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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Jun 25. 2020

포기할 수 없는 근무 조건

커리어 체인지 13. 하동 출신이라서요. 할머니 손녀라서요. 

나는 시골의 여름이 좋다. 숲이 우거지고 산에는 온갖 것들이 살고 있어서 아침 저녁으로 소리가 나는데 고요한 첩첩산중이 좋다. 어디를 가든 나무 그늘 아래에서 반짝이는 햇살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으면 살 맛이 난다. 비실거리거나 사람 손을 많이 탄 나무보다, 막 자라고 우람한 나무가 좋다. 


어린시절을 보낸 하동의 마을은 등산이 있었다. 지리산 중턱의 작은 마을이었는데 아주 큰 등나무가 있고 넓적한 바위가 있어서 마을 어른들이 모여서 수박을 먹거나, 밭에서 일을하다가 새참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어른 네다섯이 둘러 앉아도 충분히 큰 돌이 놓여있고, 등나무 두그루의 줄기가 온 등산에 펼쳐져 있어 마을 어디에 있어도 등대처럼 보였다. 나는 그 등대 아래에서 자랐다.  

헝가리 집 근처에 있는 나무. 키가 엄청 크고 여러 그루가 모여있다. '짹짹'우는 작은 새가 산다.

옛날 시골집 마루에 앉아서 대야에 있는 고구마 줄기를 손질하던 기억이 난다. 투명한 껍질을 당겨서 주욱 잡아당겨서 나물 무칠 부분만 대야에 나두고, 남은 부분은 두손으로 모아다가 대문 건너편 마을회관 옆에다 버리고 오면 됐다. 마루에서 갓난아기 사촌동생이 꼬물거리고 있고, 나는 마당에서 놀고있는 동생을 쳐다본다. 할머니 집에서 일곱 살 까지 살다가 초등학교 내내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은 할머니댁에서 보냈다. 


돌이 지나기도 전, 갓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스물 네살 어머니는 육아 휴직이었던지 짧은 휴가 였던지 몸을 추스르자 마자 다시 남해의 섬에 있는 부임지로 돌아갔다. 아버지는 부산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나는 할머니 집에 맞겨졌다. 지리산 자락에 있는 하동의 작은 마을인데 스무채 남짓의 작은 동네여서 뒷산은 선산이고 집 앞에는 바로 논이 있는 시골이었다. 할아버지가 지었고, 아버지의 육형제가 태어나서 자란 마을이고 어머니는 고모의 옆 마을 친구였다. 


할머니가 밭에서 일할 때는 밭 한구석에, 우물가에서 물을 길러서 빨래를 할 때는 우물 옆에, 모내기를 할 때는 논둑에서 컸다. 조금 커서 걸을 때 부터는 산에 나무를 하러가거나 칡을 캐러 가는 할아버지를 따라 지리산을 쏘다니면서 뱀도 보고 뱀딸기도 따먹고 가시에 손도 찔리면서 자랐다. 동생이 생기고 친척 동생들이 생기면서 골목대장이 되서 저수지에서 물이 내려오는 수로에서 물썰매를 타다가 혼나기도 하고, 산소가 있는 산에서 미끄럼틀을 타다가 벌을 서기도 했다. 말을 할 수 있을 때 쯤에는 할머니를 따라 장에도 나가고 버스를 타고 남해로 갔다. 


논밭에 일이 없을 때 할머니는 알바를 하셨고, 그 돈으로 라면이나 아이스크림을 사주셨다. 그때는 아직 아버지도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젊은 선생님으로 떨어져있고, 돈이 필요하면 논을 팔고 소를 팔아서 마련했으니 여유롭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를 따라서 섬진강변에 가면, 나무로 된 얄팍한 상자 같은 채를 양쪽에서 잡고 흔들면 뻘에서 모래는 빠져나가고 반짝거리고 조그만 재첩만 남는다. 그 재첩을 하루 종일 고르고 돌맹이나 벌레를 빼서, 빨간 고무 대야를 한가득 채우면 그날 일이 끝났다. 


할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또 알바를 구하셨다. 종이 토큰으로 되어있던 버스 표를 떼서 내 손을 잡고 남해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으셨다. 꼬막은 뻘에서 잡아야하는데 숨구멍이 보이는 곳을 손으로 뜨기만 해도 꼬막이 후루룩 딸려왔다. 할머니는 호미를 쓰고 나는 손으로 갯벌에 찌르기만 해도 내 손만한 꼬막들이 딸려나왔고 우리가 채워야할 파란색 바께쓰는 금방 가득찼다. 항상 갈 수 있는 알바가 아니어서 몇번이나 다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도 읍내에서 내려서 마을까지 걸어갈 때 할머니가 항상 쭈쭈바를 사주셔서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동생들을 돌보지 않아도 되고, 할머니를 혼자 독차지 할 수 있어서 오히려 가자고 조르기도 했던 것 같다. 바닷바람도 쐬고 어른들한테 칭찬도 받으면서 맛있는 것도 얻어먹었으니 꿀알바였다. 



나는 한참 일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바람이 스칠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게 좋다. 어디든 초록색이 보이는 곳에서 일하고 싶다. 어떤 일이 되었든 밥먹는 시간은 칼같이 지키는 일이 좋다.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에서 일할 때 전시 설치를 하다가도 고개를 들면 사방이 나무고, 옥상에서 일할 때는 저 멀리 바다와 리도 섬이 보였다. 점심을 천천히 먹으면서 무한으로 유리병에 제공되는 레드와인과 프로세코를 마시고, 배가 터지게 점심을 먹고 시에스타를 즐겼다. (!) 다들 핸드폰을 하거나 뭘하고 지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도 없는 전시장 옥상에 올라가서 나무 그늘에서 낮잠을 자거나, 비엔날레가 열리는 지아르디니 공원 밖 바로 앞에 있는 바다쪽 담 위에서 잤다. 


담에 아카시아와 라벤더가 많아서 향기가 진동을 했다. 
매일 낮잠을 잤더니 새까맣게 타고 항상 술을 달고 살았다 
산타루치아 성당이 보이는 방향으로 난간이 편평하고 넓어서 충분히 누워서 잘 수 있었다. 
옥상에서 보는 나무 사이로 베네치아 바다가 보인다 
한국관 내부에서 보이는 옥상쪽 뷰 

드라마에 나오는 큐레이터는 항상 하이힐을 신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어딘지 고상한 정장을 입고 화이트큐브 미술관에서 작품 설명을 해준다. 내가 아는 큐레이터는 설치 미술 프로젝트를 위해 공장을 돌아다니고, 공사판에서 워커를 신고 기록을 위해 사진을 찍고 항상 바쁘게 전화를 받는 사람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프로덕션을 담당하는 프로듀서에 더 가깝다. 


베니스에서 일했던 경험이 좋아서 그랬던지 나는 돌아다니면서 전시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설치하는 프로젝트를 좋아했다. 언제든 고개를 들면 나무 그늘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점심을 먹고 나서 혼자 낮잠을 자도 찾는 사람이 없는 자연과 가까이 있는 곳으로. 


2014년 부터 2018년까지 철원 양지리에서 하는 REAL DMZ PROJECT와 양지리 레지던시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을 했다. 철원은 DMZ 오대쌀로도 유명하지만 옥수수와 감자, 그리고 파프리카 농사를 많이 한다. 양지리 레지던시는 사무소, REAL DMZ PROJECT 위원회, 철원군,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는 프로젝트 였는데 스페인어와 영어를 할 수 있고 해외 작가 프로덕션 경험이 있어서 연락을 받고, 급하게 스페인에서 철원으로 이동했다. 


이 마을에서 설치미술이란 것을 하려면 장소 협조도 구해야하고, 마을 주민과 레지던시 운영 위원회와도 커뮤니케이션을 해서 예산이나 일정이나 설치물이 무엇이 될지도 협의를 해야한다. 물론 작품을 무엇으로 할지 구상하는 작가를 도와 리서치나 현지에서 재료를 조달하고, 주민이나 장소에 얽힌 이야기들을 이끌어내는 역할도 해야한다. 


커뮤니티 아트나 공공미술 프로젝트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미술관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공동체와 지역을 '대상으로' 짧은 기간내에 무형의 아이디어를 물질적인 결과물로 만들어내야 한다. 참여미술이니 당연히 공동체의 일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 대부분 에너지가 쓰인다. 부산시가 하는 감천마을 미화산업처럼 달동네에 벽화미술을 하는게 아니라,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에서 현대 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자신의 '프랙티스'를 풀어내야한다. 물론 그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통역이지만 문화, 지역의 역사, 사람들의 이야기와 관습, 현지에서 조달가능하고 제작 가능한 물질과 제작 공정에 대한 조달, 새로 전문가나 협력업체를 서칭하고 계약을 맺고 예산과 일정을 관리하는 일까지 담당해야 한다. JD만 보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유학파 출신들을 뽑으면 한달도 안되서 힘들어서 도망간다. 미술에 대해서 들어본적도 없고 관심도 없고, 피같은 세금과 예산이 농촌에 쓰이지 않고 예술 나부랭이에 들어가며 외국인한테 돈을 주고 왜 내가 도와줘야하는지 동의할 수 없는 분들을 설득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골에서 살아야 한다. 직접 같이 살면서, 얼굴도 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생활을 이해하고 스며들 수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현대 미술계의 '프랙티스'나 작가의 프로젝트 진행방식도 조율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우스 안에서 사진촬영하다가 


나는 할머니 집에서 살면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한달 전까지 한글도 모르고 숫자도 못읽는 천둥벌거숭이로 자랐다. 하루종일 마을을 쏘다니고 소의 등에 타고, 90년대 생 여자아이 치고는 우리 아버지대와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시골을 좋아하면서도 시골출신이라 한글도 늦게 배우고, 영어도 모르고, 문화와 세계에 대해서 아는게 없다는 자격지심도 엄청났다. 촌스럽다는 말, 토속적이라는 말이 싫어서 유행하는 것이나 새로운 것은 항상 관심을 가지고 '누구보다 빨리' 트렌드를 흡수하고 전파하는 얼리어답터가 되고 싶어했다. 문화가 풍부한 도시에서 힙한 곳을 골라서 다니고, 문화 경험이 풍부하고 주도하기 까지도 하는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낙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들과 이야기가 통하고, 시골에서 사는게 오히려 편해서 장점인 일이 있었던 것이다. 시골 출신인데 미술사를 전공하고, 베니스에서 국제적인 전시를 리서치 단계부터 철거까지 해 본 경험이 필요한 곳이 있었다. 할머니들의 말을 녹음해도 녹취록을 쓸 수 있고, 적절하게 영어로 번역하고 스페인어 자막을 검수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것이다. 큰 돈이나 유명한 회사 이름보다 나무가 많은 곳에서 일하고, 어느 집이든 문을 두드리면 밥을 얻어먹고 예쁨받는 것이 더 행복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프로젝트에 300%를 쏟을 수 있었다. 


동생이 만든 반지를 끼고 있는 정옥선 여사(함양댁). 올해 설날에 찍었다. @mi.saengmul 

할머니 손을 잡고 봄,여름,가을,겨울 다른 알바를 하면서 논마지기가 있어도 먹고 사는 자급자족 이외에 돈을 벌려면 계절마다 일손이 필요한 곳에서 어떻게 일을 하는지 입에 풀칠하는 법을 배웠다. 매일 같은 곳이 아니라 다른 곳에 가도 숨구멍을 알아보는 눈만 있다면 내 손으로 일을 하고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매일 먹는게 아니라 다른 걸 먹고 싶으면 버스를 타고, 산을 벗어나서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가야하는 것도 배웠다.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보면서 고구마 줄기를 벗기고 야채를 다듬고 빨래를 잘 짜서 탕탕 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글은 늦게 배웠지만 그래서 사투리와 표준어, 부산말과 서울말, 한국말과 영어를 다르게 듣는 귀와 훈련하면 어떤 말씨든 쓸 수 있다는 경험이 생겼다. 산업과 기술과 세상은 바뀌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는 걸 할머니를 보면서 배웠다. 먹고 사는 법, 자고 일어나는 법, 새싹이 자라고 추수를 하면, 겨울이 오고 그 다음에는 봄이 다시 온다는 것. 


나는 신논현역에 있는 사무실 근처에 자취를 하면서까지 회사 근처에 살고 싶어하는 내가 참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는 돈을 모으느라 한시간 넘게 떨어진 부모님 집에서 통근을 하는데 무슨 수로 내가 지옥철을 피한단 말인가. 아침에 회사로 가면서 지하철 계단 대신 가로수길을 지나 조금이라도 초록색이 있는 뒷골목으로 회사로 가면 기분이 한결 낫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서 그랬던 걸까? 간판을 읽거나 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걷는게 아니라 매일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나무와 풀들을 보면서 걷는게, 모진 회사에서 버티는 유일한 숨구멍 아니었을까? 


헝가리는 기후도 다르고 서울처럼 24시간 돌아가는 대도시도 없다. 내가 지내는 곳은 아주 조용하고 버스도 한대 밖에 없다. 그래도 강이 있고,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핀 꽃들과 키가 큰 나무들이 가득하다. 햇빛이 강하고 바람도 불어서 어디를 쳐다봐도 나뭇잎 사이로 빛이 반짝거리며 부서진다. 그래서 일을 계속할 힘이 생긴다. 사무실 등 뒤로 과장님이 내 컴퓨터 화면을 매일 쳐다보고, 먼지가 날아다니고, 아침 8시부터 저녁 7시까지 일해야하지만 눈만 돌리면 들판에 초록이 가득하다. 아침에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일어날 수 있다. 난 이정도면 괜찮다.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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