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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진킴 Sep 29. 2020

9월: 1%의 힘

용감해지고 싶은 가을의 시작 

당신은 진정한 당신을 발견하기 위해 반드시 겪어야만 했던 실수들의 연속입니다.


나 다운 공간이 주는 힘 


처음으로 나의 '공간'을 위한 소비를 했다. 정말 마음에 든다. 집에 올때 마다 햇살이 비치는 모양도 마음에 들고, 휴식하는 기분도 나고, 요가도 어쩐지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정리정돈도 열심히 한다. 왜 지금까지 이 재미를 몰랐지? 


회사 숙소라 나만의 공간이 '방' 밖에 없기도 하고, 코로나로 이동도 제한되어 있어 시간을 절대적으로 많이 보내는 곳이기도 하다. 회사에서 마련한 침구는 테스트코 매장에서 파는 제일 싼 코튼 재질이었는데 연두색에 이상한 줄무늬와 꽃이 그려진 유치한 스타일이었다. 기분이 한 없이 쳐지던 어느날, 분위기를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에 자라홈 방문을 계획했다. 홀린 듯이 하나씩 사모았는데, 집에와서 보니 그림으로 그린 것 처럼 잘 맞았다. 공간에 활기와 나의 성격이 뭍어나는 것 같아서, 애착도 생겼고, 그만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을 더 소중히 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동생이랑 같은 방을 쓰면서 그때그때 필요한 것들을 나두고 잠시 몸을 뉘이며 10년을 살았다. 워낙 외부활동을 많이 하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주말에도 집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그냥 집에 들어와서 지쳐 쓰러져서 잠든 다음 일어나서 씻고 나가는 것이 반복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미술작품도 같이 일했던 작가들이 선물로 준 사진이나 드로잉이 두서없이 거실에 있을 뿐 집 어디에도 미술인의 취향이나 정체성은 없다. 


부러운 눈으로 디렉토리 매거진이나 오늘의 집에 올라오는 집주인의 취향이 드러나는 집은 돈만 있다고 되는게 아니라, 진짜 나의 공간에 대한 관심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았다. 그만큼 내가 내 세계의 중심이 되어 주변을 찬찬히 보살피는 행동과도 같다는 것도. 나는 그동안 겉으로 보이는 옷이나 구두, 화장품 같은 꾸밈비에만 돈을 쓰고 정작 집에서는 민낯으로 지낸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앞으로 집에도 이만큼 돈을 써야겠다가 아니라 '나답게'의 영역에는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주거공간도 들어가고, 내 물건과 공간에도 책임을 져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한 번에 공간을 바꾸거나 꾸미는 데는 돈이 많이 드니까, 조급하게 당장 내 취향으로 가꿔야지!라는 생각보다 우선 안맞는 것들을 다 정리한 다음 하나씩 조심스럽게 쌓아가고 싶다. 20대 대학생 때만 대충 살다가 곧 결혼하겠지 라는 '임시 공간' 개념을 수정하고, 지금 여기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자라 홈에서 하나씩 골라서 완성한 베딩세트와 보석함, 비엔나에서 산 연필꽂이, 가을 꽃.


내가 대출 상환을 끝낸다면


모든 이의 시간은 다르게 간다. 최소 1억 정도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 나만 빼고 다들 재테크하고 청약점수가 nn점은 될 것 같다는 비교. 어느 부서 누구는 주식으로 nn% 수익을 올렸다는 풍문을 들을 때마다 나는 바닥으로 꺼지는 것 같다. 비참해진다. 어쩔 수 없나 보다. 통장을 보면 마이너스만 보이니까. 다른 사람이 부러울수록 과소비에 대책 없이 돈도 안주는 미술계에서 고생만 한 것 같고, 내가 끊임없이 미워진다.


'너 지금까지 뭐했니? 뭐한다고 모아둔 돈은 하나도 없고 빚뿐인 거야.'


그만하자. 정작 나에게 해줄 말은 따로 있다. 1년 전 재무상담을 들었을 때 '혜진 씨는 정말 에너지가 넘치는 것 같아요.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보고 살았네요. 정말 좋아하는 것에 아낌없이 돈도 써보구요. 그만큼 스스로를 아끼는 거예요.' 심판자가 아니라 나의 상황을, 내 통장 성적표를, 나의 자초지종을 차분히 듣고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친절하고 따듯한 눈으로 나를 다시 바라볼 용기를 얻었다. 


마지막 상담 때, 절대 못할 것 같았데 해낸게 뭐였나요?라는 질문이 있었다. 그 일도 해냈던 것 처럼 혜진씨 할 수 있어요. 네. 울먹이면서 대답했던 것 같다. 그 뒤로 이게 다 소용이야?라는 울분이 들 때마다 이 대화를 떠올린다.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안죽었고, 다시는 회복 못할 것 같았는데 지금 잘 살고 있잖아. 그렇게 천천히 무서워서 외면했던 여러 부채와 나쁜 습관을 해결하고, 우선순위에 맞게 삶을 정돈할 수 있었다.  


아등바등했던 20대를 비난하기 보다 인정하게 된 계기였다. 이제 나는 나의 결정과 행동, 소비에 책임을 진다.

이 나이엔 어느 정도 이뤘어야 하는데 실패한 나 자신이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사실 문학적인 상상력이 부족한, 납작한 사고방식에서 나오는 문제라는 걸 알았다. 


'이것은 문학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좋은 인생의 예가 단 하나의 스토리 라인만 갖고 있다는 것, 그 이야기를 따랐음에도 좋지 못한 인생을 산 사람이 많은데도. 우리는 마치 하나의 해피엔딩을 가진 하나의 좋은 줄거리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말한다. 수많은 형태의 삶들이 우리 주변에서 온통 피고 지는데도.'- <여자들은 항상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서 레베카 솔닛


이렇게 노력했는 데도 기껏 제로로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이 가끔 허탈하다. 하지만 노력에는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 아무리 작은 결과라 할지라도 자신을 다독이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마이너스(-)에서 (+)의 영역으로 추를 옮겨가는 일이니까, 방향을 트는 데 성공한 것 아닐까. 나를 바꾸는 과정도 모든 변화와 마찬가지로 정체기가 존재한다. 일시적 퇴보로 고꾸라지기도 하고, 무력감에 빠져 '난 뭘 해도 안돼. 이미 망했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9월에는 목표를 달성하기 직전 과거의 나로 돌아가서 신용카드를 한도까지 땡겨쓰고, 갑자기 무책임한 여행을 떠날까 봐 두려웠다. 하나씩 차근차근 잘하고 있다는 것, 내가 목표를 이루기 위한 단계들을 차곡차곡 밟아가고 있다는 걸 스스로 확인시켜줘야 한다. 또 살아갈수록, 돈을 벌어보고 쓰고 모으고 불려 갈 수 있도록 용감해지기 위해서라도 나는 증거가 필요하다. 


내가 먹고사는데 드는 비용, 나를 키우고 성장하기 위한 장학금, 나를 지킬 수 있는 안전망 같은 걸 만드려면 얼마나 필요한지, 나는 어디에 돈을 쓰면 뿌듯한지 어떤 소비에는 죄책감을 느끼는지... 나를 잘 알고 싶어서 가계부와 정산 일기를 쓰고, 커뮤니티에서 월간 결산 회고 번개도 연다. 스스로에게 필요한 말을 계속해주고 싶다. 나는 나를 무조건 믿는다고.  


'잘하고 있어. 계속해. 1% 복리의 마법을 믿어.'

다음 달, 저는 2011년부터 끌고 오던 크고 작은 신용대출의 종지부를 찍고 자유의 몸이 됩니다! 




Best 소비 Top 3 

1. 자라 홈에서 내 공간을 위한 소비 250,000원

자잘하게 하나씩 고르고 컵까지 하니 25만 원이나 들었다. 근데 하나의 세트가 완성되어야 확 집이 바뀐 느낌이 들 것 같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후회하지 않는다!! 


2. 매일 마감 시즌권 결제 30,000원 

매일 기분이 처질 때쯤 커피를 마시면서 매일 마감을 읽었다. 핸드폰으로 보면서 낄낄되며, 또 나보다 '언니'이면서 멋지게 사는 창작자들을 보면서 랜선 동생이 되어 고개를 주억거렸다. 매일매일 솜씨 있게 다듬은 문장, 글, 반짝반짝한 생각들에게 가까워지는 것만으로도 한결 행복하다. 마이 영혼의 수프로 임명! 다음 달 요일별 매일 마감 차림표(!)를 보고 홀라당 시즌권으로 가입했다. 


3. 카카오 프로젝트 영산 매 시즌2 10,000원 

한편 나도 매일 상을 차린다. 영혼을 위해, 더 섬세하고 결이 고른 영어를 갈고닦기 위해서 매일 한 편의 영어 산문을 골라서 공유한다. 각자 원하는 만큼 열심히 읽고, 쓰고, 감상이나 공부한 내용을 공유한다. 살기 위해서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매달렸던 시즌1과 달리 좀 더 일상 루틴의 일부가 된 것 같고, 멤버들이나 프로젝트의 성공에 대한 집착보다 개인적인 성취를 더 우선시하게 되었다. 1만 원의 작은 닻 내리기, 100일간 파도를 잘 이겨내게 해 준다. 


Worst 소비 Top 3

1. 자동결제 Meetup.com 60,000원

음, 영어 글쓰기 모임을 상수에서 잠깐 열었고 닫은 지가 작년이었네. 1년 넘게 얼씬도 안 하던 플랫폼에서 자동결제되었을 때 충동적으로 일을 벌였다가 유지할 에너지나 관심사가 딸려서 널브러진 프로젝트에게 싸대기 맞는 느낌이다. 자동결제는... 정말.. 사회의 악이야. 환불 요청을 할 아이디나 비번도 못 찾았고, 이 참에 현대카드를 분실 처리했다. 그만둔 프로젝트는 다 이유가 있어서 그만둔 거다. 시간이나 체력이나 팀이나.. 뭐가 안 맞았으니까 그만뒀겠지. 한계는 한계로. 아닌 건 아닌 걸로 잘 마무리해야겠다. 덮어놓고 부정하거나 애써 잠시 그만둔 것일 뿐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자기기만적 게으름/미루기 트랙을 타면.. 이렇게 자동결제로 뒤통수 맞는다. 흐흑 


한방에 해결하기 위해서 신용카드를 일단 다 해지한다. (신용카드 없앨 때도 되었다) 

앞으로 결제할 때 미리 달력에 표시 다 해놓고, 해지를 깜박해서 기습 결제 당하지 않기! 

신용카드 정보는 웹이나 사이트에 저장하지 않는다. 


2. 오이쇼에서 충동구매한 원피스 36,486원 

세일 랙에 걸려있어서, 린넨인 데다가 랩으로 감쌀 수 있고 마음에 드는 테라코타 색이길래 결제하러 가는 길목에서 잡아챈 상품. 세일도 아니었고, 입어보지도 않은 옷을 산건 정말 오랜만인데 역시나 실패였다. 

다음 정거장이었던 H&M에서 입어보고 기겁... 일단 린넨이 너무너무 까슬 하고 실밥 처리가 잘 안 돼있어서 간지러웠다. 똥자루 낙엽 옷을 입은 것처럼 칙칙해 보이고 영 별로. 사이즈도 어딘가 안 맞는지 걸을 때마다 가슴이 벌어져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먼길을 왔지만 쓰레기를 4만 원 치 사갈 순 없다는 생각에 돌아 돌아 환불하러 다녀왔다. (세일 제품이 아니었다는 것도 환불할 때 알았다) 


옷은 무조건 입어보고 사자. 특히 몸에 자신감이 없고 내가 생각하는 몸 사이즈와 실제 사이즈가 안 맞는 요즘은 더!!! 충동구매, 온라인 충동구매를 조심해야 한다. 


3. 나이키에서 레깅스와 탑 2개 210,000원 

헬스를 시작한 건 좋았는데, 자동으로 거울로 보는 나의 현실 몸매를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혐오와 비판이 시작되었고, 옷이 문제인가 싶어서 잘 잡아준다는 비싼 레깅스와 탑을 2개나 샀다. 사실 내 문제는 시간과 그동안 쌓인 버릇들이 만든 만큼, 같은 방식으로 풀 수밖에 없다. 20만 원 치 옷을 산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데, 때깔이라도 곱게 프로페셔널하게 보이고 싶은 나의 갸륵한 마음은 안쓰럽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해준다는 일은 참 어렵다. 어렵고, 옷을 바꾼다고 1달 운동한다고 몸이 확 바뀌지 않는다는 걸 인정한다. 과거의 몸매로 돌아가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한다. 과거의 몸보다는 지금 일하고, 퇴근하고 나서도 운동하고 공부할 만큼 에너지가 남아있을 체력을 키우는데, '컨디션'을 가지는 데 더 집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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