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극장에서 만난 소희와 지안

필연적 무관심

by 앓아야 안다

"서울 올라가서 법대 가고 성공헌 줄 알았는디, 왜 다시 내려왔는감"

"막을 수 있었잖아. 근데 왜 보고만 있었냐고."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흔히들, 서울은 '올라가고' 지방은 '내려간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서울은 성공이자 높은 곳이고, 지방은 실패이자 낮은 곳이라는 우리 사회의 서글픈 민낯을 드러내는, 진부하지만 문법적으로 맥락상에도 전혀 오류가 없어 보이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물론, 굳이 그렇게 까지 비약할 필요가 있느냐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영화 '국도극장'의 기태는 고향 벌교를 떠나, 서울로 대학을 가서 사법고시를 준비합니다. 성공한 삶인 줄 알았지만 고시에 실패하고, 결국 벌교로 돌아와 실패한 결말을 맞이합니다. 가족도 친구도 반겨주기는 만무하고 '낙향=실패'라는 꼬리표를 안고 생계를 위해 낡은 재개봉 영화관 '국도극장'에서 일을 시작합니다.

주위의 비야냥 거리는 시선과 가족의 날이 선 실망에 본인 스스로를 괴롭히지만, 오래전 동창생 '영은'과 극장 관리인 '오 씨'를 만나면서 조금씩 '진짜' 자신을 찾아갑니다. 더욱이, 투박하지만 늘 '밥 챙겨 묵고'라고 묻는 엄마의 숨결은 기태를 다시 살아가게 합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오래된 시골 극장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으로, 기태는 대체 '당신이 말하는 성공과 실패가 뭔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성공을 위해 서울로 향했던 기태와 같이, 영화 '다음 소희'의 소희 또한 고3 현장실습을 나가면서 곧 '사무직 여사원'이 될 거라며 기뻐합니다. 친구들과 춤추는 것을 좋아하고 평범하게 웃고 떠들던 소희에게, 성공적인 삶이라고 생각했던 대기업 콜센터 현장실습은 그 기대를 완전히 무너트립니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날 것 그대로의 폭언이 담긴 전화를 응대하고, 이를 방관한 채 전화응대율과 처리율이라는 '숫자'로 직원을 줄 세우는 콜센터의 잔인함에 소희는 점차 소멸되어 갑니다. 현장실습을 통해 고등학교는 취업률을 높여야 하고, 이를 근거로 교육청은 학교별 순위를 정하고 예산을 차등 배분합니다. 모두가 '숫자'를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사이, 근로계약서도 모르는 아이들은 소모품처럼 쓰고 버려집니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지안 역시,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앞으로도 당연하게 무관심과 소외를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인물입니다. 누구든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지만, 지안은 마치 불행한 모든 조건을 선택하여 태어난 것처럼 간신히 버텨내는 삶을 이어 갑니다. 쇠약한 할머니를 모시면서, 밤낮없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믹스커피와 손님이 먹다 남은 음식을 몰래 싸와서 끼니를 해결하는 극한 외로움.

사채업자의 빚을 갚고 할머니를 위해서 돈이 되면 모든 하겠다는 심정으로, 박동훈 부장의 도청을 시작하면서 '사람 그 존재만'으로의 소중함과 어쩌면 본인도 그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무너지고 실패하고 쓰러져 가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바라봐 주는 그 안온한 시선이 결국 지안을 이름처럼 '편안하게 이르게' 합니다.





세 편의 영화와 드라마는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소외와 무관심을 여실히 드러냅니다.


저 또한 학창 시절부터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누구도 정해주지 않았지만 정해진' 인생의 진로를 따라 살아왔습니다. 선생님 말씀 잘 듣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취업해서,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아이 낳고 서울의 역세권 아파트에 자리를 잡는 '인생 진로 매뉴얼'을 따라 살아갑니다.


나이가 차고 불편한 여유가 생긴 덕인지, 매뉴얼은 1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쉬운 이치를 어렵게 알게 됩니다. 개인마다 각양각색의 매뉴얼이 존재하고, 심지어 10대, 20대, 30대 등 인생의 시기마다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널려 있다는 것도 뒤늦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지금의 제 자리는 동등한 기회와 경쟁을 통한 선택이었기에 하등 문제가 없다는 것도 '착시'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세상은 불공평해."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는 주변의 '소희와 지안'은 정작 '세상은 불공평하다'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불공평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세상이 떠들어 대는 '성공과 실패' 따위에 주눅 들지 말라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부당한 것은 어른들이 바로잡아 줄 거라고, 더 이상 혼자두지 않겠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지금의 저는 '기태'처럼 나약하고 서툴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어딘가의 구석에서 외롭게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울고 있을지 모르는 혹은 그 모습조차 들키기 싫어 '씩씩한 척'하고 있을 '소희와 지안'의 이야기를 꾸준히 들여다보고 남기겠습니다.


여전히 헤매고 있지만 자신을 찾아가고 있는 '기태'

싸늘하고 암담한 현실 앞에서 무기력한 슬픔을 오롯이 견뎌내고 있는 '소희'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삶의 무게를 떠안고 숨죽여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지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고 살아가고 있는 '나와 당신, 우리 그리고 그들'의 고된 삶을,

진심으로 온 힘을 다해 격렬하게 응원합니다.


영화 '국도극장' 세상의 그 어떤 시선과 평가 따위에도 나를 지켜주는 '나 자신'과 '당신'


영화 '다음 소희' 숫자로 사람을 대하지 않기를, 부디 보잘것없는 죽음은 없기를


드라마 '나의 아저씨' 우리 주변의 그 누구라도 소외되지 않기를 바라는 그 마음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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