그들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보를 자기네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가공해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형식으로 국민에게 제공할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어느 정도' 진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남의 머리가 생각한 것을 내 머리로 생각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카타리나 볼룸은 잃어버린 명예를 영원히 되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13 / 역사의 진보를 믿어도 될까 

[역사란 무엇인가 - E.H. 카]


p.307

그는 과거를 "원래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말했다. 이 견해는 20세기 초반까지 1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유럽 역사학계를 지배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역사를 서술할 때 역사가 자신의 가치판단이나 도덕관념을 최대한 배격해야 한다. 역사가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 스스로 말하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헌을 비롯한 역사 자료를 수집하고 고증하는 일이다. 그래서 랑케와 그를 따른 일군의 역사학자들을 실증주의자, 그들의 역사관을 실증 사관 또는 실증주의 역사 이론이라고 한다. 


p.309

나는 카의 책을 읽고 나서야 랑케의 역사 연구 방법을 그대로 따를 경우, 극단적으로 말하면 "가위와 풀로 만든 역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랑케의 견해를 그대로 밀고 나가면 역사가가 할 일은 문헌과 사료를 가위로 오린 다음 보기 좋게 풀로 이어 붙이는 작업 뿐이다. 카는 랑케의 실증주의 역사 이론이 진리의 일면만을 포착하고 있음을 논증했다. [역사란 무엇인가]가 준 지적 충격은 매우 강렬했고, 그만큼 오래 기억에 남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다. 


- 오늘날의 모든 언론인들은 여론을 움직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적절한 사실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흔히 '사실'은 스스로가 말한다고들 한다. 이것은 물론 진실이 아니다. '사실'이라는 것은 역사가가 불러줄 때만 말을 한다. 어떤 '사실'에게 발언권을 줄 것인가. 또 어떤 순서로 어떤 맥락에서 말하도록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역사가인 것이다. '사실'이라는 것은 자루와 같다. 그 속에 무엇인가를 넣어주지 않으면 사실은 일어서지 않는다. 


p.316

이런 상황에서 나는 랑케를 버리고 카에게로 갔다. 모든 문명 모든 시대가 동등한 가치를 가진 것도 아니요, 정신문명이 진보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대한민국은 카의 조국인 영국은 물론이요 랑케의 조국인 독일에 대해서도 동등한 가치를 주장할 수 없는 사회였다. 사회적 진보가 생물학적 진화와 달리 획득한 것의 전승에 의해 일어난다는 카의 견해는 대한민국 사회도 경험의 축적과 전승을 통해 영국과 독일이 이룬 것과 같은 민주주의와 문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p.319

이번에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다시 한 번 그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나는 지쳤다. 존경했던 이들은 먼 곳으로 떠났고, 사랑하는 동료들은 시대의 삭풍에 떨고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겠으나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야 할지 몰라 번민한다. 내가 받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나를 외면하고, 같은 방향을 보고 걷는 사람들과도 손을 잡기가 어렵다. 가끔 나는 내 자신이 물 밖으로 팽개쳐진 물고기 같다고 느낀다. 다른 생각 없이 그저 잘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면서 나에게 친숙한 작은 공동체 안에서만 머무르고 싶다. 그런 나를 선생은 따뜻하게 격려해준다. "역사와 사회의 진보에 대한 믿음은 어떤 자동적인 또는 불가피한 진행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 능력의 계속적 발전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 믿음만 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의 격려를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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