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진킴 Jul 07. 2020

6월:천천히 해도 괜찮은   

변화하는 시기는 누구에게나 어렵고 불안하다. 

꾸준히 멍상을 한다. 가끔 생각나면 요가도 한다. 잠은 무조건 잘 자려고 한다. 


하루의 힘 


"어려워? 그럼 천천히 해" 


6월에 처음 듣고 나서 자주 되뇌이고 있다. 할 수 있다고 모든 일을 떠안지도 않고, 하고 싶다고 해서 무조건 지금 당장 시작해서 무리하게 일을 벌리지도 않았다. 조금씩, 천천히 살아보려 했다. 규칙적으로 살고, 매일 단단한 일상을 만드는 소소한 반복이 쌓이니 고3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김해에서 세계로 발사될 준비를 하면서, 매일 디데이 - NNN일을 체크하던 그 때는 수능 점수로 내 삶의 성적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 참고 견디면 통과할 수 있는 시험은 없다. 내가 안간힘을 다한다면 안심할 수 있는 결과가 돌아오는 숙제는 없다. 인생에 점수를 받을 수 없으니까. 


대신 나에게는 매일 매일이 있다. 습도가 높은 여름의 일본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몸에 척 달라 붙고, 양감이 느껴지는 공기를 매일 통과하는 느낌이다. 매일을 의식하니 너무 괴롭고 따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넷플릭스의 연옥으로 빠지기 전에, 핸드폰을 켜거나 인스타를 쭉쭉 내리다가, 유튜브를 이리저리 핑퐁을 하다가 멈추려 노력했다. 잡생각은 메모로 했다. 멍상을 하면서 깨어있으려고 했다. 아니면 그냥 항복했다.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나무나 쳐다보고, 물장구를 치고, 예쁜 문구를 구경하면서 하릴 없이 지냈다. 6월은 그동안 배운 멍상, 디지털 디톡스, 마음 챙김, 일상의 기록 남기기라는 작은 습관들이 촘촘하게 하루를 채웠다. 매일매일 나를 인정하는 메모를 쓰고 자조 모임 멤버들과 일요일에 회고를 했다.  


3월 23일부터 시작된 카카오 프로젝트 100이 끝났다. 6월 30일까지 꽉 채워서 백일. 매일 영어 문장 필사하기, 스페인어 문장 필사하기, 내 콘텐츠로 책 쓰기, 그리고 영어 산문 매일 읽기 프로젝트를 했다. 깊이도, 행동도, 성취도 다르지만 작은 동그라미의 크기는 같았다. 매일 1분에서 1시간, 하나씩 쌓아가면서 뭐라도 나를 위해서 하는 행동이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100% 완벽하지는 않았다. 1% 아쉽게 놓친 하루가 있어서 더 마음에 든다. 완벽하진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했고 매듭을 지었다는 게 대단하다. 


영산매에서 매일 읽은 글들이 내 자산이 되었다. 


'인증'은 오늘 하루도 잘 해냈다고 말해줄 수 있는 기회다. 감정이 폭발할 것 같았던 날도 끔찍하게 무기력했던 날도 지나갈 수 있었다. 10일 전, 50일 전, 80일 전부터 꾸준히 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매일매일 카운트되고, 같이 참여할 수 있는 사람에게 공개된다. 그래서 확실히 내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이 어떠했든 간에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을 증거를 내 손으로 만들었고, 기록으로 남겨져 있으니까. 


하루하루 내 손으로 만들어낸 단단한 100일. 뿌듯하다. 

뉴요커를 읽으면 지적인 영어를 할 수 있을 것 같고, 영어 글쓰기와 번역 실력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읽을 만한 글은 많이 모으는데 좀처럼 읽지는 않고 머리로만 이해했었다. 영-산-매를 위해서 소개글을 쓰고, 멤버들의 인증을 도와주고, 단어장을 만들고, 몸으로 움직이니 정말 변화가 생겼다. 비싼 1:1 과외나 책을 소비하면서 영어를 잘하고 싶었던 작년의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들은 돈으로 사는 게 아니라 나만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다.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공부를 해야한다. 꾸준히, 매일 매일, 목적에 맞는 수준과 분량으로. 


처음이다. 예산에 맞췄다.

예산을 잡을 땐 누구나 조금 더 나은 버전의 내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무리한(?) 계획을 세운다. 가령 이번 달에는 절대 책을 사지 않겠어! 하던가. 거의 다시는 튀김과 쌀밥을 먹지 않고 탄단지 지켜서 체력 관리하겠어! 랄까? 실제로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하면 만족해하는지, 겉으로 보이는 소비 속에 실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스스로를 납작하게 보게 된다. 그리고 더 나은 버전의 나를 종이 인형 오리듯이 재단해서 '나는 이렇고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하니' 기준에 끼워 맞추게 된다. 


예산을 고무줄처럼 이렇게도 해봤다가 저렇게도 해보고. 정산을 통해서 실제로 어떻게 쓰는지 실제 데이터로 정리해보고. 도무지 포기가 안 되는 게 분명한 그래서 이제는 인정해줘야 할 집착도 받아들여주자 '나다운 예산'이 나왔다. 이상적인 예산보다 더 개인적이다. 현실적인 예산보다 훨씬 덜 폭력적이다. 예산을 지켜야 할 규칙으로 보면서 너무 힘들었다. 어기면 벌을 받거나 죄책감을 느껴야 하고 스스로를 옭아매면서 채찍질을 했다. 예산 케이크(그래프)를 법이 아니라 좀 더 입체적으로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숫자는 그 분배된 예산 비율만큼 어떤 소비(활동)가 차지하는 비중과 우선순위를 알려준다. 심리적으로 인지하기 어려운 삶의 구석구석을 한눈에 보여준다고 생각하니, 꽤 유용하다. 


매일 지출내역을 가계부에 쓰면 자동으로 예산 대비 몇 퍼센트를 썼는지, 월말까지 며칠 남았고 현금이 얼마 남았는지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 항목으로 분류하지 않고 적당한 이름표와 내 감정(주로 내적 흥분)을 드러내는 이모지를 아끼지 않는다. 많은 정보와 감정을 담아 놓고 자주 들여다 본다. 진짜 머니 다이어리로 가계부를 보면 지금 당장 쓴 돈이 주는 만족감, 전 후 가계부 항목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무개 지출에 대한 재평가를 하게 된다. 그만큼 내 삶에 예상했던 만큼의 가치와 기쁨을 얻었는지 '효용감'을 가늠해보면서 내가 피부로 느끼는 경제 감각을 알아나가고 있다. 


소비를 통제하는데 도가 텄다는 것도 아니고 왠지 싱겁지만, 정말 간단한 말장난이지만 큰 변화를 가져온다. 돈은 쓰게 된다. 쓰려고 버는 거다. 근데 잘 쓰고 있는지, 어떻게 써야 '잘' 썼다고 내가 느끼는지 모르면 더 큰 돈을 벌고 써도 내가 얻을 수 있는 기쁨은 매한가지다. 나의 행복과 안녕을 위한 최적화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 주관적인 가치판단 시스템과 여러 현황 파악을 통해 수립한 객관적인 생활경제 시스템(나의 경우에는 예산과 대출상환 계획, 10년 재무 목표)이라는 두 바퀴가 같은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이번 달에 많은 걸 하진 않았다. 단지 제일 변동지출이 많고 폭도 큰 자기 계발 예산에 새로운 이름과 통장을 만들어 주었을 뿐이다. 나는 활동비에서 자기 계발 예산을 따로 독립시켰다. 그리고 '나를 키우기 위한 시간'이라는 이름표를 붙였다. 3개월, 즉 분기 별로 100만 원을 정해놓고 그 한도 내에서 듣고 싶은 강의, 워크숍, 커뮤니티 모임 활동에 지출한다. 수업이 1~2개월 이어지거나, 원데이 같이 들쭉날쭉하고 금액도 천차만별이라 월별 예산으로 두면 제대로 얼마를 썼고 예산이 얼마나 지켜졌는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나에게 자기 계발은 대부분 어떤 걸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들이기 때문에 미리 계획해놓기 어려웠는데, 통 크게 100만 원 정도면 언제든지 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신중해졌다. 나를 키운다라는 개념도 투자나 자기 계발비/수업비가 아니라 '시간'에 돈을 쓴다고 정리를 해놓으니 이 수업이나 커뮤니티에 돈을 쓰면 그만큼 시간도 투자를 해야 그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직관적으로 느껴져서 좋다. 


비난 대신 '지금 마음이 어때?' 

거울을 볼 때마다 '넌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 어휴, 살찐 거 좀 봐... 미련해 보여.' 


이렇게 글로 쓰기만 해도 가슴이 아픈데 매번 아침에 거울을 볼 때마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마다, 옷을 사러 갔다가 입어보다가 나를 보면서 실제로 하는 말이다. 자주 하는 말이라서 자동으로 스스로에 대한 이미지가 고정이 되기까지 했다. '난 항상 피곤해 보인다', '난 살이 쪘다.' 운동도 안 하고 식이습관도 무너진 지 오래인데 매일 하루에 2번씩 운동을 하고 식단 하던 '시절'과 같길 바라는 건 아니다. 같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평생 하나의 사이즈 몸으로 살아야 하고, 제일 예쁠 때의 나 자신으로 박제되어야 하는 것도 아닌데 거울 속 내 모습이 마음에 안 드는 기분은 참 씁쓸하다. 나도 나를 좋아하고 싶다. 그래서 화장을 하면, 피부 관리를 받으면, 이 흉터만 없어지면 나를 좋아할 수 있다는 '조건'을 걸어서 나를 이리저리 분석하고, 비판을 했다. 


코로나 이후 꾸밈 비용이 줄어들고, 업종이 바뀌면서 정장보다 편하고 단순한 옷으로 나날이 채워지고, 일주일에 여러 번 소셜댄스를 추러 바에 가지 않으니 아예 꾸밀일이 없어졌다. 거울을 보면서 나를 뜯어보면서 꼬집지도 않았고. 그래서 나도 이 정도면 외모 지상주의에서 벗어난 거 아닌가? 자조하기도 했다. 속눈썹까지 붙이는 풀 메이크업이 점점 갑옷처럼 느껴지고, 비싸고 업무 평과와는 하등 상관없는 꽉 끼는 정장은 내려놓고, 화장의 가짓수가 하나씩 줄어드는 나를 보면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화장을 그만둔 게 아니라 나를 돌보는 걸 그만둔 지 오래였다.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를 비난하는 나를 떠올린다. 도화지처럼 그 장면에서 나와 제일 친한 친구라면 어떤 말을 해줬을까? 나는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지금 눈에 보이는 것, 여기서 행동으로 바로 옮길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꾸밈 비용 0원으로 6개월 이상 지나면서, 재작년 이맘때쯤에는 꾸밈 비용에만 월급의 80%를 쓰던 내가 너무 미웠다. 근데 0원이라고 능사가 아니었다. 무조건 돈을 안 쓰고, 무조건 안 꾸민다고 해서 더 자연스럽고 당당한 내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나를 비판하고 깎아내리는 거울 속 나는 그대로였다. 오히려 꾸밈 비용에 낭비한 돈을 지금 갚아야 하는 상황이니 더 쓰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졸라매고, 벌을 주는 것처럼 몰아세우고 있었다. 


이번 달에 쓴 꾸밈 비용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바디 스크럽이다. 바디 스크럽은 햇볕에 태닝 할 때 얼룩지지 말라고 각질을 제거하기 위해 여름이면 주기적으로 하는데, 따로 스크럽제를 파는 곳을 못 찾아서 사해 소금과 에센셜 오일을 사서 락앤락 용기에 직접 만들었다. 소금 알이 굵어서 흑설탕도 섞고, 베르가못 아로마 오일도 몇 방울 떨어트리니 사서 쓰는 스크럽제보다 훨씬 좋았다. 향기 나는 소금을 아침에 문지르다 보면 샤워볼에 거품을 묻히고 물로 휘휘~씻는 것보다 확실하게 손에도 힘이 들어가고, 피부의 촉감도 느껴져서 살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몸의 생김새나 상태에도 더 관심이 간다. 


그리고 수영복을 샀다. 시정부에서 운영하는 야외 수영장이 개장했다고 해서 놀러 갔는데 온천물이 베이스라 물이 냄새나거나 눈이 따갑지 않고 찰랑거리고 몸에 부드럽게 감겨서 좋다. 배도 나오고 팔뚝도 불거져 나오고 작년 수영복이 안 맞아 (언감생심 파견업무 오는데 가지고 오지도 않았다) 테스트코에서 내 몸에 맞는 원피스로 하나 샀다. 근데 내 체형에도 잘 맞고 움직임에도 편해서 좋다. 다른 사람에게, 특히 남자 친구에게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지 않고 내가 마음에 들고 편한 수영복을 생전 처음 사본다. 퇴근 후에 수영할 때마다 행복하다. 


수영을 마치고 머리를 말리면서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 몸 상태는 좀 괜찮아? 집에 가면 뭐하고 싶어? 맛있는 거 먹고 힘내. 

어렵고 엄두가 안나는 일이 있어도 괜찮아. 

그럼 천천히 하면 돼. 



>>>> 잘 산 거 top 3  


1. 닷프로젝트 참여 30,000원 

잊지 않았어요. 응원합니다. 매번 1만 원 이하에 그치는 각종 기부와 펀딩에 조금이나마 더 보탤 수 있었다. 나도 뭐라도 도울 수 있어서 행복하다. 심리상담 1회기 정도 금액이라도 넣어야 하는 건 아닐까 계속 고민했지만, 눈 질끈 감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깨끗하게 응원할 수 있는 금액이 나에겐 3만 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유지했다. 피해자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힘내요. 


2. 요가매트 39,984원 

요가소년 유튜브를 꾸준히 하는데 특히 베드타임 요가 좋다. 정말 이상하게 그다음 날 몸이 가뿐해진다. 진정한 요기니라면 바닥에서도 곧잘 요가를 해야겠지만 한 달 넘게 고민하다 결국 요가매트를 샀다. 너무 잘했다. 배송비도 내고,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지금 당장 내 인생에 '이유'를 주는 물건인데 투자할만하다. 요가매트의 좋은 점은 일단 돌돌 말려있는 녀석을 볼 때마다 요가를 떠올리고, 가습기에 아로마 오일을 떨어트리고 싶게 한다. 라벤더 향이 나면 이참에 요가나 하고 잘까? 생각하게 한다. 요가할 기분을 내게 해 주고, 실용적으로도 도움을 줘서 기특하다. 


3.빌라선샤인 시즌 5 198,000원 

온라인으로 이런 깊은 이야기와 정보, 사람들을 만나고 이어져 있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시즌 4 뉴먼으로 있으면서 경험이 너무 좋았고, 직접 만들어보고 싶은 모임도 있고 이전에 했던 모임을 꾸준히 이어나가고 싶어서 다시 신청했다. 기대된다. 어떤 사람을 만날지, 어떤 혜택이 있을지 기대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떻게 변할지, 무엇을 더 하고 싶어 질지가 기대된다. 


>>>>최악의 소비 worst top 3

1. 아마존 Audible 멤버십 20,171원 

아마존 멤버십 아마, 어떤 듣고 싶은 게 있어서 무료로 1달 가입했다가 그 뒤로 계속 결제되었나 보다. 1년 넘게 한 달에 2만 원씩 빠지고 있었는데 눈치 못 챘다. 뭘까? 통장이나 카드 명세서에서 내가 모르는 게 있으면 끝까지 추적해봐야겠다. 


2. 여드름 패치 3장 18,000원 

여드름이 갑자기 올라와서 스트레스에 여드름 패치를 샀다. 문제는 한국에서 헝가리로 물건을 보낼 방법도 없는데 그냥 사기만 했다는 것. 여드름을 가려주는 스티커보다는 잠 잘 자고 물 잘 마시고 좋은 거 먹고, 기본을 지키는 게 더 맞는 방법이었을 텐데. 


3. 국민건강보험 체납 100,030원 

퇴사를 하면서 지역가입자로 전환이 되었는데 완전 깜박하고 있었다. 체납해서 연체료까지 내서 뼈저리다. 국민건강보험은 연체되면 신용에도 좋지 않은데... 우연하게 안내 문자를 발견하고, 지로 납부 번호를 알아내서 겨우 납부를 했다. 나는 보험 필요 없다면서 국민건강보험을 몇 달이나 체납했던 과거의 맹랑한 나를 답습하지 말자... 공과금은 중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5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