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임신중절수술, 의사가 거부할 수 있을까?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행한 임산부와 이를 시술해 준 의사를 처벌하는 낙태죄를 헌법불합치로 판단하였습니다. 헌법불합치는 해당 법률이 사실상 위헌이지만, 즉각적인 무효화에 따르는 법 공백과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해 법 개정 전까지 한시적으로 그 법을 존속시키는 결정입니다. 이에 따라 늦어도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의 결정가능기간 설정, 상담요건, 숙려기간 등이 담긴 개선입법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러한 헌법불합치 결정의 결과 다양한 후속 쟁점들이 논의되고 있는데요.
최근 한 산부인과 의사가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의사의 낙태에 대한 진료거부권을 허용해야 달라는 청원을 게시하여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일고 있습니다.
위 청원 게시글에서 자신을 산부인과 의사로 밝힌 청원인은 의사로서의 신념, 종교인으로서의 신념에 배치되는 낙태 시술을 해야만 한다면 산부인과 의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음을 밝히며, ‘낙태가 합법화되더라도 원하지 않는 의사는 의사의 낙태 시술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진료거부권을 반드시 같이 주시기를’ 이라며 글을 맺어 진료거부권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의사의 개인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진료거부권,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오늘의 논제
"의사의 개인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진료거부권을 허용해야 한다."
현행 의료법 제15조 제1항은 의사의 진료거부 금지의무에 관하여 규정합니다. 이에 따라 의사는 진료 요청을 받으면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만약 임신한 여성이 낙태죄가 폐지되는 2021년 1월 1일 이후 낙태를 요구했을 때 의사가 진료와 시술을 거부한다면 처벌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건복지부는 통해 진료 거부의 ‘정당한 사유’로
㉮ 폭행·협박 기타 의료인에 대한 환자 또는 보호자 등의 범죄행위로 인하여 정상적인 의료행위를 할 수 없는 경우
㉯ 질병, 부재, 시설부족 기타 의료인이 정상적인 의료행위를 할 수 없는 경우
㉰ 당해 의료인의 전문과목이 아닌 전문과목의 진료가 필요한 경우
㉱ 의학적으로 불필요한 검사나 투약을 요구하거나 기타 의학적으로 부적절한 의료행위를 요구하는 경우
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개인적 신념’은 정당한 사유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사람들은 의사의 개인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진료거부권에 대해 왜 반대하는 것일까요?
찬성 측과 반대 측의 주장과 근거가 무엇인지 알아보겠습니다.
의사는 의술과 약으로 병을 치료, 진찰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으로, 이에 따라 직업으로서 의사의 공공성과 그에 따른 의무가 부과됩니다. 그러나 의사 역시 독자적인 주관과 가치관을 지닌 개인으로서 그 개인의 종교적, 개인적 신념은 보호되어야 합니다.
낙태의 경우, 오랜기간 생명권과 산모의 자기선택권이라는 중대한 가치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쟁점이었습니다. 생명의 존엄을 보호하고자 산부인과를 선택한 의사 중 여전히 태아를 생명으로 여기는 의사에게 낙태란 여전히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 생명을 거두는 시술을 강요하는 것은 개인으로서 의사의 신념을 짓밟는 것입니다.
또한 현재 낙태죄가 합법화되는 기간으로 제안되는 임신 22주 태아의 발달을 보면, 그 뼈대가 갖추어지고 머리카락이 짙어지는 등 인간으로서 형태가 명확해집니다. 의사에게 이 태아를 개인적 신념에 반하여 직접 시술로 제거해야하는 의무를 부과하는 것은 비인도적인 처사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지난해 낙태죄를 폐지한 아일랜드에서는 의사의 시술 거부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의 경우 46개 주에서는 의료인 개인에게 인공임신중절 시술이 합법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 시술을 거부할 수 있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최근 헌법재판소는 종교적, 개인적 신념에 따른 개인의 선택은 헌법적 기본권으로 인정합니다. 헌법 제19조는 양심의 자유를 규정하며, 헌법재판소에 따르면 양심의 자유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입니다.
이에 따라 종교적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되게 되었고, 산모의 자기선택권을 인정하여 이를 억압하는 낙태죄가 헌법에 불합치한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이르렀습니다.
의사 역시 종교적, 개인적 신념을 지닐 수 있는 하나의 인간이고, 그 신념은 마찬가지로 헌법적 기본권에 따라 보호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적, 개인적 신념에 따라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해 진료를 거부할 경우 처벌대상에 해당하게 되는 것은 헌법적 기본권의 전면적인 침해입니다. 양심적 낙태거부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산부인과 전문의인 차희제 차빛의원 원장 역시 “의사의 존재 이유는 힘들어하는 생명이나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헌재의 판정으로 의사의 본분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 시술 거부권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했습니다.
과거 의사들에게 가장 인기있던 전공의 분야 중 하나였던 산부인과는 이제 기피의 대상이 된지 오래입니다. 산부인과학회에 따르면 산부인과 전공의 지원율은 2006년 이후 해마다 정원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8년 연속 미달돼 필요 인원의 약 50~60% 정도만 충족하고 있고, 2012년도에는 전국에서 배출된 산부인과 전문의 수가 90명뿐으로 2001년 270명에 비해 3분의1로 급감했습니다.
생명과 직접 관련된 전문과목의 기피현상은 비단 산부인과만이 아닐 것이고, 그 주된 사유는 경제적 사유 혹은 의료소송의 위험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의 탄생을 목격하고, 그 존엄을 보호하고자 산부인과를 지원하는 전공의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그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 진료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산부인과 기피추세는 심화될 것입니다.
김종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학술부회장 역시 “그동안 생명을 보존하고 출산하는 과정에 도움이 되는 기쁨으로 진료를 했다. 만약 낙태 시술 거부권이 인정받지 못하면 신념을 따랐던 산부인과 의사 대부분이 (저처럼) 현장을 떠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여성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있고, 출산은 여성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중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임신 여부를 결정할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지에서 헌법재판소는 낙태죄가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는 것을 주된 이유로 하여 낙태죄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따라서 임산부에게 장차 법적으로 규정될 인공임신중절수술 합법기간 내에 안전한 임신중지를 제공하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산부인과 의사 개인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임산부의 인공임신중절수술 요구를 거부한다면 이와 같은 헌법재판소의 결정 취지는 무색해질 것이고, 임산부는 자칫 의사 개인의 주관에 따른 판단으로 인해 자기결정권의 실현에 큰 제한이 생길 것입니다.
인공임신중절을 결심한 시기가 늦은 경우 자칫 법적 허용기간을 놓치는 일이 발생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심사숙고하여 어렵사리 내린 결정이 의사의 도덕적 잣대에 의해 거부당할 수도 있다는 점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의 실현은 더욱 요원할 것입니다.
또한 낙태죄가 합헌이었을 때도 인공임신중절수술이 합법적으로 가능했던 사유(성폭행으로 인해 임신한 경우, 부모가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등)들이 있었고, 이러한 사유가 있다면 의사로서는 이를 진료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만일 개인적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 진료거부권이 인정된다면 과거 낙태죄가 유지되던 때에는 모든 산부인과 의사로부터 임신중절수술을 받을 수 있었던 임산부가 도리어 낙태죄 폐지로 인해 진료거부대상이 되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이 오히려 축소되는 모순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의사와 같이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독점적인 권한을 가진 전문직업인의 경우 직업활동에 있어 고도의 직업윤리 준수가 요구됩니다. 전문직업인이 개인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우위에 두고 업무를 수행할 경우 주관적이거나 왜곡된 판단으로 타인의 삶과 생명을 위협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병원에서 진료를 할 때에 의사는 전문직업인으로서 공인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신념에 따라 진료를 해서는 안되며 의학적 지식과 직업윤리를 따라야 합니다. 이는 마치 판사가 개인의 신념에 따라 판결을 내려선 안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임신중절을 결정한 임산부는 산부인과 의사가 진료해야할 ‘환자’이고 이는 다른 이유로 병원을 찾은 다른 환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개인으로서 고통스러울지라도 전문직업인인 의사로서 필요한 진료를 해야 하는 것인 의사의 직업윤리에 부합하는 행동입니다.
적군의 병사도 치료해야 한다는 의료의 숭고한 정신을 생각하면 인공임신중절에 대해 개인적인 신념으로 진료를 거부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듭니다.
보건복지부는 의료법 시행규칙에서 환자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였는데, 이중 환자의 진료받을 권리에 관하여 ‘환자는 자신의 건강보호와 증진을 위하여 적절한 보건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를 갖고, 성별/나이/종교/신분 및 경제적 사정 등을 이유로 건강에 관한 권리를 침해받지 아니하며, 의료인은 정당한 사유없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합니다.
아픈 환자가 진료거부로 적절한 시기에 치료받지 못하는 것은 환자에게는 매우 치명적이기 때문에, 환자의 의사에게 치료받을 권리는 의료인 개인의 신념보다 우선합니다. 이는 인공임신중절을 결정한 임산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특성상 진료거부로 인해 임산부의 진료받을 권리가 침해되어 수술시기가 지연되면 임산부의 건강에 악영향이 생기게 됩니다.
인공임신중절의 경우, 임신주수가 늘어날수록 골반염에 걸리거나 자궁에 천공이 생기는 등 합병증 및 후유증이 증가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직 합법화되지는 않은 유산유도제의 경우에도 초기에 보다 효과적이고, 임신기간이 길어질수록 합병증의 위험도가 높아지며, 과다출혈이나 온전한 낙태의 실패 로 인한 외과적 조치가 요구될 수 있습니다.
의사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수술에 대한 진료거부권, 인정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혹은 인정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