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체인지 14. 두견주에 꿩만두를 점심으로 먹을 수 있는 프로젝트
개성공단이 2016년 전면 중단되기 전, 2010년부터 2015년 사이 다섯 번 개성을 방문했다. 대학교 1학년 2학기부터 독일인 작가의 웹사이트 및 블로그 관리를 하면서 영-한 번역을 하고, 프로젝트를 위한 리서치를 하면서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 일했었다. 2010년에 북한에 있는 개성공단에서 셔츠를 제작하는 프로젝트를 구상하면서 나는 작가 어시스턴트가 아니라 '프로덕션 매니저'라는 명함을 만들게 되었다.
개성공단에서 셔츠를 만들어야겠다는 작가의 아이디어와 어떤 셔츠를 만들겠다는 '그림' 한 장, 그리고 언제까지 완료해서 전시에 출품하겠다는 마감은 있는데 어떻게 시작할지, 어디서 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누구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계획은 전혀 없었다. 우선 나는 개성 공단에 입주해 있는 기업 리스트를 웹사이트에서 확인하고 엑셀을 만들어서 연락처를 모두 기입했다. 봉제, 원단 등 셔츠를 만들 수 있는 곳을 뽑아서 전화를 돌리고 미팅 약속을 잡았다.
공장 담당자들과 전화하면서 봉제의 종류, 그리고 작가가 원하는 제품을 소량으로 만들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파악했다. 샘플이 필요했다. 그림으로 그린 셔츠 아이디어가 실제 물건이 되려면 여러 가지 결정이 필요했다. 어떤 원단으로 만들 것이고, 마감은 어떻게 할 것이며, 사이징과 수량은 어떻게 배분하고, 패키징과 최종 배송지는 어디로 할 것인지 까지 세세하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어떤 단계가 존재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손이 필요한지, 돈과 시간은 얼마나 드는지 모른 채로 일단 시작했다.
현대 미술 프로덕션을 하기 위해 북한에 간다 하니 통일부에서 허가가 안 나올 것 같아서 봉제 공장의 '바이어'로 북한 출입증 신청을 했다. 실제로 다큐멘터리와 현대 미술 전시를 위한 방문이며 외국인 작가와 대학생이 방문한다고 했으면 이뤄지지 않을 일이었다. 통일부에서 제공하는 안보 교육을 이수하고, 사유서와 각종 서류를 준비해서 내면 출입증을 받을 수 있다. 그럼 여권을 챙겨서 파주에 있는 출입통제소로 간다. 9호선 가양역에서 출발하면 20분도 걸리지 않는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직원이나 바이어들이 출입국 하며, 소규모라 교통체증이 전혀 없기도 하고.
짧게 가능했던 금강산 수학여행 시기에 우리 학교는 제주도로 갔다. 그래서 가보지 못한 북한, 책과 TV로만 접하던 북한이 이렇게 싱겁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게 이상했다. 공항에 있는 출입국 사무소처럼 여권을 검사하고, 방문 사유를 물어보고, 가방과 몸을 수색하는 절차가 있었다. 출입소에는 군인들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북한 군복과 말투에 당황했었다. '처녀입니까?'라고 물어서 말문이 막혔었는데 미혼이냐고 묻는 것이라고 뒤에 계신 거래처 부장님이 말씀해주셨다.
사진도 마음껏 찍을 수 없고 핸드폰도 켤 수 없었는데 가는 곳마다 동행인이 따라다녔다. 1:1로 대면한 사람은 여자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잠시 인사를 했던, 분홍색 곱창으로 머리를 묶었던 공장 노동자 분이었다. 점심시간에는 마당에서 족구를 하고, 간식으로는 초코파이가 나가고, 귀가 아플 정도로 크게 북한의 노동요를 틀어 놓고, 컴퓨터도 있었다. 모니터에 뒤통수가 달린 내가 초등학교 때 썼던 구식 모델이었지만 컴퓨터를 다루는 북측 직원들도 있었다. 매번 안보교육에서 들었던 조심해야 할 말, 하면 안 되는 말을 되뇌면서 동행인을 따라다녔다. 개성공단 내에 있는 세븐일레븐 편의점에도 들러보고, 외국인 패션 디자이너(작가인데 어쩐지 다들 패션 디자이너라고 생각했던)가 왔다며 현대 아산 재단 건물에도 가볼 수 있었다.
현대 아산 상무님의 집무실에는 초기에 구입했다던 황진이의 글씨가 적힌 족자, 고려시대 청자 같은 작품들도 있었다. 영어 통역으로 온 북측 직원 분은 김일성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인재라고 하는데 나와 몇 살 차이 나지 않을 것 같은 앳된 언니였다. 어떻게 영어를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문장은 정확한데 억양이 북한식으로 괴상해서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당시에도 출입 제한이 있던 터라 개성 시내에 있는 식당은 못 가고 공단 안에서 제일 좋은 한정식집에 갔다.
산초가 엄청 뿌려져 있는 꿩 요리, 꿩 만두, 탕과 밥 등 정성스럽게 차린 음식을 먹으며 개성 공단 준공 시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 개성공단에 전화하려면 어떤 국번으로 걸어서 전화할 수 있는지, 개성 공단에서 숙식하는 직원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현대미술 프로젝트 매니저, 프로덕션 매니저, 프로듀서의 역할에 빠지게 된 것 같다. 내 눈으로 황진이의 시조가 적힌 족자를 현대 아산 재단 건물에서 보고 어떻게 구하게 되셨는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으니까. 개성에서 꿩만두와 인삼주를 곁들이며 예술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상상이나 특수한 연결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짜릿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대학교 2학년, 3학년, 4학년 연이어 북한 관련 프로젝트가 생기면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대학원을 휴학하고 2년 정도 건축 회사에서 남북한 건축 아카이브 전시를 만들기 위한 보조 연구원과 코디네이터로 일할 수 있었던 것, DMZ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의 프로덕션을 담당하게 된 것도 2010년에 처음 개성에 발을 들였기 때문이다.
매번 외교부나 UN에서 일하는 나를 상상했던 고등학교 때나 종군 기자가 되고 싶었던 중학교 시절, 패션 디자이너처럼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걸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코즈모폴리턴의 꿈은 큐레이터라는 직업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다고 생각했다.
인디애나 존스처럼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던 아주 어린 시절 생각은 미지의 지역에 대한 탐구와 발견으로 이어졌다. 정치적으로 긴장관계에 있어서 일반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 직접 가는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미디어로만 알고 있는 현장에 내 몸으로 가서 당사자들을 만나고 취재하는 저널리즘의 영역에 대한 선망도 항상 있었다. 오리아나 팔라치 같이 전투적이고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인물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와 인식을 바꾸는 일을 해내고 싶었다. 그녀의 삶의 행적이나 전설적인 인터뷰 일화를 보면서 동경하면서, 한편으로는 한비야처럼 전 세계를 여행하며 구호활동을 하는 삶을 꿈꾸기도 했다.
장소 특정적인 대형 설치 작품이나 비엔날레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어떤 지역의 역사와 삶, 지정학적인 담론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이 좋았다. 미술 작품 아이디어를 전혀 새로운 공간,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재료와 방법으로 매번 만들어내야 하고 설득해야 하는 대상도 매번 달라진다. 막막한 상태에서 하나씩 전문가를 모으고, 정보와 리소스를 조합하고, 시간과 예산을 조율하고, 여러 사람들과 단체의 협업을 이끌어내서 실질적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이 잘 맞았다.
패션 인더스트리를 하면서 알게 된 동대문 & 봉제 관련 프로덕션은 10년 뒤 개인 쇼핑몰을 만들기 위해 브라질에서 원단을 사서 콜롬비아와 중국에서 옷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동대문 각 상가를 여러 번 드나들고, 을지로 골목을 돌아다녀 봤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포지션도 많았다. 작품 제작뿐만 아니라 영상작품, 슬기와 민 스튜디오와 함께 작업한 아티스트 북, 패션쇼와 퍼포먼스로 리프로덕션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북 토크에 가서 통역을 하거나, 해외 편집숍에 아티스트가 만든 셔츠라며 입점을 시키는 것도 모두 내 자산이 되었다. 신문이나 키워드 중심으로 자료 센터, 인터넷 DB, 전문가 컨택 등을 통해서 다방면으로 북한과 개성공단 관련해서 리서치를 했던 경험은 시게루 반 건축 사무소나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어시스턴트 리서처 자리로 이어졌다.
애초에 2009년 1학기에 고려대 국제대학원에서 했던 앰네스티의 인권 아카데미를 듣지 않았다면, 북한에 대한 관심사는 이제 미대에 갔으니 학교에 적응해야 한다며 잊힐 수도 있었다. 몇 주간의 강의를 청강하면서 학교에서 배우는 현대미술이 하고자 하는 일과 인권, 국제기구에서 하는 일이 내용을 다를 수 있어도 '방향'이 같을 수 있다는데 생각이 닿았다. 북한에 관심이 있어 한국에 왔다는 독일 작가에게 지금 언론에서 다뤄지는 이슈,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요즘 대학생인 내가 느끼는 괴리에 대해서 영어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어시스턴트 자리를 제안한 것 아닐까?
"혜진 씨는 어쩌다가 북한까지 가본 거예요? 안 해본 게 뭐예요?"
안 해본 건 참 많다. 대신 내가 했던 일들은 여러 분야가 합쳐지고, 새로운 아이디어나 제품을 만들기 위해 협업하는 사람과 분야가 계속 달라졌을 뿐이다. 현대 미술 프로젝트는 일시적이고, 비정형적이고, 딱 한 번만 해보는 경험으로 가득 차 있다. 제일 처음 했던 건 작가의 한영 블로그였는데, 옷도 만들고 책을 만들고 패션쇼로 이어졌다. 로컬 커뮤니티를 위한 워크숍을 기획하거나 강연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인터뷰도 했다. 2012년에는 도시 정원과 파빌리온을 만들고, 부산의 유치원 아이들과 10주 동안 영어 연극을 미술관에서 만들기도 했다. 분재를 하기도 하고, 수족관을 만들거나, 배 모형을 만드는 모형 제작소와 일을 하기도 했다. 타일을 만들기 위해 도자기 공방과 일하고, 대리석 타일을 공수하기 위해 터키에서 돌을 사서 이탈리아로 보낸 뒤 뉴욕으로 수입했다. 각종 새의 깃털을 구하기 위해 한국의 시장뿐만 아니라 중국도 뒤져야 했다.
패션 디자이너도 아니고, 의류 회사의 제작팀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미술 작품을 위해 동대문 원단 시장부터, 조개 단추를 새로운 색으로 염색하고 실을 수입해서 개성 공단에 있는 봉제 공장에 맞기는 일을 했다. 국제관계학이나 북한에 대해 모르지만 신문 스크랩을 해서 인쇄물로 만들고, 출입증 허가를 받기 위해 관계 부처에 문서를 보내고 안보 교육을 수료했다. 독일어도 모르고 영어영문학과는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통번역을 하면서 일을 통해서 비즈니스 영어를 배워갔다.
개성공단은 2016년 부로 폐쇄되었다. 2015년 천안함 사건 당시 나는 북한에 있었는데 그날 마지막 퇴근 시간에 국경을 넘어 서울로 돌아왔다. 출입국 사무소에 기자들이 몰려와있어서 살면서 처음으로 MBC 9시 뉴스에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내가 개성공단에 잠깐이지만 직접 방문해 보고, 의류 제작 협력사들과 협상해보고, 셔츠를 제작해서 뉴욕, 베이징, 베를린, 서울의 편집숍과 독립서점에 입고한 경험은 다시 반복되진 않을 것이다. 다시 개성공단에서 일을 하러 돌아가지도 않을 것이고, 내 핸드폰에 있는 협력사 사장님들에게 연락해 새로운 발주를 넣을 일은 없다.
시급 4500원으로, 대학생이라 아는 것이 없었을 때 했던 일이라 이력서에도 써본 적이 없다. 4대 보험을 받은 적도 없고 아주 유명한 작가나 프로젝트도 아니고 너무 어렸을 때 했던 일이라 아무도 일로 쳐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돌이켜 보면 나에게 처음으로 중요했던, 책임감을 가지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수했던 프로젝트였다. 이때 무작정 돈을 깎으라며 나를 내세우고 뒷짐 지고 있던 작가에게 '이게 왜 통역이 해야 하는 일이냐'라고 말하지 못하고 끙끙되는 21살이었다. 절대 안 된다며 강경하게 대응하던 제조업체와 직접 협상해서 가격을 조정하고 납기를 맞추고 더 유리한 계약으로 이끈 것도 내가 이룬 것이다. 모든 리서치와 진행을 담당해도 결국 작가의 이름과 크레딧만 남아 허탈해서 누구에게도 '내가 직접 프로덕션을 진행하고 완수한 일'이라고 이야기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10년이 지난 지금 2010년에 했던 이 프로젝트가 일하는 나의 중요한 신념을 만들어 주었다.
- 안 해 본 것도 한번 해보면 된다.
- 특수한 분야라 정보가 없다고 해도 전문가를 찾아 협상하는 법을 안다면 50%는 간다.
- 사람들은 새로운 것, 모르는 것, 안 해본 것을 '잘 못된 것이고 나는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하지만, 설득할 수 있다.
- 모든 거래는 협상이 가능하고, 누구나 진짜 마진은 있다.
- 아이디어를 '실행'하고, '협상'하는 것도 아이디어 만큼이나 중요하다.
누군가가 북한에 가서 일해보자고 하면, 가길 바란다.
갑자기 온 연락에 헝가리에 와있는 지금 안전지대를 벗어난 곳에서 마법이 일어난다는 걸 진심으로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