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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Jun 19. 2020

전 대체 뭐하는 사람일까요

커리어 체인지 12. 나의 경력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다시 스타트업으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지, 미술계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몇 가지는 알겠다. 


- 스펙이 아니라 경험이 중요하고, 더 이상 직장과 명함이 나를 대변하지 않는다.

- 생애기간 동안 삶의 방향에 따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여러 번 직업을 바꾸고 다양한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 밀레니얼 세대는 이력서가 아니라 나만의 콘텐츠 만드는 포트폴리오를 쌓아가야 한다.  


나를 브랜딩 한다는 것은 내가 가진 역량과 강점, 그리고 경험을 엮는 스토리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충분히 시장성이 있고 개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기대를 받는다는 뜻이다. 유명한 회사에서 이름을 날리는 성과를 낸 것도 아니고, 특출난 콘텐츠가 있어서 크리에이터로 생활하는 것도 아닌데 나에게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지저분한 이력서를 볼 때마다 어떻게 이야기할지 난감하기만 했지, 나의 가치와 경험을 브랜드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한 포장하려고 애썼다. 브랜딩의 핵심은 '평판'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치'에 있는데 질문의 방향이 잘 못 된 것이다. 강점이 아니라 약점을 감추는데만 급급했다. 실제로 업무를 할 때도 애써 감춘 약점을 들킬까 봐 더 불안했던 것 같다.


강점에 집중해야 하는데 약점에 허덕였다. 회사나 타인의 기준에 의해서 그럴싸 해 보이는 프로젝트, 성과 지표, 최신 툴과 전략을 '나도 할 수 있고 해 봤다'에 집중하느라 잘해봐야 평타에 머무르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못하고 모르는 것을 커버하는데 골몰하느라 학원, 강습, 리서치에 시간과 돈을 썼다. 진짜 나의 무기를 뽑아보지도 못했다. 강점을 사용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니 당당하게 내 강점을 드러내지도 못했고, 조직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고, 항상 내쳐질까봐 누군가가 나를 쓸모없다고 할까봐 불행했다. 나름대로 소비자에 집중해서, 서비스를 알리기 위해 내가 아는 것을 총동원해가면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출발선이 잘 못 된것이다. 열심히 해도 계속 불안하고 스스로를 비난만 했던 내 모습에는 약점에서 출발한 일하는 나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사실 나의 강점이 어떤 건지도 몰랐다. 누군가 칭찬하면 '아뇨, 제가 한 일이 아닌걸요. 다 같이 했어요.'라며 크레딧을 받지도 않았고, 스스로를 칭찬해주지도 않았다. '에이, 별거 아닙니다. 누구나 하는 일인걸요.'라며 애써 당연한 일을 하는 일꾼으로, 일개미로 스스로를 작게 만들었다. 계속 비교를 하면서 어중간한 나이의 헌 신입이라며 스스로를 깎아내리고 있었다.


설상가상, 자신있게 내밀 나의 전문성이 뭔지도 모르겠다. 워낙 다양한 일을, 다양한 분야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보통 성적표는 직위나 연봉으로 한다면 내 성적표는 초라하기만 하다. 무슨 무슨 직업 N연차로 계산하기도 애매하고, 연봉 테이블이 있는 회사를 다닌 적도 손에 꼽지만 그조차도 너무 짧아서 유의미한 지표는 아니다. 내 일의 '쓸모'를 부르는 이름표가 없거나 애매한데, 설명할 수가 없는데 내가 어떤 일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까? 미술계에서 오래 일했다고 하더라도 업계 구조 특성상 초단기 계약직을 여러 개 이어서 하기도 했고, 국내가 아니라 해외에서 프로젝트를 많이 하기도 했었다. 통역, 번역, 홍보, 마케팅, 콘텐츠 제작 등 다양한 기술을 사용하지만 메인 업무라고 보기엔, 주요 전문성으로 보기엔 경력이 애매하게만 느껴졌다.

 


이직을 위한 이력서 업데이트 대신, 경력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대담을 통해 우리는 전문성을 ‘일의 맥락을 파악하고 완결성 있게 일을 끝내는 능력’으로 다시 정의했다.
일을 수행하려면 여러 기술들이 필요한데, 전문성은 내가 ‘어떤 생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을 사용하는가에 달려 있다. 내 업무를 완성하기 위해 자원을 관리하고, 일의 맥락을 정돈해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며 함께 일을 해 나가는 능력이 전문성의 핵심 요소다.

직장이나 직업의 개념을 벗어나 나의 업무 중심으로 일을 해석하면, 자기 일의 서사를 자기가 가질 수 있다. 구조에 의한 잦은 이직, 상황에 맞춰 결정한 퇴직, 다양한 상황에서의 업무가 모두 연결되고, 내 일의 역사가 전문성을 갖춰 가는 과정으로 설명된다.” - <자비 없네 잡이 없어>, 최태섭 외 8명, 서해문집

 

나에게 있는 가치와 매력이 경험에서 나온 다면, 내가 지금까지 했던 일을 어떻게 '나의 경험' 중심으로 엮어 낼 수 있을까? 내 삶에서 의미 있는 경험들과 그 과정에서 얻은 역량을 어떻게 포트폴리오로, 나의 강점으로 브랜딩 할 수 있을까? 포트폴리오는 한 예술가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집이자 이력이다. 내가 만들어낸 내 삶의 작품과 작품의 의도가 뭔지, 어떤 과정을 통해서 탄생했고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엮는 게 포트폴리오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보여줌으로써 설득하고 나와 함께 일하고 싶게 만드는 초청장 역할을 한다.


단순히 내가 했던 일을 프로젝트 단위로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일의 경험은 회사 이름과 업무 몇 줄로 이뤄진 게 아니다. 그럼 내가 겪은 경험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참여했던 프로젝트와 경험한 일의 순간순간이 기억나긴 한다. 그 장면과 나의 내면에 남은 가치를 묘사해야 한다는 걸까? 대니얼 카너먼이 TED 강의 <경험 대 기억>에서 기억하는 주체와 경험하는 주체가 다르다고 주장한다. 경험하는 주체는 '현재를 살면서 현재를 알고 과거를 회상할 수 있는, 하지만 무엇보다 현재만을 간직하는' 존재며 심리적인 현실은 3초에 불과하다고 한다. 대부분의 경험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고, 삶은 6억 개 정도의 순간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대부분 우리가 경험을 말할 때는 사실 '기억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가깝다고 한다. 기억하는 주체는 여태까지의 변화를 잘 기록하는 존재이며, 경험을 통해 남겨진 인생 이야기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우리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질 때 응답하는 주체이다. 이때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 정체성, 자아관에 부합하는 편집을 거쳐서 앞-뒤, 과거-현재가 맞게 기억하는 결정권이 생긴다. 여러 가지 경험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결정하고, 심지어 미래마저도 어떤 새로운 경험의 순간이라는 관점보다는 현재에서 예측하는 앞으로의 기억이라는 측면에서 보고 있다고 한다.


포트폴리오는 일하는 나의 총체적인 기억이다. 일의 여러 순간들을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호출하고, 내 삶의 가치와 현재에 영향을 준 맥락과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한 뒤, 나의 가치관과 정체성에 부합하는 이야기로 편집해서 정리해 놓은 콘텐츠다. 내가 지금까지 이력서에 습관적으로 썼던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에 대한 과거 회사, 조직, 타인이 정해 놓은 타이틀에서 진짜 내가 생각하고 경험했던 일에 대해서 정확한 말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첫 번째로 쓸 내 인생의 일, 작품이 월급을 받고 다녔던 첫 직장인 부산비엔날레가 자동으로 첫 줄에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나에게 편집권이 생기고 내 이야기를 직접 들려줄 수 있는 위치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것,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 변화한다는 것, 이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금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일에 대한 방향을 정하고, 지금까지 믿어왔던 '나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검증해본다는 뜻이다. 아직 내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내 생각으로 의식되지 않는 이력을 꿰뚫어 보는 작업을 해보겠다는 의지다. 다른 사람이 좋다고 하는 회사나 일자리에 대한 평가 기준, 내 또래의 다른 이력과 스펙을 가진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비교에서 벗어나려면 내 경험에 대한 스스로의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지금까지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평가해주던 부모님, 교수님, 면접관, 전 회사 동료의 평가나 사람인 같은 채용 플랫폼의 카테고리를 따라 나의 포트폴리오를 만들 순 없다. 나의 일 경험과 역량에 대한 정확한 말을 찾아내야 한다. 익숙한 생각의 패턴에 거리를 두고 신선하고 다정하게, 그리고 투명하게 나의 일을 바라보고 싶다. 포트폴리오 만들기 작업을 통해서 내가 인식하고 있었던 나의 일 경험을 세분화하고 구체화하고, 나의 일과 일 사이를 이어주는 연관성을 찾아내고, 정확한 자기 인식에 걸림돌이 되는 강박이나 기만을 벗어나고 싶다.


내 커리어를 말과 글로 정리해보는 게 중요한 이유


나는 지금까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고 시무룩해 있을 때, 뭐라도 다른 일을 해보기 위해 테크 스타트업에 제안을 드리고 나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설득하고, 내 포지션을 협상해본 경험이 소중하다. 살아가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적극적으로 나의 정체성과 가치를 표현해 본 기념할 만한 사건이어서 그렇다. 내 삶의 방식에서 흘러가는 데로, 남이 나를 사용하고 쓸모를 발견해주는 데로 에너지를 쏟아 붓기만 하던 열정 넘치지만 눈먼 사회 초년생에서 진정한 사회인이 된 순간이라고 기억한다.


직업을 내 손으로 선택해보면서 한 사람이 삶을 이끌어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단편적이고, 사전 업무 경력이 없어서 불가능할 거라며 속삭이던 모범생 미술계 자아를 걷어서, 인식되지 않았던 경험들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이런 성격의 일은 이렇게 다룰 수 있다고 인식화를 해내고, 말과 글로 설득했으니까. 커리어 체인지는 이전의 나는 실패했으니 폐기하고, 새로운 나가 되는 '덮어쓰기' 과정이 아니었다. 과거의 경험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다니 스스로에게 미안해졌다. 오히려 사회의 압박을 걷어내고 나 자신의 눈으로 스스로를 재발견해서 정체성을 구축해나가는 앎의 과정이었다.


지금부터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서 일하는 나를 다시 관찰해보려고 한다. 경력 간의 이동 이유와 배경을 이해하고, 나의 전문성이 될만한 강점과 역량을 해석해보고, 현재의 나를 만들어준 의미있는 일 경험들을 정리해보고 싶다. 처음 만들어 보는 포트폴리오라 원재료가 될 만한 경험들을 글로 써보고, 질문을 던져보는 방식으로 진행해보려 한다.


내가 생각하는 첫 의미있는 일은 할머니를 따라 남해에 꼬막을 따러 갔던 '꼬막 알바'이다. 일곱살 때까지 하동에 있는 할머니댁에 살면서 처음으로 '고고학자'라는 직업을 꿈꾸던 시절부터. 그러다가 미술관에서 일하면서 전세계의 유명한 컬렉션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던 어떤 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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