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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Mar 03. 2020

2월 정산 일기

어쩐지 평온. '감사일기'를 겸하여. 


벌써 3월이라니. 보통 1-2월은 새해계획으로 새로 시작하는 일도 많고 (헬스장이나 학원이라거나) 바쁜 편인데 올해는 리듬이 달랐다. 2020년 목표를 세우는 대신, 작년에 했던 일을 되돌아 보고 나의 경험과 발자취를 기록하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여겨서 일부러 헐렁하게 내버려 두기도 했다. 나서서 으쌰으쌰 하는 것도, 회사일이나 계속 진행되는 일상에 소모되는 에너지 이상을 필요로 하니까 한번 가만히 있어보았다. 새로 시작하는 것도 없이, 사이드 프로젝트도 없이. 


회사에서 큰 행사가 준비중이었고, 분기 업무평가로 스트레스도 많이 받은 상황이어서 새해 기분을 낼 여력도 없었다. 지속적으로 일을 하고 성장하기 위해서 스스로 돌아보아야할 시간이었고, 회사에 무언가를 보여주어야하는 타이밍이니 '새로운 나'를 기획하는 건 뒤로 미뤄두었다. 그러니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항상 '새롭고 의미있는' 프로젝트를 벌여야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생각을 정리해야하는 시점이 나에게 필요했었다는 걸. 객관화·조직화를 통해서 우선순위를 파악해보고, 불필요한 활동과 걱정을 알아채고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요즘 사람들이 하는 일이나 새로운 프로젝트에 발빠르게 맞춰가고 모든 소식을 알고 있으려는 업데이트 욕심이 자연스럽게 사그러들었다. 외부에서 받아들이는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내가 진짜 좋아하고 원하는 속마음이 점차 틈새가 생겼다. 아래위 순서없이 뭉쳐져 있던 덩어리가 실타래처럼 풀어지면서, 나의 색이 아닌 털실은 내보낼 수 있었다. 스타트업계의 인싸들과 다른 동료들과 비교를 조금이라도 덜 하게 되었다.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 일상 기록을 시작한 것, 이전에 했던 일이나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한 것. 


2월이 어느 때보다 마음에 들었다. 코로나로 집에서 지내고, 약속도 취소되고 재택근무를 하면서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서 좋았다. 작년 9월부터 푸른살림의 재무상담을 들으면서 정산일기를 쓰기 시작한지 딱 6개월째인데, 정산일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막연하게 스쳐지나간다고 생각했던 나의 노동의 댓가, 월급의 쓰임새를 낱낱히 알게되고 나는 어떤 물건과 경험을 선택하고 있는지, 소비하는 사회적인 주체로서 나에 대해서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 같은 머니 다이어리. 좋은 시스템을 소개해준 미스페니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1. 뉴욕에 가다.  


회사에서도 일비를 받았는 데도 평균 식비가 2만원, 커피는 6천원, 지하철은 3천원이니 생각보다 지출이 컸다. 아마.. 벼르고 있었던 미술관 방문 & 아트샵 & 독립서점에서 산게 있어서 그렇다. 


미술관 입장료에 3만원, 굿즈에 3만원 썼지만 아깝지 않아 

2017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했던 프로젝트를 마지막으로 뉴욕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프로듀서가 아니라 스타트업 마케터로, 회사 출장으로 방문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운이 좋게 모마 미술관 바로 옆이 숙소라서 짬을 내서 미술관 닫기전 1시간 동안 전시를 볼 수 있었다. 새로 개관한 뉴모마 신관까지 확장되어 전시도 다양하고, 층별로 다시 기획된 컬렉션 전시가 재밌었다. 줄리 머레투 작품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서 가슴이 떨렸다. 직접 보니까 아트포럼에서 이야기한 비평의 형용사들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다. 2D 사진이나 갤러리의 보도자료가 아니라, 직접 내눈으로 보는 감상의 기회를 드디어! 교수님이나 큐레이터들이 사비를 털어서 주요 전시를 직접 보러 해외로 다니는 리서치 트립을 백번 이해한다. 갤러리 구성이나 작품끼리의 대면, 긴장, 큐레이터의 해석과 제안이 잘 드러나는 컬렉션 전시였다. 특히, 추상회화 쪽 메인 섹션이 많이 바꼈고 게르니카 바로 옆에 흑인 여성 작가의 작품이 대비되는 등 여러모로 모마스러운 전시였다. 




책벌레의 뉴욕여행 

마지막 날 일정이 남아서 뉴욕 퍼블릭 라이브러리에 드디어 가보았다! 문닫기전 5분전에 도착해서 건물 내부 구조만 보고, 실제 책이 있는 곳에 들어가지 못해서 너무 아쉬웠다. 나도 뉴욕에 살때 도서관에서 공부나 업무좀 해볼껄.. 브루클린 집에 틀어박혀서 엑셀하고 혼맥하던 그 시절의 나, 즐기지 못했던 것 같아 슬프다. 


뉴욕의 가장 유명한 독립서점 Strand에도 다녀왔다. 세시간 동안 책구경만 하다가 왔다. 마음에 드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영어 작문 수업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Style>, 현대미술에 관련된 MIT 출판사 도서와 신기한 판본의 소설집(조앤 디디온의 추천사가 적혀있어 홀린듯 구매), 서점의 상징적인 로고가 정면에 찍혀있는 공책과 일러스트가 아름다운 재생지 콤포지션 노트를 구입했다. 가죽으로된 책갈피를 사서 영어 스터디 멤버들과 동생 선물용으로 가져 갔고, 책가방도 겟. 27만원이나 썼다. (하하) 


N.K. Jemisin의 사인본...! 꺅


2. 구독을 좀 정리해야겠다. 


가계부를 정리하다 보니, 내가 구독하는 서비스와 콘텐츠가 참 많다는 걸 발견했다. 


콘텐츠

-북저널리즘 19,000

-핀치클럽 9,900

-퍼블리 1년 

-문보영 시인의 일기 딜리버리 30,000 (3달) 

-뉴요커 1년 

-아틀란틱 1년 

-뉴욕타임즈 1년 

-아트포럼 1년 

-전기가오리 정기후원 

-밀리의 서재 9,900 


서비스

-유튜브 프리미엄 

-iCloud 비용 

-쿠팡 로켓멤버쉽 


아.. 괴롭다. 좋은데 너무 괴로워. 좋은게 많아도 읽지 못하고, 돈만 기부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뇌에 여유가 없는 현실이 떠오르고. 뇌에 밥도 적당히 줘야지... 돈쓴다고 다 능사가 아니리라. 


이 중에 어떤걸 정리할 수 있을까? 집에 읽을 책도 많고, 독서 모임이나 스터디 주제에 따라 새로운 책은 생기니 꾸준히 보는 콘텐츠 중에 정말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걸로 재정리를 해야겠다. 요즘 무료컨텐츠나 뉴스레터도 좋은게 많고, 많이 보는게 아니라 내가 이해하고 아웃풋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절대양의 한계라는게 있으니까. 


3. 원서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x100배 빠르다. (흑흑) 


최근에 산 '명료하게 글쓰는 법' 실용 가이드 책과 영문/스페인어 기사를 읽고 정리 & 단어를 찾아 놓은 workflowy 화면

영작을 잘하고 싶은 마음에, 글쓰기 책을 엄청 샀다. 문법이 부족한 것 같아서 문법책을, 문체나 형식에 약한 것 같아서 세련된 문체를 모아놓은 책을, 글 진도가 안나가서 영감을 얻기 위해 유명한 작가들의 글쓰기 책을... 좋은 문장을 필사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고전을.. 


왠지 몇달 전에도 똑같은 내용으로 쓴 내용인데 말이다. 책 여러권 보다 한권을 깊게 읽고 이해하는게 더 중요하다. <Sense of Style>, <Style>, <Rhetorical Grammar>를 기본 책으로 두고 꾸준히 잡지 & 기사를 읽어야 겠다. 요즘은 책을 읽기 시작한 날을 기록하고 읽을 때 마다 요점을 workflowy에 정리하면서 읽고 있다. 


아르헨티나 관련 <트래블러>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자극 받아서, 내친김에 충무로에서 세미나가 끝나고 스페인 책방에도 들려 마르께스의 책을 샀다. 집에 비오이 까사레스 책도 읽다 말았고, 훌리오 코르타사르 책도 있는데... 원서는 한글보다 아무래도 읽는 속도가 느리니, 공부 반 취미반으로 생각해도 더이상 사면 안되겠다. 


내친김에 Goodreads 아이디도 만들어서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을 등록했다. 원서는 아무래도 독후감까지 쓸만큼 완독한 책이 현저히 작다보니... 더 끝까지 못 읽는 것 같아서 앞으로는 굿리즈에 리뷰를 남기려고 한다 :)  





>>> 잘산거 top 3

1. 신논현역 활선요가 1달 150,000원 

아쉬탕가요가에 한참 빠져 있을 때 뿌듯함은 컸지만 수련에 대한 조바심과 고수들 사이에서 초조함도 많이 느꼈다. 추가 운동이나 더 화려한 요가복, 비싼 요가 매트에 한눈도 많이 팔았고. '골반 재활'에 중심을 둔 하타 요가라 그런지 편하고 개운하다. 치료한다고 생각하고 다녀야겠다. 회사 바로 근처라서 더 좋다. 


2. 르라보 네롤리 145,000원 

르라보 향수를 다써서 당근마켓에서 새상품을 구입했다. 면세점에서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안샀는데, 훨씬 더 저렴하게 계속 쓰던 향수를 사서 좋다. 


3. 연말정산 소득세 234,990원

매년 환급만 받다가 세금을 냈다. 왠지 기분이 이상하다. 아깝기도 하지만, 이제 소득이 있는 직장인이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소비는 아니지만 뿌듯해서 잘산거 top3에 등재. 


>>> 최악의 소비 top3

1. 뉴욕 공항에서 산 <뉴요커> 17,023원 

뉴요커 1년 연장하면서 중간에 붕떠서 못받은 호라고 생각해서, 공항에서 기다릴 때 읽으려고 샀는데 집에 도착했는데 우체통에 똑같은 호가 꽂혀있었다. (열받음) 


2. 신촌역 근처 알파에서 산 파일홀더 1,200원 

스터디 가는데 좀 일찍 신촌역에 도착하게 되었다. 미리 도착해서 스터디 준비를 하거나 책을 읽으면 되는데, 괜히 허한 마음에 알파에서 얼쩡거리다가 그냥 나가기도 뭣하고 A4용지가 가방에 날라다니니 파일홀더를 하나 샀다. 후회된다. 


3. 타다 17,800원

이날은 급하게 회사를 나와 학원을 가느라, 교통카드를 챙기지 않았다. 버스에서 현금 5000원을 통에 그냥 넣어버려서 잔금은 계좌이체로 해준다고 해서 당황. 집에 가야하는 데 교통비가 없어서 타다 앱에 등록되어 있는 체크카드로 결제하였다. 정신만 제대로 챙겼으면 1350원인데,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카드를 1장만 들고다니니 이런일이 생기나 보다. 그 이후로 작은 지갑을 챙겨다니고 꼭 제자리에 카드가 있는지 확인하고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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